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부 참 종교 (1:19-2:26) 5. 가난한 자들을 돌봄 (1:27-2:26)
 우리가 야고보서를 읽을 때 그의 기별을 바울의 기별에 대하여 긴장감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기별이 서로 규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조직화하려는 노력 중에, 이 두 사도들의 저술들에 경우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와 바울이 개인의 삶 속에서 다른 두 기간에 표명되는 믿음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그가 구원이나 칭의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회심 전(preconversion) 믿음이나 혹은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초기 단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한편 야고보의 경우에는, 그가 성화의 신학, 즉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칭의 이후에 살아가야만 하는 생애에 대하여 제시하고 있다고 그들은 제안한다. 하지만 그 같은 조화가 올바른가? 아니면 이것은 야고보와 바울이 같은 것을 말하며 같은 개념을 표명하려는 시도인가? (129.1)
 야고보와 바울 사이의 병행관계 대신에, 야고보를 침례 요한과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까? 회개를 위한 요한의 외침에서, 그는 그에게 다가오는 군중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마 3:8; 눅 3:8)으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대한 누가의 기록에서, 회개에 대한 요한의 외침에는 사회적 관심, 즉 없는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나눠주며, 필요보다 많은 세를 거두지 말며, 강포를 행치 않는 것들을 포함한 것이 명백하다(눅 3:10-14). 이 모든 것이 침례보다 선행한다! 놀랍게도, 누가복음에서 주어진 예증들은 야고보서 2장의 예증에 반사된다. (129.2)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을 때 직면하는 문제는 서구적 문제인데, 즉 구원에 대한 명쾌한 순서를 갖고자 하는(신학자들이 ordo salutis라 부르는 것) 필요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 같은 관심은 갖지 않는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독하면 구원의 경험에서 야기될 하나의 특별한 순서는 없음을 보여준다. 대신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구원은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성경 기자들 개인의 문맥적 목회적 관심은 개념이 강조된 이 간단하지만 복잡한 국면을 규정한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진정한 믿음과 행함은 상호보완적이며 동시 발생적이다. 둘 다 구원의 사건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129.3)
 믿음과 행함이 예증됨
 야고보는 그의 논제—거짓 믿음(행함이 부족한 것)은 구원하지 못한다—를 진술한 후에 즉시로, 진정한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진술함으로서 그의 요점을 예시한다. 그는 이것을 2:15-17에서 예시하는데, 그 구절들은 사회적 관심이 중심이다. 우리는 후에 다시 이것으로 돌아갈 것이다. (130.1)
 반대자는 야고보의 입장에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 야고보의 상대자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두 개의 구분할 수 있으며, 연결되지 않는 항목들이다”(McKnight, 362). 이러므로 반대가 제기된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다.” 이 대담자의 의견에는, 믿음과 행함은 영적인 생애에서 분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 연사에게 그 관련이 없음을 증명하도록 촉구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고 말한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것만큼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한 도전이다. 증명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보여지며 만져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행함과 분리되어 보여지기는 불가능하다. 야고보서의 문맥에서, 참된 믿음은 예증될 수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행위로부터 그것을 분리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그는 세 가지의 예증을 제시한다: 귀신들, 아브라함, 라합. (130.2)
 그의 첫 번째 예증에서, 야고보는 믿음 하나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확신을 마치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신 것처럼 산산히 분쇄시킨다. 여기서 야고보는 신랄하게 그의 상대자에게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9)고 말한다. (130.3)
 야고보는 그가 귀신들조차도 하나님이 일체 되심을 믿는다고 말할 때 풍자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Ralph Martin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 것은 참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야고보의 청중들 중 누구도 그 같은 믿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자가 없을지라도, 귀신들도 믿기 때문이다”라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이는 단지 “귀신들은 신적인 numen에 반응한다.... 그러나 그 같은 인정조차도, 믿음의 이런 유형을 위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것은 쓸모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89)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마틴은 말한다. (131.1)
