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6 장 신약에 나타난 새 언약
 “신약” 이란 표현은 “언약”을 뜻하는 라틴어 테스타멘툼(testamenturn)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란 이제 그리스도 사건과 동일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과 신약의 신학적 관계, 즉 이스라엘과 교회의 신학적 관계는 많은 이들에게 난처한 문제임이 입증되었다. 혹자들은 신구약의 상관성에 관한 문제를 기독교 신학의 영구적인 문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중심적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구약은 인간과 맺은 다양한 하나님의 언약과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있어 온 많은 언약 갱신을 제시하고 있다. (91.1)
 로벗슨(O. Palmer Robertson)은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시려는 야훼의 목적은 ∙∙∙ 좌절되지 않을 것”1이라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의 신비가 이스라엘이 실패할 때마다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주시기 위해 마음에 더 큰 목적을 가지고 그들과 새로운 언약 관계의 체결을 주도하신 것을 설명해 준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사 42:6; 49:6 비교)이 되게 하시리라고 예언하였다. (91.2)
 머레이(John Murray)는 이사야의 메시아 중심 언약 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메시아 그 자신이 언약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과 규정들은 너무나 밀접히 메시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 그 자신이 이 축복들의 화신이고, 언약이 보증하는 그의 백성과 함께하는 야훼의 임재이 다.”2 (92.1)
 예수의 기별의 완전한 새로움
 사복음서에서 발견되듯이 예수의 교훈의 새로움은 당시 유대주의의 역사적 배경에 놓으면 훨씬 더 분명해진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더 위대한 모세로서 토라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해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산 위에서”(마 5:1) 한 예수의 교훈은 메시아적 토라이다. 마태가 처음 네 장에서 모세 표상학을 확대해 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앨리슨(Dale C. Allison)은 “모세와 대응한 것은 예수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이며 그를 거룩한 계시[마 7:29을 언급함]에 대한 집행자로 세우기 위함”3이라고 지적하였다. (92.2)
 마태의 중심적인 신학적 주제는 다윗의 왕가로부터 온 왕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 안에 오셨으며,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마 1:1, 21-23; 2:1-6; 4:17, 23).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4는 것이다. 메시아 왕으로서의 이러한 예수의 신원이 그의 권위 있는 토라 해석, 영육의 치유, 그의 흘리신 피를 통한 이스라엘과의 언약 갱신(마 26:28) 등을 결정한다. 예수께서는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기적적으로 치유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실체를 드러내셨다(마 11:46; 사 35:4-6; 61:1). (92.3)
 예수께서는 그 자신을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마 9:17) 이스라엘의 “신랑”(마 9:15)으로 소개하셨을 때, 복음 기별의 전적인 갱신을 표현하셨다. 해그너(Hagner)는 이것을 “복음의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 즉 메시아 예수에 의해 명확하게 해석된 율법과 함께 보존된다”5고 설명하였다. 예수의 기별은 모든 유대인들을 “진정한 유대인이 되어 참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형성하는” 이스라엘의 언약의 사명을 경험으로 성취하라고 초청하고 있다.6 (93.1)
 토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아적 해석
 예수는 모세의 토라를 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요구를 확대하였다. 그는 각 계명을 하나님의 원래 의도의 조명 아래에 둠으로써 그것을 완전히 바꾸었다. 마태복음에서 한 바리새인이 “선생이여,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라고 질문함으로써 토라에 대한 예수의 지식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고 대답하셨다. (93.2)
 예수께서는 모세의 두 계명들을 인용하셨다. 하나는 신명기 6:5에서 이고 다른 하나는 레위기 19:19에서이다. 이 두 계명은 토라의 성취를 위해서는 모든 사랑의 동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스스로 두 개의 사랑 계명을 창안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토라로부터 인용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두 사랑의 요구들을 같은 수준에 놓으며 전체 토라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표현하는 근본 계명으로 격상하심으로써 바리새인들을 놀라게 하셨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가 달려 있다.” (94.1)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만 율법과 선지자는 그 궁극적인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토라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해석이었다. 그의 새로운 조망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프로그램으로 작동하였다. 해그너(David A. Hagner)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였다. (94.2)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이중의 사랑 계명이 없이는 율법의 계명도 선지자들의 교훈도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다. 황금율을 언급하는 마태복음 7:12에서는 그 순서를 반대로 하여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니라”로 말한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니라”(to be)는 곧 “성취하라”(to fulfill)이다(롬 13:10“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와 비교하라).7
