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앞에 당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고 싶어 하신다. 그분은 그 기록들을 가져다가 구속 받은 자들 앞에 펼쳐 보이고(계 20:12), 그들에게도 마치 그분과 함께 통치하는 것과 동등한 심판할 권세를 주신다(4, 6절). 주님은 왜 그분이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 사람들이 알고 이해하기를 원하신다. (247.3)
 그분의 백성은 그분의 왕권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함에도 동참한다. 성경은 그들의 신원이 제사장,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6절)이라고 밝힌다. 레위기는 때때로 제사장들의 기능을 코데쉬(거룩함)라는 단어와 연관시킨다.16 또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중요 어구(語句) 그리고 그것을 변형시킨 말들이 반복되는 주제를 표현한다.17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소개하는 계시록의 지복 선언에는 “복되다”라는 형용사가 “거룩하다”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6절). 부활한 사람들에게 “제사장”이라는 신분을 부여함으로써 계시록은 그들을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거룩함(코데쉬)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다.18 하나님은 그것을 부활한 사람들에게 주셔서 그들도 그분처럼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하신다. (247.4)
 그러나 주님이 단순히 그들에게 심판할 방법만 주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그렇게 할 시간도 주신다. 천년이다. 같은 동류 인간들로 하여금 악인들을 심판하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분 자신도 그들의 심판에 맡긴다. (248.1)
 곡과 마곡
 주님은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서 1,000년을 기다린 다음에야 그 선고를 집행한다. 그 최후의 멸망은 파루시아의 때에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때에도 하나님에게는 모든 필요한 자료가 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에게는 인간이 최종적인 찬성의 인(印)을 치고 그분의 판결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의심이 일소된 후에야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1,000년 동안 기다린다. 그리고 심지어 그때가 되어서도 최후의 멸망은 악인들의 선제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이루어진다. 천년이 지난 후 남아 있던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 그들은 “그 수가 바다 모래같”이 많은 무리이다(계 20:8). (248.2)
 사탄은 이 세계적인 무대에 대(大) 미혹자로서 화려하게 입장한다(7절). 그의 의도는 명백하다. 전쟁을 위하여 열방을 모으는 것이다(8절). 그 시나리오는 아마겟돈 전쟁 때와 비슷하다. 양쪽 모두 열방이 전투를 위하여 모이고 그들이 불못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계 20:10, 13, 14; 참조 19:20). 그리고 두 전쟁에 다 히브리어로 된 이름이 있다. 그 새로운 전쟁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래된 “곡과 마곡”이다(겔 38:2). (248.3)
 하지만 두 전쟁 사이에는 다소간 차이점도 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는 이스라엘과 싸우는 적군이 그 정체가 분명한 바벨론이었지만, 곡과 마곡의 전쟁은 에스겔이 묘사한 바와 같이 신원이 불명확하고, 그들의 목적은 오직 평화의 나라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 날에 네 마음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악한 꾀를 내어 말하기를 내가 평원의 고을들로 올라가리라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하는 백성에게 나아가[리라]”(겔 38:10, 11). 아마겟돈 전쟁에서는 바벨의 군대가 동방에서 오는 구원자와 맞서 싸웠고(계 16:14, 16), 그 침략군은 바벨론 성벽을 침투하기 위한 전략을 사용해야 하였다.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는 용의 군대가 이미 “성도들의 진”(계 20:9) 성벽 안에 들어와 있다. 곡과 마곡의 전쟁에는 그들의 수가 “바다 모래” 같이 많은 “땅의 사방 백성”이 연루되어 있다(8절). 큰 무리를 이루는 열방의 “백성”은 곡과 마곡에 대한 에스겔의 이상에서 지배적인 주제이다. “그날에 내가 곡을 위하여 이스라엘 땅 곧 바다 동편 사람의 통행하는 골짜기를 매장지로 주리니 ∙∙∙ 사람이 거기서 곡과 그 모든 무리를 장사하고, 그 이름을 하몬 곡의 골짜기라 일컬으리라”(겔 39:11; “하몬 곡”“곡의 큰 무리”를 뜻한다).19 (248.4)
 아마겟돈으로부터 곡으로 넘어가는 전환에도 아이러니가 빠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산(하르)을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곡의 전투 그 자체 안에도 아이러니가 있다. 큰 무리는 시작할 때는 세력의 상징이었으나 죽음의 지형(地)에서는 오히려 공포의 상징이 된다. 곡의 강력한 군대가 시체더미로 바뀌는 것이다(겔 39:11, 13, 15). “하몬 곡의 골짜기”(게이 하몬 곡[Gey Hamon Gog])는 게이 힌놈(Gey Hinnom, 힌놈의 골짜기)을 반향한다. 거기서 유다는 몰록에게 어린아이들을 희생으로 바쳤었다(대하 33:6).20 후자(後者)의 골짜기는 결국 “게헨나” 또는 “지옥”이라는 개념을 낳게 하였다(예컨대, 마 5:22을 보라). (249.1)
 “곡과 마곡”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서 큰 무리를 연상케 한다. 그 글자들을 수로 따지면 70인데, 유대 전승에서 그 숫자는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수를 나타낸다.21 이러한 사실은 본 구절에서 두 이름이 왜 그렇게 특별하게 결합되어 있는지 그 이유를 보여 준다. 그것은 숫자들이 자주 상징적인 가치를 가지는(예컨대, 계 13:18의 666) 계시 문학의 특징과도 잘 조화되는 해석이다.22 그러므로 계시 문학의 상징으로 볼 때, “곡과 마곡”은 열방의 무리, 즉 고임(goyim)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용어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外人)인 자들이다. (249.2)
 죽음의 죽음
 이 주기를 마무리하는 “크고 흰 보좌”(계 20:11)의 이상은 도입부의 “백마”를 반향한다. 그 승리한 전사는 보좌로 나아간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고, 우리는 다시 일곱째 인의 침묵(계 8:1) 속에 빠진다. 창조 이야기에 나왔던 “하늘과 땅”이라는 전통적인 표현은 계시록에서 앞뒤가 바뀌어 땅과 하늘로 나온다. 우리의 우주, 우리의 환경, 우리의 영역은 모두 사라진다.

