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와 안식일 제 12 장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3)
 안식일: 분노한 용이 그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시간
 안식일을 지키는 아들의 마음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마음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아들의 시선은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일어날 그 안식일과 그 겨울에”(마 24:20)가 있다. “난리와 난리 소문으로” 세상이 온통 뒤숭숭하게 될 그날에 가 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그날이다. 사람의 손에 이루어진 모든 것들, 성전과 나라와 체제와 이념들이 그리고 명예와 재산과 건강이 “돌 하나가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듯 다 무너질 그날”(마 24:24)에 가 있다. 큰 성 바벨론, 곧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것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어버린 이 세상과 이 종교와 이 성전과 이 육체와 이 마음이 무참히 “무너지는” 그날(계 18:2)에 가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분향을 가증히 여기고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것들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노라”(사 1:13, 14)고 말씀하시는 그날에 가 있다. (127.1)
 “그 안식일과 그 겨울”“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그날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는” 날이다. “사단이 시몬을 밀 까불듯 하려 했듯이 우리를 청구할”(눅 22:46) 날이다.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 하는” 날이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날이다. “두 여자가 메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날이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모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세상 끝”(마 13:40, 41) 이다. (128.1)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안식일의 자녀들은 이러한 날들을 자기 앞에 두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자기들의 순례 길에 분노한 마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는 아들들이다. 진실로 “야곱의 형 에서가 400인의 병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기다리듯 마귀가 안식일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용이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기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다(계 12:17). 안식일의 자녀들에게는 “심히 두렵고 답답한”(창 32:6, 7) 날이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벧전 5:8) 시간이다. 어떤 면에서 “세상은 기뻐하고 너희는 애통하고 근심하는”(요 16:20) 날들이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요 16:3) 날들이다.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되었던(창 32:25) 야곱의 환난 같은 날이다. 안식일의 자녀들에게 야곱의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하늘의 천사가 그 손에 펴놓은 작은 책을 들고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이 큰 소리로”(계 10:3) 눈앞에 닥친 이 환난을 경고하고 있다. “지체치 않으리라,” “남은 때가 없으리라”(계 10:6). (128.2)
 따라서 안식일에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부르짖는 아들의 기도는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라고 부르짖었던 야곱의 기도이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내 생명을 보전하려는”(창 32:38) 브니엘의 기도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 하신 아들의 기도이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날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신 예수님의 기도이다. (129.1)
 안식일과 종말론적 환난
 안식일의 자녀를 기다리는 종말적 환난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안식일 신앙 때문에 생기는 재난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제칠일 안식일에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쓰고 어린양과 더불어 시온산에 서기 때문에”(계 14) 생기는 환난이다. 안식일의 자녀들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함으로”(요 15:19) 생기는 환난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벨론에서 나와 그 죄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계 18:2-4) 생기는 환난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을 지키기” 때문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따라가며 사람 가운데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음으로써”(계 14:5) 생기는 환난이다. (130.1)
 그렇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섬”(계 12:17)으로써 생기는 환난이다. “용에게 권세를 받은 짐승이 사람아들들로 하여금 용에게 경배하게 하고 짐승에게 경배하게 함으로써”(계 13:4) 일어나는 환난이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듯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충절을 시험함으로써 생기는 환난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로 인하여 저를 이기려”(계 12:10) 함으로써,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려함”(계 12:12)으로써 생기는 환난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험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벧전 4:6, 7). (130.2)