(94.3)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그 자신에 관한 잘못된 생각을 분명하게 부인하셨다. 그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고 하셨다. 이것은 모세의 토라를 향한 예수의 완전하고 확고부동한 성실함으로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선언을 메시아적 권위를 지닌 말로 강조하였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그 위에 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토라의 계명들을 가르치고 변함없이 실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19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편만하던 전통에 반대하여 토라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고 말씀하셨다. (94.4)
 예수께서 토라를 승인하신 이 한 문단(마 5:17-20)이 이어지는 그의 여섯 가지 교훈(21-48절)을 해석하는 안내 프로그램의 역할을 한다. 20절이 분명히 나타내듯이 소위 이 여섯 가지 “반명제”는 토라 그 자체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관습과 대립되는 것이다. 이슈는 예수의 토라 해석(“그러나 나는 이르노니”)과 모세의 율법에 대한 랍비들의 전승(“너희가 들었으나”, 21, 27, 31, 33절 등) 사이의 대립이다. 해그너(Donald A. Hagner)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선명하게 정리하였다. “예수께서 오해를 바로 잡으신 것은 처음에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토라를 취소한 것이 아니라 토라의 참된 의미를 제시한 것이다.”8 (95.1)
 사랑의 “온전한” 관계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 언급된 토라의 요구들을 추상적인 해의법(casuistic laws, 解疑法)들이 아니라 인자하신 아버지의 품성과 뜻의 표현으로 이해하셨다. 그리스도는 모세 토라의 목표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요약하였다.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예수의 말씀이 앞의 43-47절에 나오는 말씀들의 요약과 결론임을 암시한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모두를 위한 무조건적이고 불편부당한 사랑의 “완전함”을 지적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시기 때문이다(45절).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 왕 같은 자유를 누리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모세의 계명을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절)고 확대하였다. 예수께서는 그가 설교하신 것을 실행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다. 그리스도는 토라를 패한 것이 아니라 토라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을 드러내심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확대하셨다. (95.2)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인간을 향한 그의 자비로운 태도는 토라의 요구들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심지어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에 그를 욕하던 강도들 중 믿음을 받아들인 한 사람을 구원하셨다(마 27:44; 눅 23:43). 토라에서 “온전하다”는 의미는 전심으로, 즉 나누이지 않은 마음과 뜻으로,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에게 단심으로 헌신하고, 다시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으며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신 6:4-6; 18:13). (96.1)
 모세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온전한 사람들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이다(창 5:22, 24; 6:9; 17:1; 26:5). 그들의 삶은 언약의 하나님과의 변화시키는 관계속에서 완전한 용서를 받아 그 행위가 완전한 이들이다. (96.2)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모든 인류를 향한 그의 공정한 사랑 안에서 “온전하시다”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제한 없는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확대함으로써 예수의 제자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하고 이방인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하게 된다(마 5:47). 마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의 사랑을 조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하신 것처럼 우리의 ”온전함을 무조건적 사랑의 관점으로 나타내었다. 누가는 같은 “온전함”“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고 하면서 “자비”의 관점으로 나타내었다. (96.3)
 좀 더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는 우리가 전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삶, 봉사,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권능과 왕권을 다시 정의하신 하나님께”9로 향하기를 요구하신다. 오직 그 때에만 이스라엘은 “세상의 소금,”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