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여건의 차이가 교부들의 군복무관의 차이로 나타난 현저한 예는 유세비우스의 경우이다. 유세비우스에게만 유일하게 전쟁과 군복무에 대한 반대와 주저가 배제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 군기 Labarum에 십자가의 표지를 새긴 그리스도교의 투사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박해자를 토멸하여 그 전까지는 교회가 순교자들에게만 제한하여 사용해왔던
“승리자”(Victor)의 칭호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관용과 박해가 쟁점이 되었던 20여 년의 대 내란 기간을 거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군대와 교회의 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이제 지킬 국가도, 지킬 성전도, 지킬 영토도 없는, 역사에 새롭게 나타난 급진적 윤리집단이 아니라 로마사회를 야만으로부터 보호하고 교회의 평화를 이교도의 박해로부터 지켜야 하는 신정 사회(神政社會)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의 비폭력적 윤리는 쇠퇴에 직면한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 콘스탄티누스의 치하에서 군복무상의 여러 장애 요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우상숭배의 위험이 제거되었다. 남은 문제는 유혈의 가책이었다. 유혈의 위험에 대한 관심은 점차 소수의 소리로 작아져갔지만 유세비우스 자신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라는 형태로 그리스도교 윤리를 이분화함으로써 이 문제를 소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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