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4. 왕국의 원칙들 II (6; 7)
 예수께서 다루신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이 개인적 경건의 본보기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의 기도는 공중 앞에서의 경건의 한 예증이다. 주의 기도의 공적인 성격은 9절의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 가운데 있는 “우리”라는 말의 사용과, 그 기도 전체에 걸쳐서 복수 대명사들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드러난다. (116.4)
 예수께서는 기도를 효험 있게 만드는 것은 기도의 길이가 아니라(7, 8절) 그 기도의 진실성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 위대한 표본적 기도는 논지적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기본적으로 “너희”“우리” 청원들 이 둘로 나뉜다. 이상적인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시작하고, 그러고 난 후에서야 인간의 필요로 옮겨간다. 그와 같이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아뢴 후에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그의 왕국의 임하심을 통해 구원의 계획이 충만히 완성되기를 요구하고, 그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탄원한다(9, 10절). (117.1)
 하나님과 그의 관심사를 아뢴 후에서야 그 기도는 매일의 양식, 죄의 용서, 보호 그리고 구출 등과 같은 인간의 필요에 관한 청원으로 옮겨간다(11-13절). 예수께서는 이 표본적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초점을 다시 하나님께로 맞추셨다. 기도의 초점은 하나님에게 맞춰져야 하는바, 이는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기도들이 하나님과 그 왕국의 더 광범위한 관심사들로부터 신속히 표류하다가 인간과 그들의 욕구와 필요에 중심을 둔 “내게 주소서” 형태로 빠져 버리기가 너무도 쉽다는 것을 발견한다. (117.2)
 이런 필요들과 갈망들이 중요치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것들의 제 위치에 놓여져야 한다. 예수께서 이제 6장의 후반부에서 바로 바른 시각이란 주제로 향하신다. (117.3)
 그리스도인의 목표와 우선 순위
 마태복음 6장의 전반부는 “은밀한” 장소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적인 생활을 대체로 다루고 있는 반면에, 후반부는 물질적인 관심사들을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 문화와 달라야 하고, 개인적 경건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자들의 위선과는 달라야 하며(1-18절), 그리고 비신앙인들의 물질만능주의와도 달라야 한다고 요구하신다(19-34절). 그 장의 시작 부분 때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지만, 후반부에서는 이방인들의 가치 체계를 버리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32절). (117.4)
 19-24절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세 쌍의 대조(對照)—땅 대(對) 하늘(19-21절), 어둠 대 빛(22, 23) 그리고 돈 대 하나님(24절)—를 제시하신다. 첫 번째 대조는 우리에게 두 보물을, 둘째는 두 눈(眼)을 그리고 셋째는 두 주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세 가지 모두 사람의 목표와 우선 순위 문제를 다루고 있다. 1-18절이 다루고 있는 세 가지 “헌신들”의 요점은 “우리는 세상의 칭찬보다는 아버지의 칭찬을 구해야 한다. 이 세 가지 헌신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 일을 해야 할 지에 대한 본보기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 목표들은 이제 우리의 생애의 목표를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지 우리를 가르침으로써 그 헌신들을 교묘하게 처리한다(finesse)”(Bruner, 1:259)라고 F. D. 브루너는 제시한다. (118.1)
 첫 번째 대조(19-21)는 가치의 방향 전환을 제시한다. 인간은 타고난 수집꾼이다. 달러를 모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가축, 보석 등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에서는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것들을 제일 많이 수집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 중요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가치들과 목표들에 관한 그들의 개념들을 전환시키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은 하늘 통화(通貨) 보물을 쌓아 놓는 일에 그들의 포부와 목표를 둘 필요가 있다. 산상설교의 문맥에서, 이런 보화들은 예수께서 논하고 계셨던 인간적․영적인 가치들이다. 이런 가치들은 항구적이며, 파괴시킬 수 없는 것이다. (118.2)
 두 번째 대조는 인간의 눈(22, 23절)을 우리의 환경에서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을 우리가 인식하는 방법의 특색을 짓고 꼴지우는 우리의 목표들과 야망들에 비유한다. 그리고 우리의 육안의 건강이 우리가 실제로 빛이나 어둠 가운데 살지 아닐지를 결정하듯이, 우리의 영적 눈의 상태 또한 우리가 영적인 빛이나 어둠에 거할지 아니할지를 결정한다. 그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우선 순위들과 가치들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118.3)
 세 번째 대조(24절)에서, 예수께서는 첫 두 대조에서 모든 사람이 명백히 보도록 그들의 눈 높이에서 강조하고 계셨던 요점들을 제시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든지 현 세상을 섬기고 있든지 그 어느 하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우리의 목표 그리고 우리의 우선 순위들에 있어서 동기 유발의 토대가 되는 것에 대한 심각한 선택에 직면해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119.1)
