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부 참 종교 (1:19-2:26) 5. 가난한 자들을 돌봄 (1:27-2:26)
 1. 당신이 야고보서를 주의 깊게 읽기 전에, 이 서신의 “행함”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그 이유는? (123.3)
 2. 로마서 4:1-24을 읽으라. 이 장은 야고보서 2:14-26과 상충되는가?(특별히 로마서 4:2, 3야고보서 2:21-23을 비교하고 대조하라. 또한 로마서 3:28야고보서 2:24도 그렇게 하라.) 당신의 대답을 설명하라. (123.4)
 3. 어떤 사람은 제각기 믿음과 행함을 칭의와 성화의 신학적 개념과 연관지어 해석한다. 당신도 동의하는가? 설명하라. 만일 동의하지 않는다면, 야고보서에서 문맥 안에서 이 용어의 사용이 의미하는 바를 제시하라. (123.5)
 ■ 말씀을 탐구함
 믿음과 행함: 논쟁
 야고보서의 관점에서 비롯된 믿음과 행함의 문제는 두 가지 수준, 즉 그가 쓴 편지를 받는 자들의 수준에서, 그 서신을 후대에 해석하는 수준에서 논쟁이 되어왔다. 논쟁에 참여한 다양한 목소리들을 듣는 일과 동시에 야고보가 그의 문맥 안에서 말하는 바를 편견 없이 듣지 않고 우리가 본문을 이해할 수는 없다. (123.6)
 야고보서 2:14-26의 논쟁적 성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들이 신약 신학에 있어서 사도들의 가장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해 왔다. 심지어 이 구절이 이 서한의 신학적 중심이라고 제안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단지 외부적인 추론일 뿐, 이 서신에 대한 주의 깊고 내부적 분석이 아니라고 나에게는 보여진다. 바꿔 말하면, 만일 이 구절을 믿음과 행함의 문제에 대해 우세한 바울의 글들에 대항하여 싸움을 붙인다면 그것은 이 구절의 생명을 초월한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이 인접한 문맥 속에서 읽혀질 때, 야고보서의 신학적 중심이라고 즉시 생각되기보다는 1:27부터 시작되어 야고보가 만들어 온 더 큰 요점에 대한 예증으로 보여진다. (123.7)
 우리가 2:14의 선행 구절들의 토론과 이후의 구절들의 토론을 명백하게 이분하는 것은 야고보의 주장에 대해 부당한 일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14절과 별개로 13절을 읽어서는 안 된다. 긍휼한 사람은 깨지지 않은 믿음과 행함의 영역으로부터 행동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긍휼을 행하는 사람이다. (123.8)
 13절14절의 연결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2, 3절15, 16절의 연결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3절에서 누추한 옷을 입은 사람과 15, 16절의 헐벗고 양식이 없는 자에 대한 대우는 같은 개념에 대한 반향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대우는 3절16절에서 명백하게 보여지는 것처럼 뚜렷한 병행을 이루고 있다. 1-13절14-26절의 시작에서 이 예증을 제시함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여기서의 야고보의 관심의 중심임을 지적한다. 실제적으로, 뒤따르는 예증들과 토론들은 1:27에서 제시한 중심 진술인, 참된 경건은 사회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주제의 연속이다. (125.1)
 야보고의 독자들이 죽은 믿음에 둘러싸이지 않은 실제적인 사회의 봉사 활동에 그 뿌리를 둔 경건을 연습하고 살아가도록 부추기고 환기시키기 위해서, 야고보는 상상의 적대자와 논쟁을 벌인다. 그가 사용하는 문학적 형태는 “통렬한 비난 연설”(“diatribe”)이라 불리는 헬라 수사학적 문장이다. 이런 문장의 사용으로 생동감 있는 토론을 진행하면서, 야고보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반대자를 그와 대조를 통하여 야고보의 지위를 더욱 드러나게 하는 도구로 삼는다. 이것이 2:18에서 명백하게 예증된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4절에서는 그가 두 개의 수사학적 질문으로 논지를 입증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두 질문 모두 헬라어 부정사 로 이루어졌는데, 이 부정사는 부정적인 대답이 필요한 것이다. 야고보는 이를 명백히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하지 못한다. (125.2)
 야고보서의 이런 신학적 관점은 해석가들로 하여금 마틴 루터가 야고보는 그 서신이 정확히 반대의 입장을 제시하기 때문에 바울과 충돌한다고 맹렬히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후퇴하게 했다. 그런 해석자들은, 예를 들어, 야고보서 2:14-26로마서 3:28-4:24를 비교하면서 단어의 선택, 단어와 구문의 배합, 심지어 선택된 구약 성경의 인용절(창 15:6)까지도 명백한 유사성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바울과 야고보의 이런 구절들 사이에 많은 유사점들이 있지만, 그같이 뚜렷한 반대 결론이 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야고보가 바울을 비평하기 위해 저술했다고 제안한다. 다른 이들은 (야고보서 이후에 저술한) 바울이 행함이 없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제시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125.3)
 바울과 야고보의 상충된 면은 각 저자에 대한 오해를 낳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속박되지 않는다. 그들은 논쟁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완전히 반대되는 문제들을 논쟁하고 있다. Joachim Jeremias는 “싸움터가 다르다”, 즉 각각의 저자가 점유하고 있는 “투쟁의 지역”은 별개의 것이라고 정확하게 기술한다(“Paul and James,” 370; Longenecker, 270). 각 저자는 동일한 단어와 구문과 인용구들을 “그들 자신의 관점과 그들 자신의 목적으로” 전개한다(Kistemaker, “The Theological Message,” 60). 그들은 서로에게 독립적으로 저술하며 주제도 다르게 접근한다. 서론에서 이미 주장한 것처럼, 한 사람은 그것을 신학적으로 다른 사람은 윤리적으로 접근한다. (126.1)
 Sophie Laws는 만일 야고보가 이 구절에서 정말 바울과 논쟁하였다면, 그는 창세기 15:6의 바울의 연계 구절인 18장의 아브라함의 할례에 대한 설명을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주장을 지지한다. 대신에, 야고보는 15장을 이삭의 제물 장인 22장과 연결시킨다. 한편, 바울이 야고보와 정말로 논쟁했다면, 그는 라합의 경우에 대한 야고보의 언급을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논증에서 라합의 언급을 발견할 수 없다(129). Leon Morris가 말한 것처럼, “단어에 의해 매혹되지 말고”(83) 각 저자가 그들 자신의 문맥에서 의미하는 바를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보자. (126.2)
