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6 장 신약에 나타난 새 언약
 모리스(Leon Morri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는 단지 한 억압적인 법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안식일 제도 전체를 반대하는 반 안식일 입장을 채택한 것도 아니다. 그는 그의 행동이 이 제도의 원래 목적을 성취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 .그가 방금 한 것과 같은 자비의 행동은 단지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19 (102.3)
 예수께서는 또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그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비볐다고 정죄함으로 안식일 계명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였다고 고발하셨다(막 12:1). 그들은 마치 배고픈 다윗이 거룩한 떡을 취하기 위해 성소에 들어간 것처럼 절박한 필요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만일 메시아 왕의 표상인 다윗이 절박한 필요 때문에 토라의 법을 어길 수 있었다면(레 24:5-9), 참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그의 메시아적 목적에 종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배고픈 제자들의 필요가 그들의 안식일 규례의 문자를 따르는 것보다 더 절박하다고 선언하심으로써 그의 제자들을 옹호하셨다. 해그너는 “만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율법의 문자를 어길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면, 더 위대한 다윗의 자손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경우는 얼마든지 더 허용될 수 있다”20고 설명하였다. (103.1)
 마태도 “쉬라”는 계명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모세의 율법을 추가하여 언급 한다(12:5-7). 이런 경우들을 통해 특별한 경우에는 다른 이들에게 구속적 안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원칙의 설정된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자비가 제사보다 중요하다는 호세아 6:6을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비난 할 때 적용하지 않았던 핵심 원칙이다(마 12:7). 그들은 메시아적 인자이신 예수께서 또한 “안식일의 주인” 곧 안식일 계명의 진정한 해석자요. 거룩한 은혜의 쉼의 시여자(12:8; 11:28-29)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103.2)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는 이야기에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2:10)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고 하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안식일 계명의 “합법성”을 유지하면서도 바리새인들의 수많은 안식일 규례들(halakôt)의 피상적 본질을 드러내셨다.21 (103.3)
 데이빗 심(David C. Sim)은 마태복음에 대한 그의 세밀한 연구에서 마태에게 “안식일 법은 유효한 것이었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었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에서는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22고 결론을 내렸다. 심(Sim)은 마태복음 24:20로부터 “마태의 기독교 유대 공동체는 충실하게 안식일을 지켰다고 유추하였다. 왜냐하면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오심이 어떤 경우에도 이전의 모세법을 무효화 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으며, “예수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심으로써 율법 해석에 대한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하셨기”23 때문이다. (104.1)
 또한 보링(M. E. Boring)은 “마태의 교회는 아직 토라 준수자들”24이라고 확인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 유대인들은 유대 전통에 따라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모본을 보이신 대로 지켰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안식일 계명을 범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 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안식일의 거룩한 목적에 대해 그의 메시아적 해석을 제공하셨다. (104.2)
 그리스도: 새 언약과 새 성례전의 창시자
 공관복음은 한 목소리로 예수께서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을 보여준 약속된 메시아임을 선언한다(사 35:5-6; 61:1; 마 11:2-6; 눅 4:16-21을 비교하라).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새 언약의 시대 즉 메시아 시대에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행하셨다.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침으로 이스라엘을 섬기는 이사야 53장을 성취하는 그의 종으로 보내셨다(막 10:45). 아버지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이 자기 희생은 새 언약을 이루는 자가 행하는 결정적인 선행이다. (105.1)
 예수께서 “언약” 이란 단어를 사용하신 유일한 때는 네 번 기록되어 있는 그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 때이다(마 26:28; 막 14:24; 눅 22:20; 고전 11:25). 누가와 바울은 “이 잔은 내 피로 드리는 새 언약 이니라”는 더 긴 표현을 사용한다.25 예수에 의해 유월절 의식이 성 만찬 예식으로 바뀐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마태복음은 훨씬 더 길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105.2)
 “언약의 피”라는 공식은 모세가 “이는 야훼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의 피를 뿌릴 때 있었던 시내 언약의 비준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곧 있을 그 자신의 피 뿌림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는 언약을 성립하고 성취하는 수단으로 간주하셨다. 맥캔지(McKenzie)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나타내는 구속적 의미에 대해 “어린 양의 피는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을 보호하는 표였다”26고 바르게 유추하였다. (105.3)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오는 “많은 이들을 위한”이란 표현은 이사야 53장의 메시아 예언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그 장은 고난당하는 “야훼의 종”의 비참한 죽음이 “많은 사람의 죄를 지”(12절)는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목적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으로 인해 성만찬은 기념적인 식사 이상의 것이 되었다. 그것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참여하는 것”도 의미한다(고전 10:16-17 참조). (106.1)
 “새 언약”(눅 22:20; 고전 11:25)이란 표현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한 예레미야의 “새 언약” 이란 약속을 암시한다. 그것은 최고로 자비로운 하나님의 행위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은 요한계시록에서 28번이나 높이 들린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함으로써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묘사는 고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갱신되었음을 의미한다. (106.2)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과 나누는 구원의 교제가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로 세워졌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성만찬을 경축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또한 새 언약은 아직 그 마지막 영광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시적인 영광은 “그가 이를 때까지”(마 26:29; 고전 11:23-26; 롬 8:18-23) 아직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종말론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축복과 저주는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마 25:31-46 참조). (106.3)
 바벨론에 있던 이스라엘의 포로들이 예레미야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고대하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가 영광 가운데 돌아오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모든 성도들이 다시 만나고, 새 땅을 기업으로 받고, 낙원의 광채 가운데에 다시 젊어지는(요 14:1-3; 벧후 3:13; 계 20-22장) 그 때에 있을 완전한 성취를 고대 하고 있다. (106.4)
 이스라엘 언약법의 한시성
 신약은 히브리서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가장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그 서신은 예수 자신으로부터 들은 자들의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2:3-4)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목회적 “권면의 말씀”(13:22)으로 기록되었다. 그 서신은 아마도 60년대 초기에 기록되었고 로마 시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것 같다(1 클레멘트). (107.1)
 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극렬한 핍박에 노출되어 있었다.(10:32-34).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과 확신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3:12-14). 이 서신의 음조는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10:23)자고 하는 데에서도 분명해진다. (107.2)
 히브리서 6장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제사장직을 통한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언급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이제 하늘 성전에 있는 “휘장 안에”(히 6:19; 레 16:2, 12, 15 비교) 들어가심으로써 영광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셨다. (107.3)
 히브리서 9장은 구원하고 거룩케 하는 이 새 언약을 반복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9:24)셨다. 그리고 다시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9:26)고 언급한다. 우리는 “예수는 이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지성소에서 계신다”27 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07.4)
 신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봉사의 멀리 미치는 결과는 먼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갖게 된 것이며, 그 다음으로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이다(히 10:19-22). (1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