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6 장 신약에 나타난 새 언약
 정죄 받은 양심의 고발로부터 이렇게 효과적으로 정결케 됨으로 짐승의 피의 의식으로 하는 레위기 제사법은 완전히 피상적이고 낡은 것이 되었다(히 8:13; 10:9 참조). 구약 그 자체가 시편 110:4에서 모세 언약의 레위 제사장직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 메시아에 의해 대체될 한시적 제사 직분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108.2)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는 이스라엘의 의식 규례를 “일시적인 교훈 장치”라고 불렀다.28 그것은 “사라지도록 계획된 것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 그것은 장차 올 좋은 것의 “표상”“그림자”이지 “몸 그 자체로” 불리지 않았다. (108.3)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1-12)라고 그의 독자들에게 도전한다. (108.4)
 메시아 직분에 대한 시편 110편의 예언은 레위 제사장직과 그 의식법은 하늘성소에 봉사하는 메시아의 더 뛰어난 제사장직분으로 인해 교체되도록 고안된(히 8:1-6) 한시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히 7:22)으로 지명되셨다. (108.5)
 “새 언약”의 메시아적 성취
 히브리서 기자는 예언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예레미야 31:31-34에 기록된 새 언약의 약속 전체를 인용한다(히 8:8-12 참조). 그리고 목회적 확신으로 예레미야의 말을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성령의 증언”으로 적용하고 있다(10:15 참조). “말세”의 메시아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그의 사도적 기별은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레미야가 약속한 “새” 언약의 중보자였다.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언약을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유효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 16),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7:25). (108.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 구속적인 경험은 하늘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과 양심에 도덕법을 효과적으로 새기시어, 우리로 하여금 온 맘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 시대에 옛 언약은 대 다수의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순종으로 귀결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는 옛 제사장직이 할 수 없었던 것, 곧 메시아적 의, 야훼에 대한 개인적 지식, 그리고 모든 진실한 신자들을 위한 영원한 용서 등을 이룰 것이다. 성취의 때가 메시아 이신 예수와 함께 왔다. 왜냐하면 그가 새 언약의 정하신 “중보자”(히 9:15)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봉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의 동기를 새롭게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의 이런 효과적인 제사장직이 히브리서—8-10장의 중심 주제이다. (109.1)
 이 서신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축복을 “이같이 큰 구원”(2:3)이라고 요약한다. 그리고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의 부으심을 포함시킨다. 저자는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8:6)고 말하면서 이 새 언약의 봉사를 옛 것과 비교한다. (109.2)
 그리스도의 더 나은 봉사는 옛 언약아 제공하지 못했던 것, 즉 하늘의 하나님께 바로 나아가는 것을 실현하였다(롬 5:1-2 참조). 첫 언약은 아무런 제한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또 우리의 악한 양심을 정결케 하지도 못하였고 죄의 지배를 극복하지도 못하였다(히 8:7-8; 9:9; 10:14). 예수의 새 언약의 봉사가 그렇게 풍성하기 때문에 “그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9:24)]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단 번에 지성소로 들어가”(히 9:12)셨다. (110.1)
 이제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한 죄의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정결한 양심, 죄의 공격을 이기는 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약속된 영원한 기업”(7:22; 9:14-15; 10:19-22)을 받게 된다. 히브리서는 또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우리의 마음에 둘 것이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더 이상 기억치 않으 실 것이라고 확신을 준다(10:16-17). 그리고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0:18)고 결론을 내린다. (110.2)
 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일 모세의 의식법이 “낡은 것”(8:13)으로서 파기되었다면, “그룹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인 언약궤 안에 보관된 도덕법을(출 25:22; 시 80:1; 99:1) 포함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외하는 것인가? 이 중요한 질문은 히브리서 10:5-9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거기서 저자는 시편 40:6-8을 인용하여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8-9)고 하였다. (110.3)
 여기서 히브리서는 모세의 의식법과 영원한 하나님의 도덕 의지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을 하고 있다. 영감된 저자는 시편 40편으로 모세의 희생 제사법의 한시성을 재확인한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40:8)는 본문이 증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세웠다”고 확언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효과적인 언약 관계 즉 그 안에서 하나님의 법과 그의 은혜가 각각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기능을 지킨다는 것을 가르친다. 해그너가 그것을 “새로운 것, 더 나은 것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옛 것이 가리키고 그 길을 예비 한 것 이상의 다름이 아니다”29고 바르게 설명하였다. (110.4)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라고 한 것처럼 아직도 미래에 성취되어야 할 믿음의 여행이다. 과거의 성도들, 특히 아브라함(11:10)은 모두 영혼을 위한 영원한 “안식”과 함께 이 하늘 “도성”을 고대하였다. 히브리서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하면서,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39-40)고 진술한다. 그 온전한 새 언약의 성취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의의 거처”(히 4:9; 11:10; 13-16; 사 65:17; 벧후 3:13)와 함께 올 것이다. (110.5)
 참고문헌
 1 Robertson, The Christ of the Covenants, 272.