 야고보가 “믿음을 지적인 동의로서 행함과 대조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믿음이 분출되어야 할 필요를 지적하려 한다.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그것이 홀로 존재하기는 불가능하다. 귀신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한 분이심에 대한 믿음은 두려움의 반응을 낳는다”(128)라고 Sophie Laws가 잘 진술한 것처럼, 우리는 여기서 요점을 잡아야만 한다. 반대자를 향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귀신들이 떠는 것(고대 주술적 본문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효과에 사용된 동사)과 같은 반응과 온전히 다른 반응이 나올만한가?” 아니면 “당신의 믿음은 긍정적인 사회적 행동이 명백히 증명되는 것인가?” 야고보에게 있어서, 이 예증에서 문제는 이것이다: 믿음의 반응은 무엇인가? 믿음이 진공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응(실증)은 진정한 것이든 사귀적인 것이든 믿음과 동질시될 것이다. (131.2)
 야고보는 그의 상대자가 귀신에 대한 작은 예증으로는 요점을 파악치 못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강력하게 되었으며, 가상의 사람에게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언어로 말했다. “허탄한 사람아”라고 그는 말한다(20절; New American Bible은 “아는 체 하는 바보야!”라고 번역한다). 그 같은 사람은 사실상 머리가 비었고, 어리석으며, 이해력이 부족한 자이다. 그때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절)라고 질문한다. 여기에 언어유희가 있다. “헛것”은 문자적으로 “행함이 없이”라는 의미이다(헬라어로 a + ergos; a는 부정접두사). 그래서 야고보는 여기서 행함(ergos)을 갖지 못한 믿음은 역사하지 않는다(argos)는 것을 말하고 있다. 상대자는 너무 우둔해서 이 요점을 이해할 수 없다. 야고보는 더 많은 증거를 제공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말하는 바를 예증하기 위해서 유대 역사와 전승에서 잘 알려진 두 사건들을 제시한다. 그들은 대조되는 사람들이다—한 사람은 거룩한 선조이며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며, 다른 한 사람은 죄 되고, 외국인 여자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삶과 행동으로 믿음과 행함이 분열될 수 없음을 예증한다. (131.3)
 야고보가 그의 중요 예증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도 반대자가 행함이 필요 없는 믿음의 고전적인 본보기로 아브라함을 두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로마서 문맥에서 바울처럼(롬 4:22을 보라), 반대자도 믿음만이 필수적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아마도 창세기 15:6을 사용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모든 일을 행할 때 신뢰했기 때문에 그를 의로 여겼다(because all Abraham did was believe, and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야고보는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야고보가 제시한 질문은 예라는 답을 요구하며(질문에 대한 헬라어 본문의 형성에 기초하여), 아브라함은 그가 행한 것으로 칭의함으로 혹은 의로 간주되었다고 예증한다.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1)고 질문한다. (132.1)
 이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 신학적 폭풍을 야기한 것은 야고보의 dikaioō(의롭게하다. 의로 여기다)의 사용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며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의해 증명됨을 명백히 한다(롬 4장). 야고보는 반대의 주장을 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누가 옳은가? 누가 틀리는가? 루터에 의하면, 야고보의 dikaioō의 사용은 개혁 해석자들의 법정적, 율법적 정의와 모순되기 때문에, 야고보가 틀렸다고 판정받았다. 이 정의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받아들일 때, 그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최초의 행위와 관련된다. (132.2)
 하지만, 야고보는 마음속에 칭의에 대해 그 같은 법정적, 율법적 해석을 하지 않음이 사실이다. 사실, 바울이 그렇게 정의된 개념을 의도했으리라는 것도 의심스럽다. 더욱이, 성서학자들은 이 용어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사용이 매우 히브리적이라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즉, 둘 다 그것을 구약의 언약 관계에 대한 개념으로 사용했다. 율법적 유대주의자들에 대항한 바울의 논쟁에서, 그의 초점은 구원받기 위한 율법의 자의(字意)를 유지하는 데 있으며, 그는 신자들의 그 관계 속으로의 최초의 도입에 초점을 맞추기 원한다. 반면, 야고보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한 윤리적 관심을 다루고 있으며, 더욱더 전체적인 것에 흥미를 갖는다. 두 사도들 중에, 야고보가 충실함과 순종함과 연관된 언약관계로서의 구약의 칭의에 대한 이해와 더 밀접하다. (132.3)
