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길 제 3 편 뜰 제11장 놋 번제단
 화목
 정문(正門)으로 들어선 후의 번제단의 경험은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길로, 또 하나의 중요한 계단이다. 이러한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영혼을 대적해 싸우는, 육체의 정욕”(벧전 2:11, 새번역)을 따르기를 계속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들”“세상을 사랑”하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그분의 율법은 속박의 멍에가 된다(요일 2:15, 16). (83.1)
 그러나 우리가 번제단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릴 때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적의를 품지 않을 것이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힘을 굴복시킬 때에,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위하여 일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고후 5:18, 신킹제임스역)셨다.3)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롬 5:10, 11) 하셨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골 1:21, 22)셨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분의 적이 아니요 그분의 친구이다. 화목은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요구와 조화를 가져온다. 실제로 우리가 전에 사랑했던 어리석은 행동들을, 이제는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83.2)
 번제단과 기구들(출 27:1~8; 38:1~7)
 이제 번제단 자체를 살펴보자. “장(長)이 오 규빗(2.3 미터)이요, 광(廣)이 오 규빗이라. 네모 반듯하고, 고(高)는 삼 규빗(1.4미터)”(출 38:1)이었다. 그것은 놋으로 싸여졌으며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어 졌다. 게다가 네 모서리에 똑같은 네 개의 뿔이 있었다. (83.3)
 “단 절반에”, 꼭대기와 밑바닥 사이의 반쯤 되는 곳에, “놋 그물”이 있었다. 놋 그물의 네 모서리에 채(막대기; the stave)를 꿸 수 있도록 부어 만든 네 개의 놋 고리(ring)가 있었다. 이 채는 역시 놋으로 입힌 나무로 만들어졌다. 이 놋 그물 바로 위에 번제단의 둘레길이 있었다(출 27:5; 38:4). 성경에서 이 둘레길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뢰할 만한 정보에 의하면, 이것은 제사장이 화목(火木)을 놓거나 희생제물의 일부를 정돈 할 때, 그 위를 걸어 다니는 번제단을 둘러에워싼 좁은 대(臺)인 것 같다.4) (83.4)
 그리스도의 발이 “빛나는 놋 같”(빛난 주석, 개역판; 계 1:15, 킹제임스역)은 그리스도의 발이 걸으셨듯이, 지상 제사장의 발은 놋의 대를 걸었다. 이 둘레길로 접근하는 길은 계단이 아니라(출 20:26), 번제단의 남쪽에 있는 경사면이었다. 아론이 제사를 필하고 “내려”(레 9:22)왔다. 번제단의 제작에서 그것의 모든 상세한 것들은 “산에서” 모세에게 “보인 대로”(출 27:2, 6~8)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84.1)
 모든 기구는 놋으로 되어 있는데, 즉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이 그러하였다(출 27:3). 대야의 일부는 의심할 것도 없이 희생제물을 씻는 데 사용되었으며, 다른 대야는 성소에 드려질 피를 받는 데 사용 되었다. 부삽은 번제단과 그물(the grate)에서 재를 제거하는 데 사용하였다. 고기 갈고리는 희생제물을 정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불 옮기는 그릇인 놋 향로는 광야의 방랑 시절, 번제단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질 때, 거룩한 불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J. F. B Com. 출 27:3). 놋은 고난을 나타내듯이, 전체로써의 번제단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상징하고 있다. 번제단의 일부인 몇 가지 상징물로 널판, 그물의 높이, 네 개의 뿔과 놋 등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84.2)
 번제단의 널판
 번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었다. 채와 뿔도 똑같이 만들었다. 성소의 나무는 인성(人性)을—우리의 인성이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양쪽 모두를—나타낸다.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인성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불린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고전 3:12, 13)이다. 번제단의 나무가 완전히 놋으로 덮여져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인가! 이는 그리스도뿐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승리에 이르는 길은 고난을 통해서임을 나타낸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놋이 널판을 보호하여 불에 타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에 이르는 모든 길에서 우리의 동료와 보호자가 되신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신다. (84.3)
 그물의 높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세우신 구속 사업에서 또 다른 흥미 있는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속죄 제물이 놓여 태워지는 이 놋 그물의 높이는 속죄소 높이와 똑같이 일 규빗 반(68센티미터)이다. (84.4)
 하나님의 자비는 그분의 공의만큼이나 위대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시 85:10)다. (85.1)
 번제단의 네 뿔
 뿔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의 장신구이며 중요한 싸움 도구이다. 그러므로 이라는 낱말은 종종 힘, 명예, 승리를 의미하는 데 사용된다(S. B. Dict). 요셉에 대한 모세의 예언에서,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끝까지 이르리니”(신 33:17)라고 하여, 뿔을 힘으로 말하였다. 욥은 “내가 굵은 베를 꿰어 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욥 16:15)라며, 뿔을 명예로 말하였다. (85.2)
 능력승리의 의미로서, 다니엘은 우리에게 양과 염소의 예를 들고 있다. 두 뿔을 가진 양이 “임의로 행하고 스스로 강대하”고, “두 눈 사이에 현저한 뿔”을 가진 염소는 “그 숫양을 쳐서, 그 두 뿔을 꺾”는다! 그런데 “숫양에게는 그것을 대적할 힘이 없”(단 8:4~7)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을 때에 예레미야는,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애 2:3)다고 말했다. 요압이 곤경 중에 있었을 때, 그는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뿔을 잡”(왕상 2:28)았다. 이것은 보호를 위하여 여호와의 능력을 잡은 것과 같았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는 그의 손에서 나오는 뿔들을 가졌는데, 거기에 그의 권능이 감추어져 있”(합 3:4, 킹제임스역)다고 기록하고 있다. (85.3)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희생제물이 뜰 안으로 이끌려 왔을 때, 그것은 “줄로 ∙∙∙ 제단뿔에”(시 118:27) 묶여졌다. 그와 같이 우리의 희생제물이 번제단의 뿔에 묶여진다면, 그리스도의 능력은 그것을 가납하시고 유효하게 만드실 것이다. “네” 개의 기둥을 가진 정문(正門)이 “내게로 오라”는 자비로운 초청을 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듯이, 네 방향으로 뻗어 있는 번제단의 네 개의 뿔은, 세상의 네 구석에까지 구원을 전하기 위한 그분의 희생의 능력과 세계적인 초청을 나타낸다. (85.4)
 번제단의 놋
 이미 우리가 다 알다시피, 놋은 힘과 인내를 상징하는 동시에 또한 선고나 심판을 의미한다. 불순종에 대한 저주와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 ∙∙∙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레 26:18~20)겠고,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신 28:23)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신령한 동기가 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도 불구하고 보람이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고전 13:1)가 된다. (85.5)
 놋은 또한 고난과 희생을 통한 승리를 나타낸다. 번제단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희생을 통하여 승리를 얻으셨다. 그분께서는 “고난들을 통하여 완전하게”(히 2:10, 신킹제임스역) 되셨다. 그분의 품성이 완전하게 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항상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완전이란 그분이 우리의 구주로서 완전하게 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분만이 시험에 빠진 자들을 동정하실 수가 있으시며,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의 대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히 2:17, 18)실 수 있으시다. (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