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13 장  안식일, 처음 저녁의 고요와 평온으로 가는 길
 그러나 이 저녁은 그의 창조한 세계가 없는 하나님만의 저녁이 아니다. 창조 전에 이 저녁은 하나님 홀로의 저녁이었지만, 창조의 6일 다음에 하나님이 맞은 제칠일 저녁은 하나님이 그의 창조하신 세계와 더불어 돌아온 저녁이다. 그가 창조한 세계와 더불어 “숨을 돌리는” 저녁이다. (118.3)
 제칠일, 환난을 침노하는 “메누하”의 강물
 일곱째 날은 “햇빛이 쓸데없어”서 저녁이지, 어두워서 저녁이 아니다. 소란스러운 때깔의 햇빛이 아니라 절대의 고요한 밝음, 그 적광(寂光)으로 환한 저녁이다. (119.1)
 한낮의 일광은 시간 속의 햇빛이다. 소음과 때깔과 끄름의 햇빛이다. 맨살을 햇빛에 노출하면 햇빛의 끄름으로 검게 탄다. 때(시간)가 때(더러움)이기 때문이다. 때 아래 때묻지 않은 것이 없다. 빛도 마찬가지이고 물도 마찬가지이다. 바람도 마찬가지이다. 때(시간) 아래서는 아름다움조차 때깔의 아름다움이다. 빛 때의 아름다움, 물 때의 아름다움, 바람 때의 아름다움, 손 때의 아름다움이다. 더러움의 아름다움이다. 시간에 흐르는 빛이고 물이고 바람이다. 시류(時流)로써 흐르는 빛이고 물이고 바람이다. 때 아래 사는 사람 치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때묻지 않은 공의 없고, 때 아래 바래지 않은 공덕이 없으며, 때 끼지 않은 진리 없다. 시류, 곧 때물로 흐르는 인생이며 역사이다. (119.2)
 진실로 때 아래서 때의 흐름으로 사는 일생은 괴롭다. 하루의 진정한 마침은 저녁과 더불어 씻고 쉼이고, 일생의 진정한 마침은 씻고 쉼인데, 때 아래에는 생존을 청정으로 씻어 쉬게 할 그 때 없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 날의 절망이 여기에 있고, 여섯 날의 삶의 절망이 여기에 있고, 여섯 날의 쉼의 절망이 여기에 있다. (119.3)
 여섯 날에도 저녁은 있고, 그 저녁은 고요와 평온의 저녁이다. 사람들은 그 저녁의 고요와 평안 속에 잠자고 쉰다. 그러나 그 저녁은 모두 때 아래의 고요이고, 때묻은 평온이다. 청정하지 못한 고요와 평온이다. 노쇠와 죽음을 간직한 청춘 같고, 그 안에 낙엽을 베고 있는 새싹 같고, 목마름을 담고 있는 야곱의 우물 같은 고요와 평온이다. 소요와 피로와 불안이 스며있는 쉼이다. 쫓기는 잠이요, 가시지 않는 피로의 쉼이다. (119.4)
 그러나 제칠일의 저녁은 때(시간) 이전의 저녁이고 때(더러움) 이전의 저녁이다. 때 없는 빛, 때 없는 바람, 때 없는 흐름의 저녁이다. 때 없는 고요와 때 없는 평온의 저녁이다. 만유가 때 없는 빛의 샤워에서 몸 씻던 저녁이다. 태초의 시간이 때 없는 때로 흘러나온 영원의 샘물이다. 청정무구한 실로암의 저녁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 지으시던 일을 마치고 물러나신 그 저녁이다. 하나님의 “저 안식,” “그의 안식”의 자리이다. 하늘의 숨, 하나님의 숨을 쉬신 저녁이다. 하나님이 만유와 사람을 초청한 저녁이다. 만유는 이 청정한 저녁에서 쉼을 누려야 한다. 6일의 때묻은 때는 이 때 없는 만고의 저녁에서 멱감고 씻어야 한다. 때묻은 일광조차도 저 청정한 빛 적광(寂光)에서 멱감고 씻어야 한다. 때 속에 때묻은 우주의 만상과 만가지 인연이 이 완전한 이 저녁에서 씻고 거룩한 일원상(一圓相), 곧 하나됨의 거룩한 쉼을 구가해야 한다. 때묻은 시류는 순수 무구한 그 실로암 샘의 저녁에서 씻어 거룩한 구속의 역사로 흘러야 한다. (120.1)
 만유가 이 실로암의 물가에서 “영혼의 소생”(시 23:3)을 얻어야 한다. 때 없는 때인 이 제칠일 저녁에 하나님이 만유에 베풀어주신 때 없는 평안과 고요가 하나님이 “너희로 내 안에서 누리게 한 안식”이다(요 16:33).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다”(빌 4:7). 극심한 폭풍과 환난에서도 능히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지킬” 하나님의 고요와 평온이다. 누구도 빼앗지 못하고 어떠한 처지에도 빼앗기지 않는 평온과 기쁨의 안식이다(요 16:22). 환난과 걱정과 죽음의 공포로 분쇄되는 고요와 평온이 아니라, 환난과 어둠과 죽음의 공포 속으로 침노하여 들어가 그것들을 분쇄하고 이기는 강물 같은 고요와 평온과 안식이다(마 11:12). 이 고요와 평온의 저녁이 시편 23편 2절“쉴만한 물가”같은 저녁이다. “쉴만한”의 히브리어는 “메누하,”“고요한”이다. 티없고 때 없는 실로암의 “고요한 물가”가 영혼이 소생하는 “쉴만한 물가”이다. 안식의 물가이다. 이 물가로의 초청이 제칠일 저녁으로의 초청이다. (120.2)
 제칠일 저녁으로 가는 길
 제칠일 저녁은 우리의 맨 처음 저녁이다. 창조가 있기 전, 세상이 있기 전, 때와 더불어 때[죄]가 있기 전, 열 두 가지 인연으로 천만가지 업보가 생겨나기 전의 저녁이다. 이 제칠일 저녁의 영광은 우리의 처음이신 독생자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요 17:5) 영광이다. 제칠일 안식의 영광은 우리의 처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숨쉼의 영광이다. 제칠일로 가는 것이 저 저녁으로 가는 길이며, 그 처음으로 가는 길이며, 그 처음의 때 없음으로 가는 길이다. 맨 처음의 때 없는 고요와 평온으로 가는 길이다. (121.1)
