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부 참 종교 (1:19-2:26) 5. 가난한 자들을 돌봄 (1:27-2:26)
 5절의 요점은 가난한 자들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경제적 상황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현재의 고통 중에서라도 택함 받은 목적에 있다. 그들은 믿음의 영역에서 풍요로운 자로(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특별한 관계), 하나님의 약속하신 나라의 후사로 택함을 받았다. (118.1)
 이 구절, 특별히 2:5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심스러운 구절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경험이나 마지막 구원으로부터 부자들을 제외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야고보서를 주의 깊게 읽는다면, 우리는 그가 의미했던 바를 정확히 발견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부자는 믿음과 구원의 영역 밖에 있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는 가난한 자에게 축복하며 부자에게 저주하는 누가(누가복음 6:20, 24)와 유사성을 보여준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경건은 부자보다 가난한 자에게 더 많이 어울리지 않는다. 경건은 오직 가난한 자에게 속한 것이다. 부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며 가난한 자는 그들의 게으름으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는 사상은 예수님과 누가의 신학뿐만 아니라 이 서신의 신학과도 맞지 않는다. (118.2)
 그러나 야고보는 가난한 자가 택함 받고 부자는 거절당하며 그만큼만 해 둔 것으로 암시하는 포괄적인 진술을 하지는 않는다. 그는 즉시로 왜 부자가 믿음과 구원의 영역 밖에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2:6, 7에서 세 가지 이유가 주어진다. 부자는:

 (1) 압제한다.

