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4. 왕국의 원칙들 II (6; 7)
 1. 마태복음 7:1은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1-6절의 문맥으로부터 왜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들을 나열해 보라. 그러고 나서, 성경이나 기타 다른 문헌들을 참조하여 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해서는 안 되는지 다른 이유들도 나열해 보라.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재판관으로 서슴없이 나서는 사람들에게서 분명히 보이는 인격적 특성은 무엇인가? 1절6절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 보기에 뭐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121.3)
 2. 7-11절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들이 끈덕지게 구하기만 한다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암시하는가? 고린도후서 12:8, 9마태복음 26:39-46 등과 같은 성경절들과 마태복음 7:7을 어떻게 관련시킬 수 있을지 설명해 보라. 7절은 산상설교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121.4)
 3. 그 설교에서 12절의 기능은 무엇인가? 12절5:17-20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 (122.1)
 4. 13-27절은 각기 유사한 도달하는 신속히 움직이는 세 개의 영상(映像) 언어들을 제시한다. 이 세 가지 영상 언어들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그들의 공통점을 나열하라. 그런 다음에는 한두 문단으로 이 구절들이 그대에게 남긴 전반적인 인상을 기록하라. 이 구절은 산상설교의 전반적인 기별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122.2)
 5. 이 설교의 결론 부분에 접근해 가면서, 그 설교 전체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읽고, 예수께서 “권세”(29절) 있게 가르치셨던 방법들에 대해 목록을 만들라(성경절도 제시하라). (122.3)
 ■ 말씀을 탐구함
 그리스도인의 관계들
 마태복음 7장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주요 관계—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1-6, 12절)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7-12절)—를 다룬다. (122.4)
 종교에 관하여 진지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그들이 동행이 아주 진지하거나 열성적이지 않다고 보이는 그들의 친구들, 친척들 그리고 동료 교인들을 비판하기가 매우 쉽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걸린 질병이었고, 그 문제는 현대 교회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불행히도 이런 태도는 활력있는 종교에 대해서는 치명적이다. 엘렌 화잇은 그들 자신의 종교적 성취에 대한 만족은 “고상하고 관대한 정서들을 질식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아중심적인 재판관과 좀스러운 스파이들이 되게 만드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비평의 분위기”(산상보훈, 123)를 조성한다고 지적한다. 더글러스 헤어(Douglas Hare)는 판단 기질(judgmentalism)은 “정신의 한 질병”으로서 “그 비평자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실패, 부족, 약점)들을 평가하고 사정(査定)할 자격을 부여해 주는 우월성을 거만한 태도로 취한다”(Hare, 76)고 주장한다. (122.5)
 예수께서는 거만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런 태도를 정죄한다. 그가 완전하라고 명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5:48), 아무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들이 이웃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조언을 줄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게 되기 전에(5절) 먼저 그들 자신의 행위를 깨끗케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3, 4절). 그러면 ‘저 친절한 조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부드러운 자비의 분위기(배경) 가운데서 항상 주어지게 될 것이다(18:23-35; 6:14). 이런 사람들은 아버지에 의해 친절하게 계속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7:2; 18:33, 35). 예수의 말씀들에 비추어, 나는 다른 사람들과 교회에 대해 비평하는 일이 주특기인 설교자들과 신자들, 특히 그 비평자의 태도가 거만하고 풍자적일 때 그들에 대하여 항상 조심성을 갖는다. (123.1)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그들 자신이 보기에 그리스도인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타인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고 훨씬 더 앞서나간 저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번창하고 있다. 예수은, 이런 태도는 치명적인 착각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태도는 인간 본성의 연약성과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 이 두 가지 모두를 간과한다. 모든 인간은 결점과 연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크게 겸손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들 자신을 정직하게 취급해온 겸허한 그리스도인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의 이웃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다(5절). (123.2)
 서로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는 돼지 앞에 우리의 진주를 던지거나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있지 않는가(6절). 그 말씀에 내포된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죄와 공개적인 죄에 대해 판결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바울은 계모와 동거하고 있는 사람을 용인하지 말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고하였고(고전 5:1-5), 예수께서는 복음을 공공연히 멸시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가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마 7:6). (123.3)
