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되어 있다. 사람들이 애타게 갈망하는 안식은 이 최초의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누린 “그의 안식”(히 4:1) 같은 안식이다. (114.1)
물론 “이미 믿는 우리들”(히 4:3) 중에도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가서”(히 4:10) “제칠일에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같이 자기 일을 쉰다”(히 4:4, 10)고 고백하는 신자들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을 먼저 받은 자들”의 대부분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제칠일에 누린 이 안식이 아직도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한”(히 4:6) “저 안식”(히 4:11)이다. 늘 우리들의 삶의 저 너머에, 까마득한 높이와 까마득한 깊이에 있는 “저 안식”이다. 저 세상, 하늘 나라의 안식이다. 언제나 하나님 저 분의 안식이고, 그 분 하나님의 안식이었지, 이 사람, 나의 안식이 되었던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안식은 나 같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언제나 “남아있는 안식”(히 4:9)이다. 미지의 안식이며, 미답의 안식이다. (114.2)
우리는 언제나 이 세상의 낮고 얕은 안식, 곧 이 사람, 나의 안식에 절망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저 안식,” 저 분의 안식, 하나님의 “그의 안식”을 애타게 목말라해 왔던 것이다. 언제까지나 이 안식이 우리 같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미지의 안식, 미답의 안식, 미래의 안식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히 4:9). (114.3)
도대체 하나님이 최초의 제칠일에 누렸고, “이미 믿는 우리들”의 일부에게 “창조 때부터 이루어진” 안식은 어떠한 안식인가. 어떠한 안식이기에 “이미 복음을 받은 우리도”“들음을 믿음에 화합하지 못하고”(히 4:2) “순종치 못함을 인하여”(히 4:6) 그 안식에 “미치지 못하고”(히 4:1) “들어가지 못하고”(히 4:3, 5, 6) 있는 것인가. (115.1)
그 안식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 부족도 우리가 그 안식에 미치지 못하고 들어가지 못하는 중요한 장애 요인의 일부일 것이다. 그 안식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일까. 그 안식의 본성에 대한 바른 이해의 실마리는 그 안식의 본문인 창세기 2장 2, 3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그 안식의 본성은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상고되고 사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15.2)
첫째는 “그의 안식”이 여느 날의 안식이 아니라, “일곱째 날의 안식”이라는 점이다. 그 안식의 본성은 일곱째 날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다. (115.3)
둘째로는 그 안식이 “그의 안식”이라는 점이다. 그의 안식의 본성은 그분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의 안식이 그의 어떤 본성과 연관되고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사색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115.4)
셋째로 그 안식은 하나님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고 다 이룬 그 창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의 본성이 그의 안식의 본성에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안식의 질은 그 창조의 질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15.5)
넷째로 그 안식이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를 다 이루신 그 끝내줌의 본성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안식의 차원은 그 끝내줌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115.6)
이 글에서는 첫째 사항, 곧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서의 “그의 안식”의 성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안식이 여느 날의 안식이 아니라 일곱째 날의 안식이어서 “저 안식”이고 “그의 안식”이라면, 여느 날과 다른 일곱째 날의 어떤 특성이 그 날의 안식을 여느 날의 안식과 다르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16.1)
본문을 보면 일곱째 날의 남다름은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다한” 시각, 곧 “일곱째 날이 이를 때”의 특성에서 암시되고 있다. 곧 “일곱째 날이 이를 때”의 특성이 일곱째 날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116.2)
