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부 참 종교 (1:19-2:26) 5. 가난한 자들을 돌봄 (1:27-2:26)
 야고보서의 둘째 장은 유명, 무명한 문서에 기록된 중요한 논쟁들과 구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가 이 책의 가치와 신학을 경멸했던 원인도 이 장의 구절들이다. 루터나 수세기에 걸쳐 그를 추종해온 자들에게 2:14-26은 참된 복음의 자유—바울 서신에 명백히 설명된 자유, 일체의 행함이 포함되지 않은 믿음을 내포한 자유에 대한 장애물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사람은 믿음으로가 아닌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의 경계에 선, 의심받을 만한 신학이다. (107.1)
 믿음과 행함의 문제만이 이 장에서의 유일한 논쟁거리가 아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이 장의 첫 부분은 아마도 길고 긴 대립의 삶을 이어왔다. 미묘한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라도, 부자들을 향한 야고보의 공격과, 가난한 자에 대한 그의 명백하고 의심할 바 없는 지지는 그들 스스로 부한 자에 속해 있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의 서신을 인기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성경의 고등 비평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제외시키거나 성경의 뒤편으로 하락시키지 않고, 야고보의 견고한 가르침의 그 힘과 맛을 무시하거나 영적으로 해석된다. 비록 현대적 상식들의 반대가 있을 지라도, 우리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그 모든 의도대로 재정립해야한다. (107.2)
 우리는 또한 2장에서 야고보의 총체적인 논쟁을 들을 필요가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 장의 첫 절반 부분을 뒷부분과 분리해왔다. 우리는 그 둘을 마치 두 개의 독립적인 논쟁인 것처럼 읽고 해석한다. 하지만 야고보는 첫 부분에서 사회경제학적 논증을, 뒷부분에서는 사회․경제학적 관심이 결여된 신학적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의 전체적인 논증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그의 독자들의 관심과 돌봄에 초점을 둔 나눌 수 없는 하나이다. 실제로 이 논증은 2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1:27에 소개된다. 야고보의 견해는 참된 경건이란 믿음과 행함이 나란히 붙잡고 있는 것으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의 불행과 고통을 돌아보는 것이다. (107.3)
 ■ 말씀에 들어감
 1:27-2:26을 한 번 통독하고, 다음으로 1:27-2:13을 다시 읽으라. 이제 아래의 과제들을 완수하라. (108.1)
 1. 당신의 노트를 두 단락으로 나누라. 첫 번째 단락에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참된 경건이라 여겨지는 행동이나 모습들(야고보서 1:27에서 언급된 것들을 포함하여)의 목록을 작성하라. 두 번째 단락에는, 거짓 경건으로 여겨지는 것의 목록을 작성하라. (108.2)
 2. 많은 경건한 교파들은 교리적 진술의 일부분으로서 교회에 입교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27절) 헌신을 요구한다. 이 구절들을 읽은 다음, 교회가 곤경에 처한 이들의 사회의 필요를 돌봐야 하는 것이 기본 신조나 관습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가? 설명하라. (108.3)
 3. 이 구절들을 읽기 전에, 당신은 소외된 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당신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의 믿음의 중심이요 의무라고 생각하였는가? 혹은 그것을 부수적인 것이요 조건적인 것으로 이해했는가? 만일 당신의 마음의 바뀌었다면, 어느 정도로 변하였는가? (108.4)
 4. 2:2, 3과 보물과 의복에 대한 산상설교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마 6:19-34)과 비교하라. 야고보서와 마태복음의 본문들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가? (109.1)
 5. 2:5은 정말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에 대하여 우선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말하는가? 이 구절이 말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설명하라. (109.2)
 6. 야고보가 10절에서 누구든지 율법의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한 것과 관련하여 당신의 생각 속에 떠오르는 특별한 계명은 무엇인가? (109.3)
 7. 야고보가 그의 논증을 증명하기 위해 간음과 살인에 대한 계명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라(11절). (109.4)
 8. 야고보가 그의 독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희생시켜 부한 자들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어도 다섯 개의 명백하거나 암시적인 이유를 작성해 보라. (109.5)
 ■ 말씀을 탐구함
 참된 경건
 어떤 점에서는, 1장의 마지막 절이 뒤이을 구절뿐만 아니라 앞에 있던 구절들의 연합된 사상을 통괄하고 있다. 앞선 구절에서, 특히 1:22-25에서, 야고보의 초점은 행함이다. 바로 27절에서 야고보는 행동하는 실행자에 관해 진술한다. 이 진술은 2장의 전체 논증에 의해 증명된다. 이 모든 구절에서, 야고보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과 관련하여 진실로 경건한 사람의 성격에 관하여 관심을 가진다. (109.6)
 1:26에서 야고보는 우리가 참되고 순수한 경건에 대한 자유로운 정의라고 여길 수 있는 사실을 전한다. “경건”(thrēskeia)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예배”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이 두 단어를 생각할 때면, 우리의 생각들은 교회 배경 안에서 어떤 행동의 분야를 수행하는 어떤 규정화된 사람의 형상을 순식간에 떠올린다. 하지만 William Barclay는 진정한 예배에 대하여 저술하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한, “정교한 제의들이나 장엄한 음악, 혹은 주의 깊게 행하는 봉사에 있지 않고, 인류의 실천적인 봉사와 자신의 개인적 삶의 정결함 속에 있다. 교회가 그 건물의 아름다움과 예배 행사의 장엄함에 열중하기는 정말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천적인 그리스도인 봉사를 위한 시간과 재정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61)고 매우 적절하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같은 계획으로 봉헌된 특별한 장소에서 가장 숭고하고 웅장하게 예배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Barclay는 더 심도있게, “그런 모든 예배는 사람들이 그의 동료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보내지 않는다면 헛되고 무의미한 것”(62)이라고 말하였다. (110.1)
 외면상의 광신자들과 형식에 치우친 예배자들이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거나 관심을 갖는 일을 외면한다면 그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단지 예수님과 선지자들이 강조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미가, 아모스, 호세아,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들은 이 문제—특히 고아와 과부를 볼보는 것에 개방적이어야 한다—에 특별히 사로잡혀 있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소돔의 관원들”“고모라의 백성”(1:10)으로 언급하면서, 그들을 공격함으로 그의 책을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물과 번제(11, 12절), 그들의 특별한 성일들(13, 14절), 심지어는 그런 경우의 기도조차도(15절) 기뻐하지 않으심을 매우 분명히 한다. 대신에, 그는 그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6, 17절)고 탄원한다. 책 후반부에서, 그는 더 나아가 참된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에게 거할 곳을 제공하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라고 주장했다(58:6, 7). (110.2)
 이사야와 동시대인 8세기에 예루살렘에서는 똑같은 관심사가 메아리쳤다. 미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진정으로 번제와 의식적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주께서 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미 6:6-8). 아모스는 심지어 더 강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인용하면서,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암 5:21-24; 호 6:6). 바벨론 포로 후에도 우리는 같은 후렴구를 노래하는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를 발견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슥 7:9, 10). (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