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킵푸르의 의례 속에 이미 암시되어 있었던 희망의 교훈이다. 그것은 또한 사탄을 상징하는 아사셀의 염소를 구원 의례의 일부로서 광야로 내쫓았다(레 16:20~22). 아사셀 의식을 통하여 보여 주는 악의 추방으로써 백성의 죄에 대한 속죄와 성소의 정결은 마무리되었다. (242.4)
 요한복음도 동일한 예언을 선포한다. “이 세상의 심판이” 실행될 때 사탄, 곧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날 것이다(요 12:31: 참조 16:11). 유대 전승 또한 에녹서에서 그러한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라파엘에게 아사셀을 결박하여 광야로 내쫓으라고 명령한다.12 다니엘도 그의 “마지막 때”를 위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상에서 심판과 킵푸르의 의식을 연관시킬 때(단 8장),13 구원의 다른 측면, 다시 말해서 아사셀, 즉 마귀를 광야의 트홈으로 추방하는 것을 암시하였음이 분명하다. (242.5)
 계시록은 이러한 추방을 시간 속에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에서 이런 어림수는 상징적으로 쓰인다. 144,000에 들어 있는 “천”(千)은 군중을 의미한다. 히브리 전통에서 숫자 1,000은 종종 무리라는 개념을 상징한다.14 시간에 관련해서도 그렇게 상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시 84:10), 또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시 90:4)라는 언급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전도서에서도,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전 6:6)이라는 말은 “사람이 비록 ∙∙∙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 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면]∙∙∙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전 6:3)라는 구절과 마주 울린다. (242.6)
 그러한 구절들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일천”이라는 수를 “여러 해”라는 의미로 이해 할 만한 강력한 이유를 가지게 된다. 그 절 끝에 나오는 “잠깐”(계 20:3)이라는 말이 “일천년”과 대조되는 것도 “일천”“많다”는 뜻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242.7)
 이사야 선지자도 비슷한 이상을 받았다. 주석가들이 “소(小) 계시록”이라고 부르는 단원(사 24, 25장)에서 그 선지자는 그 단원의 핵심어인 “땅”(17회 나옴)이 황무하게 되는 것을 창조 이 전 땅의 상태를 가리키는 토후(tohu, 혼돈)24)와 동일시한다(사 24:1, 10; 참조 창 1:2). 또 선지자는 사탄과 그의 부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사 24:21). 계시록에서처럼 오랜 기간, 즉 “여러 날”(22절) 동안 갇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며, 그것은 계시록 20장 3절을 긴 기간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이해를 확증해 준다.

24) 개역한글판에서는 “약탈을 당한”이라고 의역(意譯)함(역자 주).
(242.8)
 천년 동안에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계시록이 명확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계시록에서 상징적으로 아주 오랫동안이라고 규정한 기간에 악이 인간에게 아무 힘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1,000년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문자적으로 1,000년이 될 가능성을 아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역사의 단계에 오면 시간의 개념은 달라진다. (244.1)
 그렇지만, “천년”은 또한 홍수 전 첫 세대가 누렸던 수명과 대략 비슷하다(아담, 930세: 야렛, 962세: 므두셀라, 969세: 노아 950세 등). 그러면 “천년”을 언급하는 것은 홍수 전 시대, 에덴동산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제시하면서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다(사 65:17). 그 책은 홍수 전 황금시대에 대한 표현을 빌려서 새 세상을 묘사한다. 그때에는 100세에 죽는 것이 어려서 죽는 것이고(20절), 사람이 나무처럼 오래 살 것이라고 하였다(22절). (244.2)
 본 구절은 그러므로 삶이 행복하고 오래 사는 황금시대로 돌아감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천년기는 인간이 영원 속으로 내딛는 첫 발걸음을 나타낸다. (244.3)
 살아 있는 죽은 자들
 이상은 우리를 황폐하게 된 무저갱으로부터 생명이 터져나오는 하늘로 데려간다. 우리는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만난다. 압제 당한 사람들, 굴욕을 당한 사람들,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계 20:4) 사람들 그리고 다섯째 인의 장면에서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순교자들과 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는 단순하고 비천하지만 진실하게 남아 있던 사람들을 발견한다(4절).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각양각색의 의인 들을 만난다. (244.4)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천사는 선포한다(6절). 이것은 계시록에 나오는 칠복(七福) 중에 다섯 번째 지복(至福)이며,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책은 그 복을 그리스도의 재강림과 연관시킨다. 부활과 구주의 강림을 연결시킨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니엘는 이미 그런 사상을 확인하 였다. 그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단 12:2)나는 놀라운 사건이 미가엘이 올 때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다니엘의 마지막 장이 이렇게 특정한 주제로 시작하고 끝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245.1)
 다니엘 12장은 전사(戰士) 천사 미가엘이(1절)15 일어나는(히브리어로 아마드[amad]) 장면으로 시작하고, 다니엘 자신이 “끝 날에” 일어나는 것(아마드)25)으로 마무리된다. 마찬가지로 계시록도 의인들의 부활을 백마의 전사가 거두는 승리와 연관시킨다.