 바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교리는 그의 초기의 봉사에서 특히 할례에 대해 강조하며 율법을 준수함으로 그들 자신을 구원하려 했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과의 논쟁에서 발전하였다. 이러므로 바울의 개념은 이들 율법주의적 그리스도인들과의 이런 논쟁의 배경에서만이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정서를 가지고, 바울이 율법주의의 문맥 속에서 행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율법의 행위”(이 구문은 로마서 3:28에서 헬라어로 그 자신이 사용했다), 즉 학자들이 “규범적 경건”이라 부르는 것, 혹은 율법을 준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그것이 도덕적이건 의식적인 율법이건 간에)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반면에, 야고보의 논쟁은 다르기 때문에, 그가 행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그의 마음속에는 긍휼과 동정의 행위를 담고 있다. (126.3)
 야고보와 바울의 대립에 대한 논쟁은 성서 해석자들이 바울의 렌즈를 통하여 야고보의 본문을 읽는 한 살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각 작품은 그들 자신의 안경을 통하여 읽혀져야 한다. “우리는 주해를 본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본문의 종으로 인식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들어보아야 한다”(231)라고 Thorwald Lorenzen은 말한다. (127.1)
 또 하나의 중요한 해석적 요점이 여기 있다. 야고보나 바울 둘 다 상아탑 연구를 통하여 그들의 신학적 소견을 제시하는 조직 신학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신학자들이 만개한 구원론 즉 구원에 대한 연구라 부르는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제한된 관심사들을 설교하는 목사요 지도자들이었다(비록 설교가 매우 격렬했지만). 그러므로 성경(혹은 야고보와 바울의 글들) 그 자체가 모순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는 각 저자가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다양하고 심지어는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으로 다른 문제와 다른 상황들을 말하고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이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우리는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진술들이 많은 경우 역사적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에 대해 곤혹스럽지 않을 것이다. 믿음과 행함에 대한 야고보와 바울의 토론도 이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127.2)
 논쟁 속에서 야고보는 그의 상상의 상대자를 가지고 있으며(2:14-26), 그는 행함이 부족한 믿음은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1:14). 이 부분에서 야기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야고보가 언급하는 이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야고보가 믿음을 규정짓지 않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 개념의 의미는 오직 문맥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추측되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야고보서에서 문맥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2:19은 예외인데, 이는 정통적으로 귀신들에 의한 지적인 동의로서의 믿음과 관련지어 이해되어 왔다). 이 편지에서 사실들이나 진리들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서의 믿음을 정의하는 것이 야고보서의 나머지 부분에도 영향을 미쳐서, 이 서신에서 믿음은 교리에 대한 고백이나 예수님을 구세주로서 인식적으로 용납하거나 올바른 신앙에 동의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정의가 심지어 19절에서조차도 옹색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을 훨씬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27.3)
 비록 우리의 저자가 그 용어를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가 “믿음”이라는 개념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믿는다. 야고보는 믿음을 명제적 용어가 아닌 관계적 용어로 이해한다. 그에게, 그것은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이다. 야고보는 이 실제적인 믿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개념을 말로 나타내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실제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실제적인 진정한 믿음은 외부적 표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행동이 부족한 즉 행함이 없는 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것으로 야고보는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을 대조하고 있다. (128.1)
 야고보가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을 대조하고 있는 것이 14절의 마지막 구절에서 증명되는데, 그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의 KJV 번역은 요점을 혼동케한다. 그곳에는“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야고보는 믿음이 구원하는지 아닌지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의 상대자가 단지 말로만 표현하는 믿음의 개념은 구원의 능력을 갖지 못함을 명백히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128.2)
 구원의 개념이 심판에 대하여 말한 13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은 흥미롭다. 구원과 심판이 병치함은 야고보가 하나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가 논증하는 바는 참된 믿음을 보이는 데 실패한 자들은 자비와 구원이 아니라 오직 저주와 심판만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요청은 참된 믿음의 실행,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에서 바울이 표현한 바를 사용하자면)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죽어있거나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이 아닌 구원에 이르는 바로 그 믿음이다. (1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