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6 장 신약에 나타난 새 언약
 진정한 토라 이해
 토라의 요구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 여섯 가지 예수의 사례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의도한 목적, 즉 하나님과 인간과 사랑의 교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의는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다. 해그너(Donald Hagner)는 “이것은 예수께서 해석하신 토라의 의, 즉 십계명을 통한 신실한 삶 바로 그것이다”10라고 하였다. 문제는 예수의 토라 해석(“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와 랍비들의 계명 이해(“너희가 들었으나”) 사이의 대조이다. (97.2)
 처음의 두 “반명제”출애굽기 20:1-17의 십계명 중에 있는 살인과 간음의 계명들을 다룬다(마 5:21-30). 예수께서는 이것들을 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것들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즉 마음속에 있는 증오와 분노, 그리고 혼외의 음욕을 금하심으로 더욱 깊게 하셨다. (97.3)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이혼에 관한 예수의 세 번째 토라 해석은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께서는 신명기에 나오는 직접적인 규례를 폐지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마 5:31; 신 24:1과 비교)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가 “의심되는 일”(신 24:1)을 발견하면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의 사유를 “음행”(마 5:32; 막 10:11; 눅 16:18에서는 생략됨)으로만 제한하였다. 후에 예수는 그의 교훈을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고 설명하셨다. 예수께서는 모세를 폐한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창조주께서 “태초 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가졌던 원래 의도를 호소하였다. 모세가 이혼을 양보하여 승인한 것은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으로 돌아가셨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최초의 뜻대로 창조 질서를 회복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모세의 토라를 좀 더 온전히 존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폐하거나 반대하지 않으셨다. (97.4)
 예수께서는 모세의 세대를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새 시대에 “더 나은 질서”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눅 20:34-36 참조).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각 계명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사람의 마음이 행동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셨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책임은 마음과 생각의 비밀스러운 결정에서 시작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영적 이해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에 동기를 부여하는 마음과 영혼의 더 고상한 표준으로 부름을 받는다. 심지어 “맹세”도 사람의 “예”“아니요”의 진정성 때문에 불필요한 것으로 해석되었다(마 5:37). (98.1)
 예수님 자신이 복수하지 말라는 그의 메시아적 교훈에 대한 최고의 모본을 보여주셨다. 해그너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규칙에 대한 기계적인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가 다스리는 라이프스타일을 요구한다”11고 바른 결론을 내렸다. (98.2)
 종합하면, 예수께서 마태복음 5:20에서 요구하신 “더 나은 의”를 48절에서는 “온전함”이란 긍정적인 용어로 표현하셨다. 법적 일치를 넘어서는 이 “더 나은 의”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뚜렷한 특징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랑과 자비의 관계를 경험한다. 그리스도 인의 완전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개념은 도덕적 완전함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과 그의 차별 없는 사랑을 반영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것이 예수의 메시아적 토라의 본질이다. (99.1)
 메시아의 “멍에”
 그리스도의 토라는 말로 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모본으로 정의된다. 기독교 신자들은 근본적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라 는 부름을 받는다. 예수께서는 그의 모든 제자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고 요구하셨다. (99.2)
 예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내게로 오라”고 하셨다. 그는 특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마 11:28)을 언급하셨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사람들을 “수고하게 만드는 ”무거운 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야훼의 토라인 십계명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의로운 행함인가? 해그너는 예수 시대의 배경에서 이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99.3)
그러나 짐이 되는 것은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반대로 율법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의 기쁨이었다. 시편 119 참조), 바리새인들의 과도한 율법주의였다. 그들의 구전 율법의 세목들에 대한 가공할만한 부담이 이 진술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23: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와 비교하라). 바리새인들은 613개의 계명들과 복잡한 궤변들을 포함하고 있는 할라코트를 언급하였다.12
(99.4)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제자도로의 예수의 부르심은 자 유에로의 부르심이라고 보았다. (100.1)
만일 그들이 예수를 따른다면, 사람들은 견고한 자기 법의 멍에, ∙∙∙ 모든 인위적인 도그마들, 모든 부담과 억압, 양심을 억누르는 모든 근심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한 멍에를 받아들이게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행할 힘을 주지 않은 채 아무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 .제자가 되는 것이란 기쁨을 의미한다.13
(100.2)
 영혼에게 “안식”을 주시겠다는 예수의 약속은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 33:14). 핵심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먼저 그에게로 부르시고, 오직 그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그의 멍에를 매어 달라고 요청하신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영혼을 위하여 만족스러운 안식을 주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에게로 나오는 모든 이들에게 메시아적 축복을 주시는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는 달리, 그리스도가 제안하는 “멍에”는 율법에 대한 가장 분명한 해석인 그 자신의 교훈이다. (100.3)
 그것은 팔복산에서 설교하신 바와 같다(마 5:17, 20). 예수께서는 이 진리를 되풀이 하여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그는 “토라를 순종하는 제자가 되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마태복음에서 처럼 그의 교훈을 통하여 해석된 토라 즉 나의 멍에(23:8, 10과 비교)이었다.”14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눌 때, 그가 짐을 지신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영혼에게 거룩한 안식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길을 걸으면(렘 6:16 참조), 그들에게 “네 영혼을 위한 안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의 화평, 우리 자신과의 화평, 그리고 그와 그의 계명들과 나누는 교제 안에서 얻는 샬롬(shalom)을 주신다. (100.4)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복음 진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이다. 한 저자는 거기에 포함된 실존적인 책무를 다음과 같이 간파하였다.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의 집행이다. 그것으로써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 함께 언약의 관계를 맺는다. 진정한 믿음은 삶이다.”15 그러므로 “언약”에 대한 성서적 개념은 개념 그 이상이다. 그것은 구현된 실체, 즉 부활하신 구주와의 살아 있는 관계, 다른 이들에게 축복이 되는 변화시키는 경험이다. 모세의 토라에 대해 월튼(John Walton)이 바른 설명을 하였다. “우리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언약의 토라를 온전히 성취하는 새로운 토라로 제시하시는 것을 보고 있다 ∙∙∙ .그리스도는 새 언약 안에서의 새로운 토라이시다.”16 (101.1)
 예수와 안식일
 혹자들은 몇몇 유대 학자들이 예수께서 실제로 율법을 파기한 사실을 전혀 찾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17 예수께서 안식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을 거절하셨다고 해석한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38년 동안 병자였던 사람을 안식일에 어떻게 기적적으로 치유하셨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5장). 안식일을 어겼다는 비난에 대해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대답하셨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요 5:18)이었다. 그리고 다시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요 9:16)고 하였다. (101.2)
 예수께서는 그의 메시아로서의 안식일 준수를 방어하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니라.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막 2:27-28)고 하셨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은 이 구절들로부터 예수께서 “안식일 비 준수,” 즉 안식일 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정당화하셨다”18고 결론을 내렸다. (102.1)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예수의 주장은 거룩한 안식일 계명의 폐지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안식일 계명을 바르게 해석할 그의 권위로써 안식일에 대한 그의 “주권”을 주장하신 것이다. 심지어 그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도전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요 7:19, 23).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