그렇다면 “일곱째 날이 이를 때”란 어느 시각을 두고 말함인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하신 것을 보면, 우주에는 저녁이 먼저 있고 아침이 나중이다. 저녁이 이를 때가 한 날이 이를 때이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이 시작되는 저녁에 “그 창조하시며 지으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이 날에 안식”(창 2:3)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안식에 들어간 시간은 일곱째 날이 시작되는 저녁이었다. 이것은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사람들의 일상의 모델이기도 하다. (116.3)
그런데 첫째 날에도 저녁이 있었고, 다음 날들에도 저녁들이 있었다. 사람들의 모든 날에는 저녁이 있고, 사람들은 모든 날의 저녁과 더불어 일을 마치고 쉰다. 그리고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도 쉼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여섯 날의 저녁과 일곱째 날의 저녁은 어떻게 다르며, 여섯 날의 쉼과 일곱째 날의 쉼은 어떻게 다른가. (116.4)
제칠일 안식일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제칠일의 안식을 처음으로 기술한 창세기 기자는 이 물음에 대답하려 했다. 그 대답은 먼저 과연 여섯 날들은 일곱째 날과 다르고 일곱째 날의 저녁은 여섯 날들의 저녁과 다른가 하는 물음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렇다, 다르다 과연 다르다”라는 것이다. (116.5)
그렇다면 어디에 그런 대답을 기록했는가. 창세기 기자는 제칠일에 앞섰던 여섯 날들에 대하여 사용했던 표현 곧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설명을 제칠일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대답을 대신했다. 제칠일은 앞선 여섯 날들과 같은 24시간의 날이며,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고, 밤이 있고 낮이 있는 이 세상의 상대적인 한 날이면서, 동시에 제칠일은 여섯 날과는 달리 아침이 없는 날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날이라고 말하려 하였던 것이다. (117.1)
여섯 날들은 모두 저녁과 아침의 날이고 일하고 쉬는 날인데, 일곱째 날은 일이 없고 쉼만 있는 날이다. 하루 종일이 쉼인 그런 날이다. 하루 전체가 여섯 날의 저녁때처럼 쉬는 날이다. 하루 종일이 그 날의 “이를 때인” 날이다. 하루 종일이 저녁인 날이 일곱째 날이다. 저녁과 아침이면서 전체로서 저녁인 그런 날이 제칠일이다. 하루의 리듬은 아침과 저녁의 리듬이고, 창조와 쉼의 리듬이다. 하루의 리듬을 한 주일의 리듬으로 옮긴 것이 여섯 날과 제칠일의 리듬이다. 낮과 같은 여섯 날과 저녁과 같은 제칠일의 리듬이요, 여섯 날의 창조와 제칠일의 쉼의 리듬이다. (117.2)
따라서 이러한 뜻으로써의 제칠일 저녁은 햇빛의 낮과 구별되는 햇빛 없는 저녁이 아니다. 이 저녁을 저녁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햇빛이 쓸데없다”(계 21:23). 또 어둠이어서 햇빛이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영적이어서 햇빛이 쓸데없고, 차원이 다른 밝음이어서 햇빛이 쓸데없는 저녁이다.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이 있기 전,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기”(창 1:3, 5) 이전의 영원한 저녁, 절대적 저녁, 하늘의 저녁이다.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안식만 있던 저녁이다. 시간 이전의 시간이며, 시간 이후의 시간이다. 시간이 거기서 나오고 거기서 끝나는 거기의 저녁이다. 낮이 막간인 저녁이고 일이 막간인 안식의 저녁이다. 영원의 저녁이다. 천국의 저녁이다. (117.3)
일곱째 날은 이런 날이다. 두 세계의 날, 두 차원의 날이다. 여섯 날의 하나이면서 여섯 날과 다른 날이다. 상대에 속하면서 절대에 속해 있다. 낮이면서 저녁이고, 어둠이면서, 빛이며, 땅이면서, 하늘이고, 시간이면서, 영원이고, 일이면서 쉼인 날이다. 상대를 옷 입은 절대, 시간을 옷 입은 영원, 세상을 옷 입은 하늘, 낮을 옷 입은 저녁이다. (118.1)
창조주 하나님은 여섯 날 동안 창조의 일을 다 마치시고 창조가 있기 이전, 시간이 있기 이전의 저녁, 그 자신이 본래 거하던 고요와 평온의 그 절대적 저녁으로 되돌아 오셨다. “가라사대”로 세상을 창조하시던 소리와 소음의 여섯 날에서 고요한 제칠일, 소리 없는 제칠일로, 말씀 없는 말씀의 저녁으로 되돌아 오셨다. 고요가 말씀인 그 저녁으로 되돌아 오셨다. 자신이 소리 없는 말씀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소리 없는 말씀인 저녁으로, 날 아닌 날인 저녁으로 돌아 오셨다. 그 저녁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이다. 그 저녁이 제칠일이다. 이 절대의 저녁에서 그가 안식을 취하셨다. 하나님이 안식을 취하시려 이 절대의 저녁을 선택하셨다. (1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