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출애굽기 제 II 부 하나님께서 구원(救援)하심 (출애굽기 3-18장) 제 5장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하심 (출애굽기 12:1-13:16)
 누룩은 대부분의 경우 금지되었는데 발효하는 과정이 부패, 분해 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타락과 죄를 상징했다. 신약의 몇몇 성경절은 누룩의 부정적 의미를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으며(마 16:6, 11, 12), 고린도전서 5:6-9은 명절의 누룩 없는 떡을 죄 된 누룩에 반대되는 순전한 떡으로 해석하고 있다(막 8:15; 눅 12:1; 갈 5:9 참조).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이었다. 그것을 기념할 때는 악을 상징하는 어떤 것으로도 더럽히지 말아야 했다. 모든 가정마다 누룩을 제거하는 것은 그들의 생애에서 죄를 제거하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기억할 수 있었다. (127.6)
 쓴 나물 역시 상징적이었다. 쓴 나물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의 유일한 구절은 예레미야애가서 3:15이다. 이 성경절의 쓴 나물은 쓰디쓴 고통을 상징한다. 쓴 나물에 상징성이 부여되지 않았다면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쓴 나물은 애굽에서 당한 이스라엘의 쓰라린 고통을 의미했던 것 같다(Sarna, 91 참조). 출애굽기 1:14은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묘사하고 있는데 히브리 어원을 따지면 같은 뿌리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후에 나타난 유대인의 저서에도 같은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탈무드 이후에 가장 널리 쓰인 쓴 나물에 대한 단어는 양상치이다. (128.1)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진 상징은 양의 도살과 그 피라고 할 수 있다. 이 의식에 관한 최초의 기술은 예식에 관한 모든 것을 언급하고 있다(3-11절). 이어지는 유월절과 유월절이 지닌 의미에 관한 모든 기술은 양과 특별히 그 피를 극명하게 강조하고 있다(13, 21-23, 26, 27장 참조). 양의 도살과 특별히 그 피를 사용하는 것에 관한 구절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월절 절기의 중심이었다. 이는 또한 유월절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를 구원과 보호의 중심이 되었다. (128.2)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 이 되셨다. 그분만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어 우리를 보호하시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그분의 피 흘리심이 우리를 심판과 죄에서 안전케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그랬듯이 우리도 끊임없이 그분의 피 흘리심을 경험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128.3)
 어떤 이들은 상징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유월절의 피와 무교병을 예수님의 성만찬 때의 떡과 포도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연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무교병은 제물이 아니었다. 보다 가깝게 평행구조를 이룰 수 있는 것은 구운 양고기일 것이다. 유월절에 잡은 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은 먹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피 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레 17:10-12). 더욱 일반적인 관점에서 유월절 음식과 성만찬의 평행구조를 살펴야 할 것이다. (128.4)
 또 어떤 이들은 유월절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명확한 일치를 이루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가시관으로부터 흘리시는 피와 양손 그리고 발에서 흘리시는 피는 유월절의 피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피를 출입문(양손) 양쪽의 문설주(머리)와 문지방(양발)에 각각 발랐다는 것이다. 문제는 출애굽기 어디에도 문지방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대답은 양을 발 아래 놓고 도살했기 때문에 양의 피가 그곳에 분명히 남았을 것이라는 것이다(Durham, Exodus, 145). 필자의 사견으로는 유월절의 제물과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다는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이 우리를 실질적으로 구원하신다는 더욱 보편적인 견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29.1)
 제물과 피는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두드러진 일면이 있다. 제물과 피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의미를 어떤 특정한 것에 고정시키거나 또는 이들이 성취하는 방법을 명확히 규정하고자 할 때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129.2)
 제물의 피는 다른 많은 역할 가운데 안전과 보호와 정결 그리고 구제(救濟)의 역할을 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작용하는 가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그 역할을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치 않다. (이러한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본 장 끝의 “심층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 (129.3)
 필자는 성경 본 장을 연구하면서, 전체적 시간의 추이와 그 체계적 짜임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최초의 유월절은 출애굽 이후가 아니라 직전에 지켜졌다. 그러므로 최초의 유월절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은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에 놓여있는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다. 임박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신뢰하는 것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했다. 유월절에 참가한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임박했음을 우리는 믿었다”라고 증거한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는 의장(儀裝)을 갖추고 이제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간증과 매우 유사하다. 최초의 유월절에 동참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그 날 저녁 죽음을 의미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보호하여 장차 있을 미래의 일을 위해 안전케 하였다. (129.4)
 최초의 예수님의 성만찬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돌아가시지도 부활하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날 저녁 성만찬을 행하셨다. 현재와 미래가 강조된 예식이었다. 성만찬은 당시나 지금이나 현재와 미래의 구원에 대한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130.1)
 우리는 너무나 자주 출애굽과 갈보리의 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실지로는 과거의 기념물들이며 역사적인 사건들이지만, 최초의 유월절과 성만찬의 정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현재와 미래 중심적 사건들이다.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의 역사 가운데 그들이 맺은 출애굽의 해방에 대한 언약은 그것이 언제였든지 간에 바로 지금 자신들의 사건이었다(신 5:2, 3 참조). 과거에 역사 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각자의 구원의 경험은 하나의 새로운 출애굽인 것이다. (130.2)
 예수님의 성만찬 역시 동일하다.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 계셔 과거와 동일한 구원의 역사를 행하고 계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지금 모두 그 다락방에 있다. 비록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과거의 사건들이지만 진정한 의미에 있어 우리는 여전히 곧 벌어질 그 사건들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바로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들을 위해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지금 희망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그 분에게 순종함으로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 분의 계속적인 사역에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130.3)
 진정한 성서적 의식에는 바로 그런 의미들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이들 의식들이 단순히 과거를 돋보이게 한다거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 의미를 잠시 잠깐 생각하도록 한다기보다는 우리의 미래와 현재가 바로 지금 우리 앞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시간적 개념에서 보면 이러한 의식들은 처음의 사건들을 재 연출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신앙적 허구가 아니라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로, 항구적 공동체의 결속력이다.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이곳에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며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이 우리에게 또한 벌어지고 있다. (130.4)
 둘째로, 성경전체가 각 새대마다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재 하나님의 계속적인 구원의 역사가 미래에 마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과거는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오늘날도 강력하게 역사하시고 있음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강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131.1)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 생활과 특별히 침례식과 성만찬에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큰 변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성만찬 안식일은 더 이상 참석자가 가장 적은 예배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희로 하여금 이들 예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만약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신령하고 거룩한 종교의식들이 되겠는가! (131.2)
 ■ 말씀에 들어감
 출애굽기 12:31-13:16을 주의 깊게 두 번 정독하라. 읽으면서 다음의 질문들에 답하여 보라. (131.3)
 1. 이전 성경절들과는 대조적인 본문 31-36절의 바로와 애굽 백성들의 행동과 태도를 주목하라. 바로의 진술 가운데 이전의 진술이나 행동과는 상반되는 점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 애굽 백성들도 확인해 보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인들의 물품을 취한 것은 정당한 것인가(36절)? 왜 그런가? (132.1)
 2. 출애굽기 12:37은 애굽을 떠나온 백성의 수가 60만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숫자를 민수기 1:46, 47; 2:32; 11:21; 26:51; 출애굽기 30:12-16; 38:25, 26와 비교해 보라. 유사점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장정들만의 숫자라면 어린이와 여자들의 수도 계산한다면 백성들의 전체적 숫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이러한 대규모의 군중을 이동시킬 수 있는 전략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이 숫자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믿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