 그러나 이 환난은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었던 환난”(단 12:1)이다. 우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벧전 4:12)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을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발생하는 환난이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고서야 끝나는”(단 12:6, 7) 환난이다. (131.1)
 환난을 이기는 안식일 신앙-“말씀을 듣고 깨닫는” 안식일 신앙
 돌이켜 보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환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들의 길에서 넘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내 살을 먹으려고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다”(시 27: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다가 죽었다”(레 16:1). “백향목이 넘어졌고 바산의 아름다운 상수리나무와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다”(수 11:2). 용사 같은 사람들이 “간질로 고생하는 자같이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다”(마 17:19). (131.2)
 왜 넘어졌는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함으로써 넘어졌다”(벧전 2:8).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함으로써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기”(마 13:19) 때문에 넘어졌다.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함으로써 마치 “돌밭에 뿌린 씨같이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는 넘어졌다”(마 13:20).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함으로써 가시떨기에 뿌린 씨같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마 13:22) 넘어졌다. (132.1)
 우리 앞의 시련은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는” 시련이다. 시련의 혹독함에 있어서 우리 앞의 시련은 중세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고서 끝난다”고 하는 “개국이래 없던 대 환난”이다. 이 환난에서 안식일의 자녀들이 넘어지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안식일 신앙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 예수께서 아들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은 “좋은 땅에 뿌린 씨처럼” “말씀을 듣고 깨닫는”(마 13:23)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의 참 도리인 안식일의 도리를 깊이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다.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132.2)
 좋은 땅은 가난한 심령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가난한 심령에 뿌려진 복음이다.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가난한 심령을 주옵소서”이다. 시험을 이기는 안식일 신앙생활은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안식일의 진리를 “듣고 깨닫는” 신앙 생활이다. 안식일이 가르치는 아들의 도리를 가난한 마음으로 깨닫는 삶이다. 가난한 심령으로 그 깨달음을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성장시키고 심화시키고 결실하는 신앙의 삶이다. (132.3)
 날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심령으로” 안식일의 진리를 “듣고 깨닫는”(수 4:22; 출 14:21) 사람들이다. 이들은 환난의 홍해 길을 마른땅같이 걸을 것이다. “길을 건널 때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할 것이다”(사 43:2). (133.1)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온유한 정신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청결한 마음으로, 평화의 정신으로, 의를 위하여 기쁘게 핍박을 받는 마음으로 날마다 안식일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들에게 종말론적 환난의 날은 시험의 날이 아니라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날이다. 일어나서 힘차게 달리는 날이다. 심판을 받는 날이 아니라 상급을 받는 날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식어지거나 사라지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성장하고 심화되는 날이다. 결실하고 추수하는 날이다(계 14:14-16). (133.2)
 세상 끝은 추수하는 때이다(마 13:30). 추수 때에 추수꾼인 천사들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불에 사르지만 안식일의 복음을 듣고 깨닫는 삶을 사는 안식일의 자녀들은 익은 곡식이 되어 하늘 곡간에 추수될 것이다(마 13:40). 진실로 듣고 “깨닫는 사람만이 지혜 있는 사람”(단 12:10)이라 할 수 있다. “깨닫는 사람들은” 시련 가운데서도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하는” 반면 “악한 사람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여”(단 12:10) 넘어지기 때문이다. (134.1)
 그러나 그 깨달음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성장하는 안식일 신앙의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를 능히 도우시려는”(히 2:18)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마음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우리로 알게 하신”(엡 1:17-19) 것이다. (134.2)
 진실로 “시험에 들게 마옵시기”를 기도하는 안식일의 자녀는 앞에 있는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전 15:57). 우리의 안식일 신앙과 그 깨달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엡 2:2-8) 이기 때문이다. “시작할 때 확실한”(히 3:14) 안식일의 신앙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우리가 확신하기”(빌 1:6) 때문이다. “주께서 땅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실 것이기”(롬 9:28) 때문이다. (134.3)
 안식일의 자녀들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낳은 자가 아니다. “시내산의 언약으로 낳은 계집종의 자식이” 아니다. “행위로 낳은 율법의 노예가 아니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할 자유하는 여자의 소생이다. 하나님에게서 약속과 성령을 따라 난 자”(갈 4:23, 24, 28, 31) 이다. “아래로부터 난 자가 아니요 위로부터 난 자”(갈 4:26) 이다. (1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