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에게만 떨어질 위험이 따르듯,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낙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희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그 믿음이 약하질 때 더 깊은 낙망에 빠지는 것도 그 까닭이다.

 — 시편 13편(71.1)
 언제까지, 언제까지나?
 현실이 너무 괴롭고 너무 어두워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신앙을 가지고서도 별수없이 인내의 한계에 이르러 자포자기의 나락(奈落)에 영원히 떨어져버릴 뻔한 인간의 나약함이, 굴곡이 심했던 다윗의 인생길의 노래인 시편 여기저기에 탄식으로 명각(銘刻)되어 있다. (71.2)
 이스라엘의 숙적인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돌팔매로 넘어뜨려 대승을 거두고 개선한 목동 다윗은 단번에 국가적인 영웅이 되어 백성의 칭송을 한몸에 샀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러나 생각이 옅은 부녀들이 경망스럽게 외쳐댄 환영 대회 구호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울왕의 영혼에 시기의 불을 질러, 마침내 그는 다윗에 대한 미음과 두려움으로 살기 등등해진 미친 사람이 되고 만다(사무엘상 18장 6~29절 참조). (71.3)
 청천 벽력이라더니, 모처럼 푸르러지고 드높아진 무명의 시골 목동 다윗의 인생 하늘에는 갑자기 먹구름이 덮여 불안과 공포의 뇌성이 일고 폭우가 쏟아진다. 화려하지 못했어도 평화롭게 살아온 시골 청년 다윗은, 살기 위하여 사냥꾼에 쫓기는 한 마리 사슴처럼 숨을 헐떡이며 몸 숨길 곳을 찾아 산과 들을 달리고 바위 동굴을 찾으며 골짜기를 헤맸다. (72.1)
 들짐승처럼 쫓기기 십여 년,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피곤하여 살기에 지친 다윗은 울고 또 울었다. “나의 유리(琉璃)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편 56편 8절). (72.2)
 곰과 사자도 겁내지 않고 골리앗 앞에서도 떨지 않던 바윗돌 같은 젊은이 다윗은 마침내 그가 왕이 되리라던 화려한 약속도, 기름부음받을 때의 뜨거운 감격도 모두 잊은 채 살기에 지쳐 고개를 떨구고 탄식하며 몸부림친다. (72.3)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편 13편 1, 2절). (72.4)
 처음의 두 절에서 애타는 그 “언제까지”(히브리어:아드 아나)가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어 그 군급함을 말해 주고 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서 체념과 좌절의 수렁에 빠진 채 마지막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애절한 그 “언제까지”인 것이다. (73.1)
 얼굴을 땅에 대고
 날이 새고 달이 가고 사철이 오고가고 해가 바뀌어도 나아질 기색이 없이 더해만 가는 시련의 나날에 지치고 지친 다윗은 목을 숙인 채 얼굴을 땅에 대고(on his face) 네 마디의 “언제까지” (how long)로 시작되는 낙망의 애가{哀歌)를 부른다. (73.2)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에게만 떨어질 위험이 따르듯,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낙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더 높은 희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그 믿음이 약해질 때 더 깊은 낙망에 빠지는 것도 그 까닭이다. 하늘로부터 갈멜산 꼭대기에 불이 내려오게 하고, 3년 반 동안 닫혔던 하늘을 열어 비가 오게 한 믿음의 거인 엘리야였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기대대로 극적인 종교개혁이 온 나라에 번지기는커녕, 자신의 생명마저 위협을 받자 낙심 천만하여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열왕기상 19장 3, 4절)는 어이없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73.3)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도 쉽사리 좌절의 웅덩이에 빠져버리는 연약한 인간의 낙망의 내리막길 네 단계가 네 차례나 반복된 “언제까지”에 엉켜진 사연이다. (73.4)
 첫 번째 단계: 하나님마저 나를 잊으셨구나. 아주 잊으시고 영영히 버리셨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 온다. 여호와여, 언제까지 이렇게 버려두시렵니까? (74.1)
 두 번째 단계: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거나 버리셨기 때문에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나님이 돌아보신다면 이럴 수가 있나? 갑자기 천애(天通)의 고아가 된 느낌에 사로잡혀 자기 연민(憐憫)에 빠져버린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렇게 제게서 얼굴을 숨기려 하십니까? (74.2)
 세 번째 단계:하나님마저 나를 이렇게 잊으시고 돌보지 않으시니 이제는 내 갈 길을 내가 가고 내 현실을 내가 처리할 수밖에 없구나. 막상 이런 생각, 곧 경영(히브리어: 아쉬트 아초트)을 마음속에 하고보니 마음이 개운해지기는커녕 천근 만근 근심이 가슴을 눌러 더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오, 하나님 이것도 아닙니다. 이런 근심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합니까? (74.3)
 네 번째 단계: 이런 지경에 빠진 자신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힐뿐더러 아직도 다 죽지 않은 자존심이 아프도록 상한다. 자신을 이 지경에 몰아넣은 대적들이 지금의 자기를 보고 박장 대소(招掌大笑)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다시 마음이 상한다. 이 지경에서도 안간힘을 다하여 꿈틀거리는 자존심의 마지막 고군 분투(孤軍奮鬪)에 휩쓸려 들어간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자존심 상하는 현실에 버려져야 합니까? (74.4)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그것은 오랜 시련이 끝나고 “단련하신 후”에야 깨닫게 되는 정금의 간증인 것이다.
(74.5)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언제까지”를 푸념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도보고, 자구책(自救策)을 궁리하기도 하고, 대적들을 생각하며 울분을 터뜨리던 시인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하나님의 손을 놓고 낙망의 급류에 휩쓸려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