 야고보는 칭의를 시간적 연속성 선상에서 판단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의 칭의는 의에 대한 초기의 선언인 반면, 야고보의 선언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행실을 수행하거나 계명들을 완전히 준수함으로 의롭다고 증명되는 마지막의 종말적인 판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비록 야고보가 아브라함의 생애 중 하나의 사건(이삭의 제물—창 22장)으로 그의 요점을 예증하지만, 24절에서 창 15:6을 사용함은 그 하나의 사건에 제한받지 않는다. 칭의의 경험은 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포함한다; 이삭과의 모리아 산 사건은 단지 그중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은 2:22의 헬라어 미완료 시제에 의해서도 확인되는데,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맏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sunērgei)”라고 말한다. 미완료 시제는 계속되며 진행중인 행위를 가리킨다. 믿음, 행함, 칭의, 언약 관계, 충실함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계속적으로 함께 활동한다. 이런 총체적인 관계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23절)이라 칭할 만큼 그의 지위가 향상된다. (133.1)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그의 논지를 입증한다. 그는 이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4절)라며 교리적 주장을 끝맺는다. 루터의 “믿음으로만”이라는 용어는 바울의 것이 아니라 야고보의 것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라고 Sophie Laws는 주석한다(137). 바울은 그의 헬라어 본문에서 으로만(alone)이라는 단어를 사용치 않는다. 하지만 루터는 그 단어가 있어야함을 느꼈고 그의 독일어 분문에 그 단어를 삽입했으며, 그것으로 야고보서를 반대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야고보의 신학은 믿음이나 행함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가 으로만(alone)이란 단어를 사용한 사실은 그가 믿음을 버리려는 마음이 없었음을 가리킨다. 그의 윤리나 그의 신학은 믿음과 행함을 둘 다 포함한다. (133.2)
 24절로 인해, 사람들은 야고보가 명약관화해졌으며, 결론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주장이 아직 완전치 않다고 느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한 예증을 내보인다. 그것은 이 장 초반부의 이야기(2, 3절)와 정반대되는 친절에 대한 예증이다. 친절에 대한 이 두 가지 예증의 위치는 야고보서 2장 전체가 한 묶음으로 읽혀져야 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134.1)
 부조들로 그의 주장을 예증한 후에, 야고보는 그녀의 행한 바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김받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통적으로 창녀라고 여겨 온 이방 여인을 선택한다. 라합은 사회 계층 밑바닥으로부터의 본보기다. 비록 그녀의 최초의 직업은 존경받을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유대 민속 전설에서 영웅이 되었다. 라합, 사라, 아비가일, 에스더는 이스라엘의 주요한 네 명의 가인들이었다. 랍비 전승 이야기에서는 라합이 여호수아와 결혼했으며, 여덟 명의 선지자 겸 제사장의,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자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인, 조상이 되었다. 그녀 자신도 여선지자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흥미롭게도, 마태의 족보에서는 라합이 다른 세 여인(다말, 룻, 밧세바)과 함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발탁된다. 네 여인의 성적 결합이 모두다, 적어도 초기에는, 불법적이며 문제성이 있었으며, 이것은 마리아의 표상 역할을 한다(Laws, 137). 야고보가 그의 최후의 예증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유형의 사람이다. (134.2)
 라합은 그녀가 행한 것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거나 의로 여겨졌다. 여호수아 2:2-21에서 그녀의 행동은 정탐꾼들에게 밤에 잠잘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다음날 아침 그들을 산으로 보냄으로 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였다. 이 기사에 대한 야고보의 이야기에는 그녀가 그들에게 다른 길로 가게 했다고 첨가한다(2:25). 그러나 그의 강조점은, 여호수아의 강조처럼,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사실에 있다. 정확하게 이것이 행하는 믿음에 대해 야고보가 의미하는 바이다. 사회적 행동이 없는 믿음은 모순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134.3)
 믿음과 행함: 중심 문제
 너무나 자주, 이 구절(14-26절)에 대한 해석자들은 귀신, 아브라함, 라합(특히 아브라함)의 예증이나, 혹은 야고보나 바울이 신학적으로 옳은가에 대한 논쟁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초점들은 야고보의 중심 문제를 놓친다. 이 문제는 심지어 예증보다도 먼저, 첫 번째로 진술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 학도들에 의해 무시된다. 충실한 본문 해석자는 저자의 강조점에 귀를 기울이고, 구절에 자기 자신의 관심을 부과하여 그것들을 본문의 주요 의미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