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부 참 종교 (1:19-2:26) 5. 가난한 자들을 돌봄 (1:27-2:26)
 선지서만이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들을 위한 옹호자는 아니었다. 우리는 또한 시편 기자가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신 10:18 비교)고 선포하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야기에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메시야의 끊임없는 보호하심이 나타난다. 가장 힘있는 그분의 말씀 중 하나가 마가복음에서 발견되는데, 그곳에서 그분은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12:33)라고 말하는 율법사의 말에 동의하신다. 그리고 같은 장 후반부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그분의 강력한 비난 중 하나를 발견하는데, 그분은 과부로부터 착복하여 자신들을 부유케 하는 그들을 비난하셨다(40절). (111.2)
 선지자들, 시편 기자, 예수님과 같이 야고보도 가난한 과부와 고아에 대하여 민감하다. 아마도 야고보가 관심을 갖는 무리는 이런 가난한 자들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믿기는, 그들이 언급되고 중심적이 된 이유는, 그들이 착취당하고, 보호받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의 상징으로 고대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약탈하는 파렴치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제3세계에서, 도시 내부에서 궁핍함으로 고통받는 자들이요, 일할 데 없는 무일푼의 사람들이요, 정부나 법에 부적절하게 대표되는”(Moo, 86) 자들이었다. 그들의 고통을 돕는 것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에 대한 야고보의 정의이다. (111.3)
 1장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에 대한 더 깊은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 끝맺는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27절).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봉사함으로 야고보의 독자들이 개인적 거룩함에 힘쓰며(Tasker, 55), “세속”이나 사회에서 은둔하며 금욕주의적인 어떤 의미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야고보가 어떤 개인적인, 지나치게 사적인 경건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세속”은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사회가 아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세속”“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으로 인한 인류의 광범위한 기질과 힘”(119)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고 Bruce Johanson은 주석한다. 그때 세속이라는 용어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물건, 가치, 행동 등의 총체적인 것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불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사회적인 의미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비록 야고보는 마음속에 개인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문맥에서는 전반적인 의미로 더욱더 사회적인 것처럼 보인다. (112.1)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바램과 반대되는 압도적인 가치 체계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문맥에서, 그런 가치 체계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속된 표준에 의하면, 가난한 자에 대한 민감성은 우선 순위가 되지 못했다. 야고보의 공동체가 이런 가치 체계를 따른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연합하는 자기 자신들을 발견할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우리가 참된 경건에 대해 내적으로 비쳐지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국면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만 한다. 문제는 우리가 사회적이고 수평적인 경건을 희생시켜서 사적인 국면에 초점을 맞출 때 생긴다. 만일 우리가 경건한 삶에 대한 후자의 국면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경건은 거짓되고, 불순하며, 오염된 것이다. (112.2)
 거짓된 경건이 예증됨
 2장은 야고보가 순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각도로, 명백하게 예증한다. 여기서 그는 부유한 자들에 대한 그의 청중들의 편애를 기소하며, 그렇게 함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개혁운동을 계속한다. 앞서 우리가 주목한 것과 같이,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취급하는 정말 모든 구절들에 있어서, 야고보의 비난의 주제는 부자들에게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구제할 길 없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 관심이 부족한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 비난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부유한 자들에 대한 호의적인 편견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훨씬 더 강렬한 것이다. (113.1)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거는 것으로 구절을 시작한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아”(1절). 우리는 이 구절이 문자적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읽혀지지만, NIV의 “우리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는 번역을 주목해야만 한다. NIV는 헬라어 구문을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란 의미로 번역한다. 