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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하여 제일 전면에 떠오르는 하나의 전제는 교부들의 전쟁 및 군복무관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이들의 앞 시대와 뒤 시대를 잇는 연결의 선상에서, 그리고 교부들의 처한 삶의 특수한 정황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대(前代)로부터 그리스도교회의 고유한 윤리와 사회적 태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대의 형편과는 전혀 다르게 격변하고 있는 사회적 조건에서 그들의 도덕적, 종교적 유산을 지켜야했으며 더 나아가 새로운 환경과 함께 제기된 문제들을 소화하고 적응해야 했다. (111.1)
 그들이 전수 받은 고유의 전통적 윤리는 구별과 분리의 윤리였다. 이것은 로마시민으로서의 윤리가 아니라 하늘 시민으로서의 윤리였다. 따라서 그것은 소수의 윤리였다. 그런데 달라진 환경과 함께 그들에게 요구된 윤리는 일치의 윤리였다. 그리스도인 집단은 이제 예외적 배려가 가능한 소수집단이 아니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위협적으로 엄포 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모든 지역, 모든 계층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축복에 뿐만 아니라 그 책임에도 합께 참여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2, 3세기의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은 모두 직접적으로 켈수스(Celsus)를 언급했거나 안했거나에 관계없이 켈수스의 주장을 의식하고 있었다. (111.2)
 교부들은 이제 달라진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시민 윤리를 새롭게 다듬어야할 필요에 처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세상에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세상나라는 그 종말이 선고되었으나 아직 이 땅에 미적거리고 있었다. 사랑과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범법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도 엄연히 필요하였다. 교회는 이같은 “이미”“아직” 사이의 긴장을 창조적으로 헤쳐가야 할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112.1)
 교부들이 이를 위해 모색한 하나의 방식은 이중적 또는 삼중적 사회 인식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별하고 세상 나라를 다시 의로운 질서와 불의한 질서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각 사회집단에게 각기 상응하는 윤리를 기대하거나 판단하였다. 교회는 교회의 윤리를 사회에 요구하지 않았으며 교회와 사회의 일치는 교회의 윤리가 사회에 용납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그리스도인의 직업선택을 제한하며 그 직업에 종사하는 방식을 제한한다. 히폴리투스의「사도들의 전통」은 이를 위한 안내서였던 것이다. (112.2)
 교부들은 이러한 직업 인식 및 윤리 인식에 연관하여 공공 사회를 유지해야하는 시민적 책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할 뿐만 아니라 훌륭히 그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고 답변한다. 국방의 의무도 그 책임의 하나라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러나 책임 이행의 수단과 방법도 이교도들과 같아야 한다는 데에는 단호히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황제가 원한다 해도 전쟁을 할 수 없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했다. 군복무에 대한 교회의 부정적 태도는 전통적인 것이며 그 핵심은 제 6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는 교훈에 있었다. 살인과 전쟁의 구별은 후기 신학의 추론일 뿐, 초기 그리스도인의 인식은 아니었던 것이다. (112.3)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유혈의 문제는 단지 군복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사형의 선고와 집행의 의무를 지닌 민간의 행정관리들에게도 문제가 되었다. 교부들의 유혈반대의 주장에서 유혈의 금기를 구약의 성결 의식과 관련시켜 평화주의적 요소를 배제하려는 의도는 피상적인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덕이 일단 종교 속에 들어오면 도덕적 요구에 종교적 동기가 부여되는 것은 너무나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부들의 유혈 혐오와 비폭력의 태도에는 무법자로부터 무죄한 희생자를 보호해야한다는 윤리적 적극성이 결여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113.1)
 우상숭배도 군복무의 장애요소가 되었지만 이것은 군대만의 특정 현상이 아니었다. 로마사회 전체에 깔려있는 보편적 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 군대 내부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초기 그리스도 교회로서는 군대 내의 우상숭배의 위험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가지고 있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군대와 유혈의 일치는 이미 오랜 옛날로부터 당연시되어 온 보편적 관념이다. 그리고 군복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부정적 태도는 그리스도교의 순교사에 비친 로마 군대의 악마적 이미지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교부들은 악마적 권력의 박해를 극복하는 영적 병사로서의 순교집단의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군사 은유를 발전시켰다. (113.2)
 교부들에게 있어서 일치하는 현상은 전쟁에 대한 혐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전래적 태도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교를 평화의 종교로, 그리스도의 신을 평화의 신으로 말한다. 로마의 종교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항상 전쟁과 연관되고 있다. 그들은 그 전(前) 시대와 마찬가지로 살인과 전쟁행위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합법적 살인도 예외시하지 않았다. (113.3)