 2 J. Murray, in The New Bible Dictionary, ed. J. D. Douglas (Grand Rapids, M; Eerdmans, 1979), 266.

 3 Dale C. Allison, The Sermon on the Mount: Inspiring the Moral Imagination (New York: Crossroad, 1999), 19.

 4 Donald A. Hagner, Matthew 1-13, WBC, vol. 33A (Dallas: Word Books,1993), 1x. 특별히 유대인 학자인 David Fusser의 심도 있는 논문인 “Hillel and Jesus”를 참조하라. Hillel and Jesus: Comparative Studies of Two Major Religious Leaders, ed. J. H. Charlesworth and L. L. Joh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97), 71-110.

 5 Hagner, Matthew 1-13, WBC 33A, Lxxi.

 6 Ibid., lxxii.

 7 Donald A. Hagner, Matthew, 14-28, WBC, vol. 33B (Dallas: Word Books,1995), 647.

 8 Hagner, Matthew 1-13, WBC 33A, 103; 이것도 참조하라. Steven L. McKenzie, Covenant (St. Louis, Mo.: Chalice Press, 2000), 95.

 9 M. E. Boring in NIB 8:198.

 10 Hagner, Matthew 1-13, WBC 33A, 102.

 11 Ibid, 132.

 12 Ibid., 323.

 13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rev. ed. (New York:Macmillan, 1969), 4041.

 14 Hagner, Matthew 1-13, WBC 33A, 324.

 15 E. G. White, Desire of Ages (Mountain View, Calif.: Pacific Press, 1940), 347.

 16 Walton, Covenant: God’s Purpose, God’s Plan, 163.

 17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400.

 18 Oscar Cullmann,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3), 152; 또한 Early Christian Worship (London: SCM Press, 1969), 92.

 19 L.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 Eerdmans, 1977), 408-409.

 20 Hagner, Matthew 1-13, WBC 33A, 329. 다음도 참조하라. M. E. Boring, in NIB, 8:278. 그는 “문제는 기독론적이다”라고 설명하였다.

 21 See “Shabbath,” The Mishna, ed. Herbert Danby (Oxford: Clarendon Press,1967), 99-121.

 22 D. C. Sim, The Gospel of Matthew and Christian Judaism (Edinburgh: Clark, 1998), 137.

 23 Ibid., 138.24. M. Boring in NIB, 8:443, on Matt. 24:20.25. S. L. McKenzie, Covenant (St. Louis, Mo.: Chalice Ptess, 2000), 88.

 24 Ibid., 89.

 25 E. G. White, Signs of the Times, July 4, 1892; SDABC. ed. F. D. Nichol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57), 7:377에 인용.

 26 Ibid., 89

 27 E. G. White, Signs of the Times, July 4, 1892; SDABC. ed. F. D. Nichol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57), 7:377에 인용.

 28 Kaiser, Toward an OT Theology, 268.

 29 D. Hagner, Hebrews, NIBC (Peabody, Mass.: Hendrickson, 1990), 124. (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