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10. 확증과 최후의 심판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는 행위에 따른 최후의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최고의 예증은 칭의를 구원의 뿌리로, 그리고 성화를 구원의 열매로 묘사한다. 만약 구원에 대한 신자의 확증이 하나님의 칭의의 선물에만 달려 있다면, 성화된 생애는 우리의 구원의 확증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147.1)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제5장 “구원에 대한 바울의 확증”을 다시 읽으면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대는 엘렌 화잇이 칭의를 우리의 “천국을 향한 권리(title to heaven)”라 하고, 성화를 우리의 “천국에 대한 적합성”이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그 거룩한 곳을 위해 변화시키는 적합성을 거절하면서 천국을 향한 권리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 특별히 신약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와 사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행함에 의한 심판을 상호 배타적으로 사용하였는가? (147.2)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자들에게, 그는 제자도로 초청하신다. 당신의 사도들을 향한 그의 최후의 명령에서 그는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 20, 강조 첨가). (148.1)
 우리의 구속받은 삶의 열매들이 예수와 우리 동료 인간들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표현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열매들이 우리의 영생의 기초를 구성하진 않는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유일하게 가치있는 것은,’ 「개역한글판」에는 나타나지 않음—역자 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강조 첨가); 그러한 산 믿음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이시라는 삶의 새롭게 함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칭의나 성화 혹은 영화에 제한될 수 없다. 그 안에서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구원을 얻는다. 문제는 단지 한 가지 질문에 달려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그의 비유에서 이것을 가르쳤다(요 15:1-8). 이 비유는 우리의 현 주제에 대해 대단한 중요성을 띤다. 그것은 그분과의 신앙 관계에 들어간 모든 이들을 위한 심판의 중대한 측면을 담고 있다. (148.2)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49.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 5:5, 6, 10).
(149.2)
 이 비유는 우리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대신 믿음이 매일 매일 그 관계를 새롭게 하도록 개인적 책임을 부여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게 되길 원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즉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것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기 때문이다. 예수 없이 우리는 유혹과 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은 그분 안에 그들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remaining)에 관하여 신자들을 평가할 것이라고 예수께서 가르치셨다. (149.3)
 예수는 회개한 세리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용서를 칭의와 동일시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 18:14, 강조 첨가). 그는 회개한 세리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을 때 칭의를 구원과 동일시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눅 19:9). 다른 한편, 예수께서는 또한 당신이 재림하실 때 심판자로 오셔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고 가르치셨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이게도, 그는 심지어 “나라의 본 자손들[이름뿐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2)고 선언하셨다. 예수에게 있어서 최후의 심판은 구원받지 못한 자로부터 구원 받은자, 위선자로부터 의로운 자의 영원한 분리를 의미했다. 그렇게 분리하는 일은 “세상 끝에” 교회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닌 그리스도의 천사들에게만 위탁될 것이다(마 13:40-43, 49, 50). (149.4)
 예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셨는데(참조 마 22:11-13; 24:50, 51; 25:30), 특별히 양과 염소에 관한 당신의 비유(마 25:31-46)에서 그러하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결여된 사람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과 더불어 유업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자신들의 영광의 근거로서가 아니라 예수를 향한 그들의 사랑의 자연스런 표현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한다(마 25:35-40).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획득할 수 없고, 단지 그것을 상속할 뿐이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강조 첨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오직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승인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택하신 자,” 곧 예수께서 선택하신 자들이라고 부른다(참조 마 24:31). (150.1)
 칭의와 심판에 관한 바울의 신학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곡해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구원의 신학에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집중시키긴 하지만 자신의 복음에 최후의 심판을 포함시켰다. 칭의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구약의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한다. 그는 자신의 사도적 복음의 히브리적 기둥들인 모세, 시편, 그리고 선지자들(참조 롬 4:3, 6-8; 갈 3:11)에게 호소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구원에 관한 신 • 구약의 본질적 통일성을 인식했다. 하나님께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 구속주, 입법자, 그리고 재판관(참조 사 33:22)이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도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고전 1:30)이시다. (150.2)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151.1)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지 않으”시며(롬 2:11; 엡 6:9, 「개역한글판」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로 번역되었음—역자 주),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갈 2:6,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가 더 적절한 번역임—역자 주)고 강조했다. 그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골 3:25)고 말했다. 최후의 심판은 바울의 가르침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그는 최후의 심판이 인간의 행위와 행동을 고려할 것임을 믿었다(참조 고전 3:12-15; 4:5; 갈 6:7-9). 하나님께서는 인간 현존의 실제적인 질에 따라 심판하시지 특별한 언약 백성에 대한 편애에 의해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자신의 서신에서 이 사상을 힘있게 진술했다: (151.2)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 2:6-8).
(152.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행위에 따른 심판 둘 다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믿음과 행함 사이의 밀접한 상호관계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킬 것이다. 그는 믿음의 행위(살전 1:3; 갈 5:6)와 율법의 행위 또는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찾는 것 사이를 예리하게 구분했다(갈 3:10). 바울은 믿음과 행함 사이에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율법의 의(義) 사이의 현저한 대조를 보았다(갈 2:16, 21). 결정적인 요인은 인간의 행위가 믿음으로 말미암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따라서 신학적인 대조는 추상적인 믿음과 인간의 행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느라, 믿음의 행위율법의 행위,” 혹은 자기 의의 행위 사이에 있는 것이다(참조 빌 3:7-9). 이러한 이해는 바울이 믿음 더하기 행함을 통한 구원을 주장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행동하는 믿음을 주장했다. 이 구분은 최후의 심판에서도 역시 사실이다. (152.2)
 바울은 믿음을 단순히 하나의 견해로 간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것을 예수와의 산 관계, 곧 성령을 나누어주고 영혼을 변화시키고, 또 그것을 새로운 삶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채우는 예수의 포옹(embracing of Jesus)으로 보았다(갈 3:2, 5). 그리스도의 영이 이 새로운 삶의 동기가 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 23). (152.3)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은 그의 믿음이 참인지 혹은 단순히 지적확신, 즉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것인지를 드러낸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무한한 능력의 팔을 붙잡는 산 믿음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의 영혼의 유익에 도움이 되게 그렇게 할 수 있다.”1) (153.1)
 그러한 믿음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선한 행위에서 나타난다: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 이 “행함”“율법의 행위” 혹은 자기 의(義)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의로운 자”들은 불쌍한 자들을 향한 자기들의 선한 행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놀라움으로,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주의] 목마르신 것을 보고 [주를]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37, 강조 첨가. 영문에서는 ‘주’(you)라는 표현이 세 번에 걸쳐 나음—역자 주)라고 대답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신자들의 선한 행위가 당신에게 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설명하셨다. 믿음과 예수 사이의 이런 생생한 연결은 신약에서 모든 윤리적 명령의 기초에 놓여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자신의 설명을 마무리했을 때, 그는 이런 도덕적 호소를 했다(1-11 장):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강조 첨가). (153.2)
 개혁주의 신학자 G. C. 베르카우어(G. C. Berkouwer)는 정곡을 찌르는 이해로써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그러므로 행함에 따른 심판은, 그 심오함에서 나타난 것처럼 믿음과 불신에 대한 판결이다.”2) 행위 자체는 최후의 결과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예수와 그의 구원하는 은혜에 대해 이 행위들이 어떤 관계를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위가 믿음으로부터 말미암았는지,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실 수 있다. (154.1)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에서 값비싼 향수를 자신에게 부었던 여인에 대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 가납될 행위의 가치를 보여주셨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10, 강조 첨가). 주기도문 역시 믿음과 행함 사이의 연결을 지적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 15). (1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