 교부들의 반전적 태도는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을 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세상에는 엄연히 전쟁이 있다. 그리고 그 전쟁들이 모두 똑같은 것도 아니다. 이른바 불가피한 전쟁, 정당한 전쟁들이 있고 불의한 전쟁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낡은 시대와 이방의 영역이며 관심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인이 세상 일에 관여하는 방식은 경건한 생활을 통한 평화의 기여와 의로운 군대의 승리를 비는 기도의 길뿐이다. 교부들은 의로운 전쟁을 그리스도인 윤리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의로운 군주는 꼭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114.1)
 그런데 군복무를 반대하는 그리스도교회의 전래적인 태도에 상관없이 또 이교도 켈수스조차 인식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A.D. 173년 이전에 로마 군대 안에는 이미 그리스도교의 개종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의 군복무 논의는 주로 이들 군인 개종자의 거취를 두고 시작되었다. 군직의 포기와 유지에 대한 주장의 차이는 교부들에 관한 한 지역적 차이를 필연적으로 반영하고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시기와 사회 정세의 차이, 그리고 교부 개인의 교회론적, 인간론적 차이와 그가 책임지고 있는 직책의 차이에 기인하는 부분이 많았다.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의 엄격한 교회론은 그들의 엄격한 교인 윤리와 관계가 있으며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의 목회적 고려는 사안에 대한 그의 온건한 주장이나 침묵에 반영되고 있다. (114.2)
 키프리아누스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이 개종한 그리스도인 병사에게 군직을 포기하도록 강력히 권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의 반전적, 반군복무적 입장이 의문시될 필요는 없다. 그들의 평화적 태도는 그리스도교 전래의 너무나 당연시된 전통적 주장이기 때문에 침묵만으로도 전통적 입장에 대한 묵시적 지지로서 충분하였다. 초점은 그들의 군복무관이 아니라 군복무 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목회관과 인간관이었다. (114.3)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규범 못지 않게 그 규범의 주체인 새 신도들이 처해 있는 삶의 정황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직업의 신분적 예속성은 공지의 사실이다. 더구나 병영은 민간과 유리된 특수 사회였고, 교회로 볼 때는 교회의 먼 외곽에 속하여 교회의 지도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개종으로서 선교의 새로운 전선이 개척된 것이 아닌가. 병사의 개종 자체가 이례적 사건인 만큼 그들의 병영 신앙의 이례적인 적응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5.1)
 이와 관련하여 특히 클레멘트에서 주목되는 것은 도덕의 내면화 경향이었다. 눈에 보이는 직업의 형태를 통하여 자신의 양심을 나타내는 일 못지 않게 한 개인으로서 양심을 지키는 일이 강조되었다. 삶의 정황에 대한 주목과 도덕의 내면화의 경향은 당시의 그리스도교회의 신앙 사조에서 일어나고 있던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새로운 경향과도 유관할 것이다. (115.2)
 병영 내 신앙생활의 적응은 로마 군대의 기능적 분화 및 그 다양성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로마의 군대는 소방, 경찰, 토목 등의 평화적인 성격의 다양한 업무에도 종사했던 것이다. 또 사부제(四副帝)들이 로마 군대의 종교적 충성을 요구할 때까지는 로마 군대 당국이 병사들의 종교에 너그러웠다는 사정도 감안할 수 있는 요소였다. 그러나 교부들은 특수한 환경에 놓여 있는 신도들에 대한 정황적 고려와 함께 전래의 도덕적, 종교적 특성을 유지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중윤리를 교회 내부의 두 도덕적 집단을 구분하는 개념으로 도입하였다. 앞서 이 이중원리는 교회와 세속을 구분하는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교회 내의 수준이 다른 두 그룹을 구별하는 개념이 된 것이다. (115.3)
 이 때까지도 군복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감내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시간의 추이와 함께 변화되었다. 군인 순교자들이 발생하고 군대 안에서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숙청되는 사정에 직면해서는 그리스도교인 병사가 그리스도교회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그리스도인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116.1)
 사회 여건의 차이가 교부들의 군복무관의 차이로 나타난 현저한 예는 유세비우스의 경우이다. 유세비우스에게만 유일하게 전쟁과 군복무에 대한 반대와 주저가 배제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 군기 Labarum에 십자가의 표지를 새긴 그리스도교의 투사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박해자를 토멸하여 그 전까지는 교회가 순교자들에게만 제한하여 사용해왔던 “승리자”(Victor)의 칭호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관용과 박해가 쟁점이 되었던 20여 년의 대 내란 기간을 거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군대와 교회의 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이제 지킬 국가도, 지킬 성전도, 지킬 영토도 없는, 역사에 새롭게 나타난 급진적 윤리집단이 아니라 로마사회를 야만으로부터 보호하고 교회의 평화를 이교도의 박해로부터 지켜야 하는 신정 사회(神政社會)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의 비폭력적 윤리는 쇠퇴에 직면한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 콘스탄티누스의 치하에서 군복무상의 여러 장애 요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우상숭배의 위험이 제거되었다. 남은 문제는 유혈의 가책이었다. 유혈의 위험에 대한 관심은 점차 소수의 소리로 작아져갔지만 유세비우스 자신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라는 형태로 그리스도교 윤리를 이분화함으로써 이 문제를 소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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