 제칠일로 가는 길은 맨 처음의 때 없는 고요와 평온과 사랑에서 우리의 때묻은 숨, 가래 낀 숨, 천식 같은 숨을 씻고 갈아내는 길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순수와 고요와 평온과 사랑과 기쁨으로 약동하는 새 숨, 곧 평안한 숨을 되찾는 길이다. 그리고 그 맨 처음의 때 없음으로 가는 길은 우리의 맨 처음인 맨 몸, 맨 살, 맨 마음으로 가는 길이다. 맨 처음으로 가는 길은 우리의 때로 찌든 육체를 벗고 씻어 맨 몸, 맨 살, 맨 마음을 들어내는 길이다. (121.2)
 맨 몸, 맨 살의 사람이 누구인가? 빈 손, 빈털터리의 가난한 사람이다. 핏덩어리 아린 아이이다. 가진 것 없는 맨 마음의 사람이 누구인가? 고아와 과부와 병자와 나그네와 죄인이다. 아버지와 그 집을 그리는 탕자와 회개하는 큰 죄인이다. 이 사람들의 마음이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안식이 “저 안식”이다. (121.3)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크게 비운 사람, 크게 빈 사람의 마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극빈자의 마음이다. 다 비우고 다 털어 빈털터리가 된 빈 손, 빈 몸의 마음이다. 제 아무리 의롭고 제 아무리 현명해도, 제 아무리 크고 큰 부와 명예와 권력과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진실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의 마음으로,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되돌아가 가는 사람의 마음이다. 가난하고 병들고 죄 많고 외로워서 절박하고 간절하게 구걸하고 비는 사람, 지극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이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안식이 “그의 안식”이다. (122.1)
 이 사람이 제칠일 안식일의 극히 귀한 손님이다. 우리의 맨 처음인 극빈자이다. 독생자이다. 크게 복 있는 사람이다. 맨 처음의 고요와 평안과 기쁨이 맨 몸, 맨 살, 맨 마음의 처음 사람에 깃드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맨 처음인 예수 그리스도가 누린 축복이기 때문이다. (122.2)
 제칠일로 가는 길은 우리의 삶에서 절대성을 키우는 길이다. 소란한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 고요와 평안을 체험하는 길이다. 우리의 삶에서 절대성을 키우는 길은 우리의 삶의 상대적 부유를 가난하게 하는 길이다. 절대는 상대의 부유에서 쇠약하고, 상대의 가난에서 자란다. 상대의 절대적 가난에서 절대의 절대적 위상이 드러난다. 제칠일의 안식은 절대적인 안식이다. 상대적인 힘이 절대적으로 무력한 태아가 그 어머니 태 속에서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느끼는 절대적 안식 같은 안식이 제칠일의 안식이다. 우리 마음의 절대적 고요와 평온은 우리의 상대적 자랑과 신뢰가 절대적으로 가난해졌을 때 다가온다. (122.3)
 그러나 우리는 상대의 세계, 때의 시간에 산다. 상대와 때가 우리의 삶의 한계이며 토대이다. 때의 시간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로 가난해 질 수 없다. 때묻은 사람, 때 아래 때 부자가 우리의 숙명이다. 우리가 때 없는 고요의 평안으로 갈 수 없음은 우리가 때 찌든 육체를 벗은 맨 몸, 맨 살, 맨 마음으로 갈 수 없음이다. 우리는 벌거숭이의 죄인이 될 수 없고, 그래서 때 없는 고요와 평온으로도 갈 수 없다. (122.4)
 오직 벌거숭이 맨 몸, 맨 살, 맨 마음으로 나무에 달린 저 사람의 아들만이 우리로 하여금 빈 손, 빈 몸의 가난한 대(大) 죄인으로 자신을 들어내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저 절대의 저녁, 곧 우리의 맨 처음으로 가는 길은 맨 몸, 맨 살, 맨 마음의 맨 처음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이다. 맨 처음의 이 사람, 골고다의 십자가에 벌거숭이로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때 없는 고요와 평안의 안식이 적광으로 빛나는 절대의 저녁이다. (123.1)
 우리가 비록 때 속의 때같이 시류의 파도가 바다처럼 범람하는 시간의 시장 바닥에서 때에 찌들은 자기 생존을 거래하며 살아왔다 해도, 저 어린양의 피로써 우주를 씻어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 마음의 중심에 곧바로 세우는 바로 그 순간에 저 절대의 저녁,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때 없는 고요와 평안이 솟는 샘물처럼, 몰려오는 강물처럼, 우리의 생존을 뒤덮고 씻을 것이다. 구름 사이로 쏟아 내리는 달빛처럼 날들 사이에서 제칠일 안식일의 때 없는 고요와 때 없는 평화가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리하여 때 아래서 때로 지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것이다. 제칠일 고요와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마음에 끼치는 고요와 평안이다. (1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