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10. 확증과 최후의 심판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에 관한 당신의 비유에서 타인을 용서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자발성 혹은 비자발성이 어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셨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으셨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요지는 신자들이 타인을 용서하는 일반적인 선행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속주로부터 받은 동일한 자비를 타인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3). 따라서 신자들의 용서의 정신은 하나님의 은혜의 표요 하나님 자신의 용서의 반영이며, 또한 이것은 최후의 심판에서 결정적이다. (154.3)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기적을 행하고, 혹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같은 위대한 일이 최후의 심판에서 한 사람의 생존을 보증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강조 첨가). 간단히 말해서, 행위에 따른 심판은 믿음을 통한 칭의가 아닌 불법의 삶과 충돌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세상의 심판자로 지명하셨다(행 17:31). 그가 우리의 구속주요 주님이시며 우리의 대속자요 본보기이시기 때문에 행함에 따른 칭의와 심판은그분 안에서 완벽한 조화 가운데 연합된다. 아이 번 T. 블레 이 즌(Ivan T. Blaze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진술했다: (155.1)
성경의 실제 자료에 의하면, 칭의가 우리를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믿거나 혹은 심판이 우리를 구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에 연결시키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거짓이다. ∙∙∙ 종말이 올 때,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실한 증거에 의해 입증된 칭의의 실체에 대해 평가하고 증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칭의와 심판은 긴장이나 혹은 모순의 관계가 아닌, 시작과 완성의 관계에 서 있다.3)
(155.2)
 확증과 최후의 심판
 행위에 따른 심판이 행위나 혹은 율법 준수에 근거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받은 신자는 최후의 구원에 대한 확신에 찬 소망을 가진다. 이것이 로마서 5장에 나타난 바울의 가르침이다: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 2, 강조 첨가). (155.3)
 바울은 미래적 구원의 확실성을 현재적 구원의 실체에, 우리의 미래적 칭의의 확실성을 현재적 칭의의 실체에 두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강조 첨가; 참조 17절).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실 때, 우리가 그분 안에 남기만 한다면 최후의 심판에서 그가 우리를 의롭게 하실 것이라는 완전한 확증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현재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심판에서도(also)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also) 의로 말미 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강조 첨가). (156.1)
 바울은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삶과 죽음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자유케 하셨다고 설명했다. 바울은 마지막 심판 장면을 미리 가리키는 이런 중요한 말로써 구원의 확증에 관한 이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었다. (156.2)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3-35).
(157.1)
 바울은 하나님의 칭의의 행위와 예수의 중보를 단순히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심판과도 결부시켰다. 이사야 50:8, 953:11, 12의 메시야적 예언들은 하나님의 변호를 신자의 현재적 경험에서 정죄와 반대편에 두었다. 바울은 로마서 8:33-35에서 미래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의 성취를 미래적 심판에도 적용하였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칭의를 위한 기초가 된다고 말했다(참조 롬 5:9, 10). 감히 그들을 고소하고 정죄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면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죄나 우리의 결점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고소하거나 정죄하지 못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도덕적 완전도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암시했다. (157.2)
 바울은 무엇이 택함 받은 자를 고소하고 정죄할 것인지를 묻지 않고 누가 고소하고 누가 정죄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나 혹은 도덕적 의가 자기들을 의롭게 할 것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칭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그리고 자기들을 위해 중보할 예수후 오로지 가리킬 뿐이었다. 신자들의 최후의 칭의와 변호에 대한, 근거는 그들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하나님과 예수가 무엇을 하셨느냐에 놓여있다. 바울은 절대적 확실성을 제공하기 위하여 이 하나님의 행위들을 찾았다. 그 어떤 것도 신자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부터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나 미래의 그 어떤 것이라도 말이다(롬 8:38, 39). 바울은 심판에서 신자들의 최후의 방면에 대해 너무 확신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롬 8:30)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참된 신자들에 대한 구원의 궁극적 확실성을 표현한다. (157.3)
 이생에서 우리가 예수의 죄 없는 완전의 모본에 필적할 수 없기 때문에—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으로 그것을 반사할 수는 있지만—최후의 평가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확신으로 그 진리의 순간을 고대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히 13:8)기 때문이다. 엘렌 화잇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에 대하여 생각하실 것인가를 염려하여야 한다. 그대들은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받으신 바 되었다.”4) 이런 태도는 최후의 심판을 위해서도 중요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물론 모든 피조물의 열렬한 송영에 참여하게 한다: (158.1)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158.2)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 그리고 인류의 행복를 위하여 우리가 아무리 선한 것을 이룬다 할지라도 우리의 궁극적인 고백은 이러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요 15:5과 비교해 보라). 구속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가치에 대해 자만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일곱 겹으로 된 찬양을 부를 것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그들은 모든 것의 하나님의 값없고 전능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영원한 경이로움으로 깨닫는다. (158.3)
 누가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과 그의 아들의 대속적 희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드러내셨다: (159.1)
(이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2-36).
(159.2)
 미 주
 1) 엘렌 G. 화잇, 믿음과 행함, 66.

 2) G. C. Berkouwer, Geloofm Rechtvaardiging (Kampen: Kok, 1949), 108; 저자의 번역.

 3) Ivan T. Blazen, “Justification and Judgment,” 70 Weeks, Leviticus, Nature of Prophecy, Daniel and Revelation Commentary Series, F. B. Holbrook, ed. (Washington, DC: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86), 3:343, 344, 강조 첨가.

 4) 엘렌 G. 화잇, 가려뽑은 기별, 2:32, 33. (1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