  (250.1)
 아마겟돈 전쟁의 생존자들은 천년 동안 책들을 자세히 살펴 본 후에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다는 단순한 결론에 이른다(계 20:13). 이제 하나님의 원수들을 멸망시키는 것은 최후의 죽음이다. 이 마지막 죽음, 즉 “둘째 사망”(14절) 이후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다. 마지막 사망에는 사망 자체의 사망이 들어 있다. 선지자는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그 사건을 묘사한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계 20:14), 우리는 사도 바울도 나중에 되 풀이했던 선지자 호세아의 외침을 기억한다.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호 13:14: 참조 고전 15:55). (250.2)
 에스겔서에 있는 곡과 마곡의 이상은 이미 악한 자들의 멸망을 암시하였다. 그 이상에 의하면, 아마겟돈 전쟁과는 달리 곡과 마곡의 군대에는 그들의 진영에서 피해자들을 위하여 울어 줄 생존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이스라엘 족속이 ∙∙∙ 그들을 장사”할 것이다(겔 39:12). (250.3)
 마지막에는 오직 이스라엘만 살아 남는다. 유대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하나님에게 신실하게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 계시록의 문맥에서 이스라엘은 특정 민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국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 장의 서두에서 말한 정의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계 20:4)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계 7:2, 3),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 십 사만 사천”(4절)이라고 천사는 이미 그들을 묘사하였다. (251.1)
 계시록은 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서 인간 역사의 생존자들을 이스라엘이라고 이해한다. 이제 선지자는 그의 모든 관심의 초점을 그들에게 맞춘다. 에스겔의 이상에서처럼 곡과 마곡의 비극적인 장면은 그 모든 광채와 아름다움으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게 길을 열어 준다. (계 21:1~22:5: 참조 겔 40~48). (251.2)
 주(註)
 1) “하나님께 찬송하라”(계 19:5)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표현은 본질적으로 할렐루야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바벨론 탈무드는 이 전승이 모세 때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Pesahim 1l7a); 또한 마 26:30을 보라.

