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편 13편 3, 4절). (75.2)
 사람이 자기 연민에 빠지면 모든 것을 비관하게 되고 모두를 원망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남는 것은 낙심과 우울뿐이다. 얼굴을 땅에 묻고 탄식하던 시인은 일어섰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처절히 느끼며 땅 위에 무릎을 꿇고(on his knees) 얼굴을 하나님께 향한다. (75.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My God), 저를 보소서(look! 히브리어:하삐타). 그리고 대답해 주소서.” 원망이 애원으로 바뀌고, 막연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제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보면 연민(휴機)에 빠져 낙심만 하게 되고 우울에 빠지니, 하나님이 저를 보시고 최선껏 응답해 주소서. 그리고 내 눈에도 빛을 비추사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소서.” 사람의 눈은 발광체가 아니므로 빛이 비쳐야 사물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75.4)
 그렇다. 연금사(緣金師)가 금속의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풀무불이 얼마나 뜨거워야 하고 불속에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는지를 알듯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자녀에게 필요한 시련의 적절한 길이와 고난의 깊이도 알고 계신다. (76.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편 71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그것은 오랜 시련이 끝나고 “단련하신 후”에야 깨닫게 되는 정금의 간증인 것이다. (76.2)
 이와같은 정금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오랜 시련을 당하면 정신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을 함께 재촉하는 사망의 잠으로 빠져들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고린도후서 7장 10절)이기 때문이다. (76.3)
 나의 이 불행과 불운을 보고 기뻐할 대적들 때문에 에이듯 상했던 자존심도 이젠 별것 아니다. 나의 대적이 곧 하나님의 대적이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하여 아셔서 하실 일이니 내 마음 상할 필요가 없다. (76.4)
 땅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이렇게 땅에 무릎을 꿇고 기도로 만사를 하나님께 의탁하고나니, 이제는 남은 시련의 길을 갈 때,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이사야 40장 31절)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 선교지에서 순교한 엘리옷(Jim Elliot)의 말처럼, “무릎으로 전진하는 성도는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 (76.5)
 땅을 밟고 일어서서
 무릎을 꿇었던 시인은 발로 일어섰다(on his feet). 일어서기 위하여 꿇었던 무릎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서려거든 무릎을 꿇으라”는 짐꾼의 비결을 배운 것이다. 믿음으로 드린 기도가 좌절을 이긴 것이다. 언약으로 보증된 하나님의 성실하신 자비(loving-kindness. 히브리어:헤세드)에 모든 것을 맡기고나니 오늘의 염려와 내일의 불안에서 모두 놓여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자아(自我)의 포기(暴棄)가 인간적인 자포 자기伯暴自棄)를 정복한 것이다. 언제나 바라던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시고 기다린 것보다 더 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회상이 저절로 감사의 찬송이 되어 나온다. (77.1)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시편 13편 5, 6절). (77.2)
 믿음으로 말미 암아 살리라
 “언제까지니이까?”를 울부짖으며 견디기 어려워 몸부림쳤던 다윗의 시련은 마침내 끝났다. 깎이고 연단된 목동 다윗은 약속된 대로 왕위에 올라 다윗 대왕이 되고 그가 철석같이 의뢰한 하나님의 헤세드(자비)에 따라 “다윗의 자손 예수”를 세상에 탄생시키는 극치의 영광에 이른다. (77.3)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깊어가는 고난에 시달리는 이 세상의 “언제까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78.1)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까”

   (하박국 1장 2절). (78.2)
 다윗의 그 지치도록 지루했던 그 “언제까지”에 명백한 대답을 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다시 대답을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78.3)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장 2~4절). (78.4)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자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장 37~39절). (78.5)
 그토록 절절(切切)했던 다윗의 그 “언제까지”는 마침내 “다윗의 자손 예수”를 세상에 탄생시키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적 성취를 보았다. 또다시 지체되는 “다윗의 자손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죄로 피곤해진 이 세상의 “언제까지”는 어떻게 그 대답을 찾을 것인가? 다윗이 끝까지 의뢰했던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헤세드)에 연약한 인간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바로 그 대답인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이다. (79.1)
 강가에서

 이택제


 가을 햇살 잔잔한 강물

 빛으로 건져내어

 둘러편 바람벌에

 침묵하는 갈대여


 들바람 강바람에

 외다리 학(鶴)으로 서서

 머리카락 은백(隱白)으로 푸는

 묵도하는 저 갈대여


 앞산 뒷산

 넉넉히 두르고

 강기슭 빈 배 하나 놓아두고

 무언(無言) 무한(無限)

 수(納)를 뜨는 계절 앞에


 무심히

 갈잎 스치는 소리를

 말씀으로 듣는다. (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