 7-11절은 얼른 보기에, 우리가 충분한 끈기를 갖고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무조건적으로 약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험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거듭 거듭 치유를 탄원하는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연약함 가운데 있는 그를 붙들어 줄 것이라는 말밖에 듣지 못했던 바울의 경우가 그러하였다(고후 12:8, 9). 또한, 십자가에 못박힘이란 쓰디쓴 잔이 자신에게서 옮겨지기를 세 번이나 기도하였지만 어쨌든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예수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마 26:39-46). (124.1)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고 그를 따른 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명령은 어떤 것을 구하든, 그리고 그들이 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들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무조건적 약속이라기보다는 산상설교의 문맥 내에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설교를 읽은 후에, 예민한 그리스도인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나타내라는 예수의 요구에 압도되고 말 것이다(5:20). (124.2)
 그리스도의 명령들은 인간적으로는 성취하기가 불가능하다. 그와 같이 하여, 그 명령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용서하시고 능력을 주시는 은혜로 내 몰고 간다. 그리고 우리는 산상설교에 제시된 하나님의 이상을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줄 수 있는 은혜를 오로지 기도로 말미암아서만 얻을 수 있다. 헤어(Hare)가 표현하듯이, “겁에 질리게 하는 산상설교의 요구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들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언제고 우리를 도와주실 채비를 갖추고 계신 하나님을 더욱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Hare, 79). 이런 도우심을 얻기 위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은 결코 내어 쫓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124.3)
 황금률(“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2절])은 그 설교의 문맥 내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그 규칙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요약한 것]”(12절)이라고 말씀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들에 대한 언급은 우리로 5:17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이처럼 5:177:12은 산상설교의 핵심을 일괄하여 다루고 있다. 그 결과, 황금률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석의 요약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5:21-7:11은 그 요약 내에 내재하고 있는 여러 원칙들을 그가 확장하신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125.1)
 그리스도인의 헌신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관련된 세 가지 강력한 종말론적(마지막 때) 예증으로 그의 설교를 마치신다. 두 길(13, 14절), 두 나무(15-20절), 그리고 두 건축자들(24-27)이 그것이다. 마태는 모두 다섯 가지 그의 주요 강론들 중 넷에서 종말 때 주어질 상급들과 형벌들과 관계가 있는 셋으로 이루어진 이런 패턴을 반복할 것이다. 그처럼 10장의 선교사 강연의 세 마지막 단위들(32-33, 34-39, 40-42) 또한 종말론적 상급과 형벌들과 관계가 있다. 13장의 천국 비유들(44, 45-46, 47-50)과 마태복음 24장25장의 예수의 위대한 마지막 때 설교의 끝 부분에 있는 마지막 세 비유들(25:1-13, 14-30, 31-46)의 마지막 세 단위들에 대해서도 그것은 사실이다. 마태복음에서 세 가지 종말론적 경고들의 3개 한 벌 패턴을 따르지 않는 예수의 한 가지 주요한 강연은 종말론적(마지막 때) 상급과 형벌 요소로부터가 아니라 오로지 그 패턴의 삼중 측면으로부터 깨어질 뿐이다. 그와 같이 마태복음 18장(위대함과 용서에 관한 설교)은 중심으로 그들의 이웃을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의 형벌에 관한 비유로 끝을 맺는다. (125.2)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론과 저 마지막 때 실재(實在)에 관련된 윤리적 행동은 모두 교사 예수에 대한 마태의 묘사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것을 본다. 마태는 자기가 전할 기별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의 지도 아래 그는 그의 강조점들을 인상 깊게 만드는 능숙한 방법으로 예수의 가르침들을 배열한다. (126.1)
 마태복음 7:13-27을 구성하는 세 부분의 공통적인 요소는 12절의 황금률에서와 마찬가지로 행함이다. 두 문(門)에 관한 부분에서(13, 14절), 행함에 관한 강조는 명백하지 않다. 사실상, 다른 문맥에서라면, 문들을 참된 신학과 거짓된 신학(혹은 신조)으로 해석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문의 문맥은 결정적인 요소는 옳은 교리를 믿는 것보다는 바른 것을 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처럼 12절에서 마태는 황금률의 실천을 강조하고, 15-23절(특히 21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처럼 두 문은 신학(신조)이 아닌 윤리(행위)와 관계 있다. 설교 부분에 들어있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행하는 사람(5:21-7:12)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큰 의를 갖게 될 것이다(5:20). (1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