 3) 시 135:19~21을 보라, 참조 대상 16:25, 36.

 4) 나중에 교회가 가르쳤고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가 상상했던 영원한 지옥의 존재를 이 표현으로부터 연역(演)해 내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전적인 멸절(滅絶)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표현을 사용한다. 성경에서는 바벨론의 멸망(계 14:11)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유 1:7; 참조 벧후 2:6)을 묘사할때 그 표현을 사용하였다.

 5) 사 61:10.

 6) 창 24:5; 아 4:1, 3; 6:7.

 7) 렘 2:32.

 8) “대언의 영”에 대한 이러한 정의가 아람어 타르굼에 의해서도 입증된 것을 볼 수 있다. Strack and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vol. 2, pp. 128, 129을 보라, 참조 J. W. Etheridge, The Targums of Onkelos and Jonathan Ben Uzziel on the Pentateuch(London: 1862), vol. 1, pp. 131, 556, vol. 2, p. 442.

 9) 예컨대 고전 1:6을 보라; 참조 W. de Boor, Der erste Brief des Paulus an die Korinther, Wuppertaler Studienbibel(Wuppertal: 1968), p. 28; 참조 Gerhard Pfandl, “The Remnant Church and the Spirit of Prophecy,” in Symposium on Revelation-Book 2, ed. Frank B. Holbrook,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1992), vol. 7, pp. 310, 316.

 10) 뒤에 가서 그 두 형용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새 예루살렘의 진정성을 표현하기 위하여(계 22:1~5) “말씀”을 수식한다(6절).

 11) Doukhan, Secrets of Daniel, p. 155을 보라.

 12) 1 Enoch 10:4, 5; 참조 88:1.

 13) Doukhan, Secrets of Daniel, pp. 125~133.

 14) 시 91: 7, 119:72; 대상 16:15; 전 7:28.

 15) Doukhan, Secrets of Daniel, pp. 183을 보라.

 16) 레 8:10, 12, 30; 21:6, 7.

 17) 레 11:44, 45; 19:2; 20:7, 26.

 18) 사 6:3; 57:15; 시 99:5.

 19) 참조 겔 38:4~9, 13, 15, 16, 22, 23; 39:2, 11, 12, 15, 16.

 20) 예루살렘 남쪽 힌놈의 골짜기는 베냐민과 유다 지파 사이에 경계의 역할을 하였다.(렘 15:7, 18:15, 16을 보라). 그곳은 너무 악명이 높아서 예 레미야가 “골짜기”(렘 2:23)에서 행해지는 제사를 비난할 때 그 이름을 직접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21) 그 개념은 창세기 10장에서 70 족속을 언급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 수는 또한 야곱의 식구 수 와도 일치된다(창 46:27; 출 1:5; 신 10:22) . 유대의 전통은 이러한 일치를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 대로”(신 32:8) 민족들의 수가 결정된다는 신명기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칠십 민족”이라는 모티프는 랍비들의 문헌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 70 민족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십계명을 70개 언어 로 기록하였다(Mishnah Sotah 7:5). 비슷한 이유로, 사람들은 시내산에서 70개 언어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Babylonian Talmud, Shabbath 88b). 성소에서 드린 70마리의 희생은 70 민족을 속죄하기 위한 것이다(Babylonian Talmud, Sukkah 55b).

 22) 아주 옛날부터 히브리 글자들에는 수(數) 값이 있었다(알레프는 1, 베이트는 2 등). 랍비들은 종종 어떤 단어를 수로 계산했을 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해석 체계를 게마트리아(아마도 영어의 ‘geometry’라는 말이 파생된 그리스어로부터 와전(祝傳)된 히브리말인 것 같다)라고 한다. 게마트리아의 고전적인 예는 창세기 14장 14절에 나오는 318명의 부하들에 대한 것이다. 해석자들은 그들과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이름의 값은 318이다(see Babylonian Talmud, Nedarim 32a; Midrash Rabbah, Genesis 4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