 (2) 가난한 자를 법정으로 끌고간다. 그리고

 (3)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다. (118.3)
 본문에서 언급한 압제나 압박은 구약 시대에 고대 선지자들이 서슴없이 선포한 가난한 자, 낯선 자, 고아와 과부들에게 행했던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형식을 취한다(렘 7:6; 22:3; 겔 18:12; 암 4:1; 8:4; 말 3:5; 솔로몬의 지혜서 2:10과 비교하라). 2:6에서 압제라고 야고보가 사용한 용어는 지배를 강조함을 함축하는 폭력적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신약 성서에서 이 용어가 사용된 다른 한 곳은 압제자로서 사단을 묘사한 것이다(행 10:38)! (119.1)
 물리적인 압제는 가난한 자에 대하여 법적인 행위를 취하는 부자를 포함했다. 빚, 임대, 임금, 저당과 같은 문제와 관련된 법적인 행위가 여기서의 문제이며, 탄핵의 주제들은 거대한 자본가와 은행가들이다. 유대 교사나 지도자들이 안식년에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신 15:8)을 무효화시켰기 때문에 채무자를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강력해졌다. 이리하여 법정은 오늘날의 사법적이 제도와 같지 않은, 경제적 압제를 위한 심판대로 사용되었다. Simon Kistemaker는 오늘날에는 “소송을 청구하거나 탄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부자이다. 법정에서 기록을 조사하며 증거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가난한 자가 아닌 부자에게 보여질 것이라”(James, 79)고 주장한다. (119.2)
 부자들이 거절당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그들의 훼손 때문이다. 2:7에 언급된 그 “아름다운 이름”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이름인 여호와이다. 이 이름이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결코 그렇게 발음하지 않고, 그 단어가 쓰여질 때는 특별한 주의와 경외심을 가졌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나 지명은 그분의 특별하신 소유권이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에 의해 택함받은 가난한 자는 그분의 특별하신 소유라고 말하고 있다(5절). 그들을 압제하고 압박하는 것은 그들의 소유주를 멸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지혜자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잠 17:5)라는 말씀과 유사하다. 가난한 자를 압박하고 압제하며, 차별대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것을 훼방이요 신성모독이라고 부른다! (119.3)
 열한 번째 계명
 야고보서 2:8은 야고보가 책망하고 있는 그의 독자들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인용함으로 부자들에 대한 그들의 주목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제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앞 구절들로부터 그들은 정실주의를 보여주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고대의 계명을 부자들에 대해 그들이 보여주는 편파주의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며, 그들은 단지 친절하게 행하는 것이요, 그런 행함을 좋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야고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지만 편파주의를 보이는 것은 나쁘다고 말한다. (120.1)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18에서 인용되었는데, 바로 그 문맥은 가난한 자이건 부자이건 편파주의를 나타내는 것에 대한 문제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바로 세 절 앞선, 레위기 19:15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 레위기에 말씀하신 것을 따르면, 우리가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어느 한쪽을 다른 쪽보다 좋아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120.2)
 그 같은 차별대우에 대한 야고보의 반응은 그것이 작은 일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것은 단지 작은 품성의 약점, 즉 죄악 세상에서 우리들 모두가 가지는 자연스러운 경향정도가 아니다. 야고보서에서 부자에 대한 정실주의는 작은 결점 이상이요, 바로 죄이다.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강하게 권면한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2:9). (120.3)
 야고보가 가난한 자들을 희생시켜 부자들에게 편애함을 반대하는 그의 금지를 “열한 번째” 계명 정도로 만든 사실은 그가 정실주의를 나타내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심각히 생각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10절을 읽을 때(“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문맥적으로, 우리는 그가 여기서 언급한 “그 하나”란 정실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를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중심 구절로 사용하지만, 그것이 야고보의 요점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재림신자들이 넷째 계명을 수보하기 위해 보여주는 같은 열심을 가지고, 야고보도 그의 “열한 번째” 계명을 범하는 자들을 비난한다. (121.1)
 어떤 사람은 야고보가 정실주의를 반대하는 그 계명을 출애굽기 20장신명기 5장에 있는 십계명의 수준으로 승격시킬 의도는 아니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지도 모른다. 나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요, 2:11에서는 야고보도 동의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11절에서 그는 십계명 가운데 가장 가증한 두 가지 죄를 “정실주의”와 병행하는 위치에 두기 위해 선택한다. 그는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11절)고 기록한다. “율법을 범한 자”는 부자들에게 정실주의를 나타내는 사람과 관련하여 9절에서 그가 사용한 바로 그 단어이다! 야고보는 살인, 간음, 정실주의 이 모두를 같은 선상에 두고 있다! (121.2)
 비록 어떤 다른 신약 기자도 야고보가 정실주의에 대하여 비난한 것만큼 불쾌해 하지는 않지만, 모든 신약 기자들이 차별대우를 심각한 죄로 보는 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주장한다. 골로새서 3:11에서 그 기별은 더욱 분명해 지는데, 바울은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가진 장벽은 모두 깨어짐을 보여준다(엡 2:11-22을 비교하라). 국적, 인종, 윤리적 배경, 부류, 성, 종교 등에 관한 한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 (121.3)
 이 가르침은 야고보와 바울의 시대만큼 오늘날 우리에게도 관련이 있다. 미국에서 계속되는 인종간의 문제(흑인 대 백인 혹은 유대계 미국인, 히스패닉, 라틴계, 혹은 중국계 미국인 대 유럽 후예의 미국인), 미묘할 뿐 아니라 때로는 명백한 차별 대우(심지어 동질의 무리 안에서라도)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혐오스럽다. 밝은 색깔의 피부(“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어두운 색깔의 피부(“검은 피부”)의 사람보다 더 대우받는 자메이카와 같은 곳에서 발견되는 계급 차별주의처럼 혐오스러운 것이다. 야고보는 트리니다드의 니그로계와 인디안계와의 인종 갈등이나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 캐나다 쾌백의 불어권과 영어권 사람들간의 갈등만큼 어려운 문제에 도달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어떤 무리들에게 차별대우를 하는 것은 죄이며, 그런 행동을 하는 가해자는 범법자로서 율법에 의해 범죄자로 정해질 것이다!(2:9) (122.1)
 범법자의 운명은 명백하다—“긍휼 없는 심판”(13절). 야고보는 여기서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들에게 비난의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런 형세는 역전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5: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긍정적인 축복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반향이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가난한 자에게 긍휼의 돌봄을 보여주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자비와 동정을 기대할 수 없다. (122.2)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비를 원하고 요구하는 자들에게 값없이 자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의 특징을 강조했다. 다른 한편으로, 동료 인간에게 자비와 동정을 베풀지 못한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만을 기대할 수 있다. 이 요점은 왕께 사함 받은 빚진 신하가 빚을 갚기 힘들어진 동관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은 비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마 18:23-35). 예수께서는 비유를 이 말씀으로 끝맺으셨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 18:32-34). (122.3)
 같은 의미로,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부자들에게 차별대우해 준 무자비한 범법자들에게 심판이 할당하실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람은 “심판을 이기는 긍휼”(2:13)이다. 야고보서를 통한 하나님의 요청은 부자와 권세 있는 자들을 향한 정실주의를 대체하는 가난한 자(그리고 소외된 자)를 위한 긍휼과 정의이다. 미가처럼, 야고보는 말할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123.1)
 ■ 말씀에 들어감
 아래의 과제를 이행하기 전에, 야고보서 1:27-2:26을 다시 읽으라. 그때 2:14-26을 두세 번 주의 깊게 읽으라. (1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