25) 개역한글판에서는 “누릴 것임이니라”로 번역함(역자 주).
(245.2)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한 확신을 나타낸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5~17). (245.3)
 부활이야말로 이 살아 있는 죽은 자들이 하늘에 있을 것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다. 그들은 육체와 영혼으로 일어난다. 불멸하는 영혼을 믿는 사람들이 추론하는 것처럼 그들의 영혼은 죽은 몸으로부터 살아 남아 있지 않다. 그 대신에 그들은 전인(全人)으로서 완전하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타난다. (245.4)
 여기서 우리는 “영혼들”(계 20:4)이라는 낱말을 히브리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 사람의 생각에 영혼은 사람 전체를 가리킨다. 70인역에서 그리스어 프쉬케(psuche)로 주로 번역하며, 영어 성경에서는 소울(soul)이라고 번역하는 네페쉬(rephesh)라는 히브리말에는 하나의 전인으로서 인간을 가리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靈的)인 요소들이 모두 들어 있다. 그 네페쉬(영혼)는 굶주리거나(시 107:9; 신 12:20) 목마르기도 하고(시 143:6), 만족하고(렘 31:14), 배부르기도 한다(사 55:2). 네페쉬는 또한 사랑하기도 하고(창 34:3; 아 1:7), 정서적으로 움직이기도 하며(시 31:10), 부르짖고(시 119:10), 알고(시 139:14),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기도 한다(시 103:1; 146:1). 성경은 인간이 완전체(完全體)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육체가 죽으면 정신적인 기능도 함께 죽는다(전 9:5). 사는 것도 전인으로 살듯이 죽는 것도 전인이 죽는다. (246.1)
 히브리 성경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계시록은 육체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 육체와 인간의 의식 모두로 구성되어 있는 부활을 말한다. 성경에서 육체는 영혼과 구별되지 않는다. 육체가 곧 영혼이고, 영혼이 육체이다. (246.2)
 우리는 이제 본 구절에 나타난 부활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생명은 감각 기관을 가진 육체와 아울러 정서와 사고(思考)를 모두 의미한다. 천사는 부활의 정확한 특성과 과정에 대하여 암시해 주지는 않는다. 늘 그렇듯이 그 초점은 과정보다는 결과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이 창조든, 홍해를 가른 사건이든, 예수님의 부활이든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에 관련된 사실이다. 영감을 받은 저자는 과학적인 설명에 의존함이 없이 그저 그 사건을 증언한다. (246.3)
 중요한 것은 부활한 사람들이 육체로 나타나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을 다 증명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땅과 인간의 창조를 논쟁의 여지가 없는 실제로서 단정한다. 인간과 역사적 사건은 외적인 증거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246.4)
 그러므로 예언적 이상은 부활한 인류로 옮겨간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계 20:4). 피해자들이 이제는 심판관이 되었다. 역할이 역전되고 정의는 실현되었다.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판결을 선고하는 책무를 공유하기 위하여 그 들을 초청한다. 그렇지만 주님이 이미 그 판결을 정해 놓기는 하였다. 첫째 부활은 심판이 실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강림 자체가 의인들을 악인들로부터 분리하였다. 다니엘 선지자는 인자가 오기 전에 하나님이 심판하는 사건을 먼저 배치함으로써(단 7) 이러한 사실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아마겟돈의 기사에서도 의인들의 반대편에 악인들을 무리지어 놓음으로써 두 진영이 이미 확정되었음을 암시한다. (247.1)
 어떤 경우이든 심판은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다. 그분만 홀로 뜻과 마음(계 2:23)을 살필 수 있다. 주님만이 은혜와 공의를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그분의 결백함만이 선과 악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보증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심판할 권세를 가진 유일한 분이다(요 8:7). (2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