 우리들 각자는 우리 인생의 주(主)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브루너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대조들의 취지를 요약하고 있다. “구약의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이제 신약의 더 정교한 ‘너희 목표가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거기 있기 때문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브루너, 1:261). (119.2)
 염려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우선 순위, 목표 그리고 참된 부(富)에 관한 그의 가르침의 절정을 장식하고 있다. 그의 권면의 요점은 32절33절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그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그들의 생애를 허비하는 사람들—그러다가 그것들을 획득하고 난 후에는 그것들에 관하여 염려할 뿐인 이방인들—과 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처럼 행동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 그러면 종국에는 “이 모든 것[다른 것들]”이 또한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약속은 온유한 자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5:5)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그 약속과 맥을 같이 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의 목표들은 세상적인 목표들이 아니라 천국의 목표들이다. (119.3)
 목표들과 우선 순위들에 관하여 결론을 도출해 내시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생 생활에서 당하는 시련을 잘 통과해 나가도록 해 줄 수 있는, 염려와 관련된 몇 가지 유익한 권면을 주신다. 한편으로, 예수께서는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적어도 세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 염려는 아무 쓸모 없는 일이다. 그는 사람들이 염려를 통해 그들의 수명을 단 한 시간도 더 늘릴 수 없을 뿐 아니라(27절), 염려로 그들의 키를 더 크게 할 수 없다(27절 난외주)고 지적하심으로써 염려의 무용성을 예시하신다. (119.4)
 둘째, 우리의 생명 그 자체는 그 생존에 가장 긴요한 요소들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그에게 대한 의존에 기초되어 있다(25절). 결국, 우리의 생명과 몸은 창조주의 선물들이다. 그것들은 결코 염려를 통하여 이르러 온 것들이 아니다. 더 큰 선물—생명 자체—을 제공해 주신 분은 우리가 끊임없이 안달하지 않아도 더 작은 것들—물질적인 필수품들—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며, 또 기꺼이 제공하려고 하신다. 천연계의 새들과 식물들은 염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식물들과 동물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가치가 덜 한 것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치가 더 큰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잘 돌보실 것이다. (120.1)
 셋째, 염려하는 것은 무신론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이교적(異敎的)이다(31, 32절).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나 신뢰가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염려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다. ‘염려하는 그리스도인’은 일종의 모순이다. 그 왕국의 시민들은 염려에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 그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120.2)
 예수께서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논증들을 제공해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두 가지 전략들도 아울러 제시해 주신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우선 순위를 바르게 할 필요가 있다. 즉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절). 우리의 염려 가운데 너무도 많은 것들이 우리가 동시에 두 왕국에서 살려고 시도-불가능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24절). 만일 우리가 무엇인가 염려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왕국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야 한다고 예수께서 줄곧 말씀하고 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도 자주 썩어 없어질 것에 관하여 염려한다. 우리가 두 목표 대신에 한 가지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짐을 덜 지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때와 장소에서, “이 모든 [다른] 것이 [우리]에게 더”해질 것이다(33절). (120.3)
 염려를 극복하는 예수의 두 번째 전략은 한 번에 하루씩 사는 것이다. 이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34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그것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혹 내일 있을지도 모를 그럴 문제들로 왜 자신에게 짐을 지우는가? 믿음과 신뢰는 하나님과의 매일의, 순간마다의 관계를 수반한다. 왕국의 삶은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사는 삶이다. 염려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우리 아버지”에 대한 신뢰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신뢰는 날마다 반복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밖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121.1)
 ■ 말씀에 들어감
 마태복음 7장을 명상하면서, 깊이 음미하면서 두세 번 읽으라. 그 장의 흐름을 파악한 후에 다음의 문제들과 질문들을 다루어 보라. 그대의 마태복음 노트를 곁에 놓고 중요한 사상들을 간단히 메모해 두라. (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