그러나 예수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자들과 관련하여 번역해야 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예수의 믿음은 그분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한 부분이었다. 신약에서는—바울 서신까지도(Maynard—Reid, Poverty and Wealth, 50, 51; 117, 118을 보라)—이 헬라어 구문이 의 믿음(faith of)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야고보서 본문에서도 이 번역이 선행 구절인 1:22-27과 병행해 볼 때, 더욱더 문맥적인 의미가 통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구절들에서, 요청은 행동하는 순종이다. 여기서 이 예증을 통해, 야고보는 만일 그의 청중들이 그 같은 믿음을 가졌다면, 그들은 편애를 멈추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13.2)
 야고보의 독자들은 편파적인 습성을 가졌다. 흥미롭게도, 부자들을 편애하는 것이 그들이 행하고 있는 유일한 편애의 유형은 아니었다. 사실 편애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복수형이다. 이것은 그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편파주의들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 같은 불공평함을 멈추도록 호소한다. 문자적으로, 그는 존재하고 있거나 진행 중에 있는 행동들이나 조건들이 존속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이런 부정적인 행동들을 멈추도록 간구한다. (114.1)
 참된 경건에 대한 이런 곡해는 차별대우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 개념과 동일화될 수 있다. 야고보 공동체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분의 삶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과 정반대로 나아가는 사회적 속물 근성(윗사람에게는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거만한 근성)대로 행하고 있었다. 이 예증을 통해, 야고보는 그나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런 성격에 대한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한 예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본문은 우리들이 오늘날의 속물근성과 차별대우를 어떻게 다룰 수 있으며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형을 제공한다(Smit, 66). (114.2)
 우리에게 주어진 예증은 “모임” 장소에 들어오는 두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르게 대우받는 광경이다(2:2-4). 우리가 이 이야기의 사회적 영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의 올바른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다. 문자적으로 “모임”(meeting)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회당”(synagogue)이다. 야고보가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일반적인 유대인에게보다는 한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특별히 저술하고 있다는 배경에 우리가 얽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기독교 모임에 대한 언급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다소간, 이 언급은 팔레스타인 기독교의 매우 초기 시절에 참가한 그리스도인이거나 비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의 회당 건물과 관련되어 있다. (114.3)
 만일 야고보가 실제적인 회당 모임 장소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음으로 그 모임의 목적을 규정해야만 한다. 회당들은 종교적인 의식들과 집회뿐만 아니라, 정치적 모임을 위한 사무 처리를 위해서도 사용되곤 했다. 또한 그들은 사법적인 행위를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누가복음 12:11에서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법적인 행위를 제시한다. (115.1)
 예수님의 진술과 다른 신약의 증거와는 별도로, 유대 문학에서도 회당이 법정으로 사용되었다는 많은 언급들이 있다. 이제 야고보의 예증이 명백히 법적인 배경이 있음을 알려주는 두 개의 랍비 문헌들을 조명해 보자. 첫 번째 것은 법정에 출두한 두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한 사람은 누더기 옷을 입었고, 다른 사람은 부유하게 차려입었다. 유대 문헌은 이렇게 진술한다: “두 사람이 법정에 들어오는데, 한 사람은 누더기로 걸쳤고, 다른 한 사람은 일백 므나(manehs)의 가치가 있는 훌륭한 옷을 입었다. 그들은(법정인) 그에게(잘 차려입은 사람) ‘의복이 그와 어울리는가, 아니면 그가 의복과 어울리는가?’라고 말할 것임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Maynard-Reid, “Poor and Rich,” 169). (115.2)
 두 번째 랍비 문헌은 법정에서 앉는 것과 서있는 것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유대법정에서는 재판관이 앉고, 소송 당사자는 서있는다. “랍비 후나의 아들인 라바가 말했다: 만일 랍비 학자와 무식한 사람이 서로간에 논쟁이 벌여져, 법정에 온다면, 우리는 랍비 학자에게 앉기를 권유하고, 무식한 사람에게는 우리는 ‘앉아’라고 말하지만, 만일 서 있는다면, 상관하지 않는다. 랍비 셰라바(Shrabya)의 아들 랍(Rab)은 랍비 파파 앞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다. 그는 그에게 앉으라고 말했으며, 그의 상대자에도 앉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법관이 와서 무식한 자를 쿡 찔러(문자적으로는 차서), 그를 일어나게 만들었다”(Maynard-Reid, “Poor and Rich,” 170). (115.3)
 이들 두 개의 랍비 문헌과 야고보서 2:2, 3과의 병행의 모습은 매우 현저하다. 2절의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은 랍비 문헌의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과 비슷하다. 그리고 2절의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훌륭한 의복을 입은 사람과 병행을 이룬다. 또한 두 번째 랍비 문헌의 경우에서도, “우월한 자”에게 자리를 제공하는 관습은 금지되었지만, 바로 그 같은 일이 법관에 의해 야고보의 공동체에서도 부유한 자들에게는 자리를 제공하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서도록 명령하는 일이 행해졌다. (116.1)
 우리가 야고보의 예증이 비종교적 배경에서 일어난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차별대우에 대한 문제를 보게 될 것이다. 예배 시에 앉아 있음으로 우리는 모두 동등하다—“십자가의 발치에서 우리는 동등한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교회 안에서는 정중하게 사람들을 대하지만, 교회 밖에서 매일의 삶에서 그들을 향하여 인종 차별적이며 계층 차별적인 태도를 취한다. 야고보의 입장은 정실주의, 편견, 편파주의, 차별대우 등이 교회 안에서나 사회에서, 종교적 배경에서나 사법 처리 중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16.2)
 야고보의 관심은 특별히 부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비록 부자부유한이란 단어가 이 구절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가 2, 3절에서 그런 사람들과 관련짓고 있음은 분명하다. 반지를 끼고 값비싼 옷을 입는 관습은 비유대계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도 일반적인 일이었다. 탕자의 비유에서(나는 “인내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누가복음 15:11-32), 방탕한 자, 돌아온 아들은 가장 좋은 옷과 반지를 받는다. 로마 제국시대를 통하여, 값비싼 보석들과 장신구들로 장식한 의복으로 방자하게 부를 표시하는 일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도 우리는 소외된 가난한 자들과 대조되는 부자들의 사치—그들의 집, 의복, 부유한 제물—를 발견한다. 이런 부유함은 정실로 속여 섞어 맞춘 카드들이었다. 그리고 야고보가 지적한 것처럼, 가난한 자는 공의를 구하려 법정에 왔었다. 그러나 정실주의와 차별대우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사실로 인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희미했다. (116.3)
 야고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관행인, 부유한 자, 잘 차려입은 자, 고위층 인사들에게 달리 대우하는 그 당시의 일반적이 관행에 대항했다. 가난한 자를 희생해서라도,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에게 특별한 배려를 함으로 고귀하게 평가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경향이다. Alex Moyter는 “부유한 자가 지역 교회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보장받기 위해 해마다 경비를 지불할 때, 재정적인 바람을 일으키지 못하는 자들은 멀리 가장자리에 떨어진 ‘무료’라는 라벨이 붙은 자리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90)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와 같은 노골적인 불평등이 과거의 일일지라도, 돈은 여전히 교회와 사회에서 큰소리로 말해지고 있다. 야고보는 그때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4)고 말했고, 그것은 지금 적용된다. (117.1)
 택함받은 가난한 자
 잘못된 경건에 대하여 예증하면서, 야고보는 이제 부자들에게 아첨하며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는 자인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4절)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과 그분의 평가 얼마나 다른지를 설명한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평가는 역전된다. 하나님의 가치 체계에서는, 구약과 신약에 증명된 것처럼, 가난한 자들이 그분의 택한 자들이요 천국의 후사들로 특별히 선택되어진다. 이것이 야고보의 첫 번째 주장이다(5절). 그는 즉시로 이 구절 다음에 부자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를 기록하여(6, 7절), 아무도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해 어떠한 질문이 없을 것이다. (117.2)
 야고보가 첫 번째 주장을 할 때, 그는 단순히 “세상에서 가난한 자”(5절)라고 말한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한다. NIV는 “...이 보는 바로는”이란 단어들이 첨가된다. 이 첨가는 본문을 영해하는 것이며 이 구절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효력을 상실케 한다. 야고보의 사상은 공간적인 것이다. 가난한 자는 가난함 속에 존재하고 있다. 야고보는 예수께서 누가복음 6:20에서 “가나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말하고 있다. 잠깐만! 누가는 마태복음 5:3에서와 같이 예수의 말씀에 “심령이”를 첨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든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일치한다고 주장해왔다. 마태복음에서 본문의 중심 의미는 공간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영적인 공동체, 즉 교회 안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이다. 이것은 제1세기 동안 존재한 공동체인 쿰란 공동체 문서(1948년 사해에서 발견된)에서 발견된 정확한 구절과 병행한다. 쿰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종교적 배경에서 공동적으로 살아가면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교인들이었다(Maynard-Reid, “Poor and Rich,” 179). 물론 야고보가 여기서 교회나 어떤 제한적인 공동체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더 일반적인 용어로 가난한 자에 대하여 말한다. (1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