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키나의 그림자 속에서 제12장 새로운 세대 (민수기 26~30장)
 권세 있는 위치에 있는 현명한 개인으로서, 모세는 자신이 선택한 예상 후보자, 자신과 가까운 어떤 사람을 그저 뽑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지혜를 의뢰하지 않았다. 어떤 족벌주의나 정치공작도 없을 것이었다. 그 대신에, 모세를 선택하셨을 때처럼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친히 선택한 그 사람을 임명하셨다. (202.3)
 여호와의 선택은 모세의 조력자인 여호수아였다(출 24;32;33장; 민 11장). 그는 이스라엘 군대의 사령관이었으며(출 17장), 두 명의 신실한 정탐꾼 중 하나였다(민 14장). 그의 사역 경험은 인상적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더욱 중요한 자격을 말씀하셨다.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민 27:18). 즉, 그가 짐들을 지고 도전들에 대처하면서, 여호와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를 지도하고 권능을 부여하시도록 이미 허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과 더불어 이룩한 그의 실적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방향으로 이탈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곳으로 인도할 것임을 보여주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신실한 목자가 될 것이었다. (202.4)
 우아하게 단순한, 강력한 예식을 통해 여호수아가 새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모세는 여호수아의 머리 위에 그의 손을 얹었다. 그렇게 하여 그가 즉시 모세와 권력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민 27:18-23), 상징적으로 권위를 그에게 이전시켰다. 이런 방식은 모세가 죽은 후, 고라와 그의 무리들이 하려고 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줌 없이 매끄러운 이양을 보장할 것이었다. (203.1)
 모세가 왕이라면, 여호수아는 공동통치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거룩하신 왕으로부터 그들의 특명을 받았다.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여호와와 면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었지만(민 12:8; 신 34:10 참조), 대제사장에 의하여 시행되는 우림과 둠밈을 통한 거룩한 신탁에 의하여 지시를 받게 될 것이었다(민 27:21; 출 28:30 참조). 그러한 절차는 여호수아 이후의 미래 리더십을 위한 모델로써 행정 당국과 종교적 권위 사이의 협동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203.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는 상황을 피하기를 원하였다. 천년도 더 지난 후, 예수께서도 그분의 백성들이 그러한 환경에 처한 것을 발견하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그분의 생명을 그분의 “양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어지신 목자 예수께서는 그분 자신과 그분의 “우리”로 백성들을 부르시고, 잃어버린 이들을 구원하신다 (눅 15:4-7). 그분께서는 또한 지도자들에게 그분의 “양들”을 보살피라고 명령하신다(요 21:16,17). 그분의 양을 칠 때, 우리가 신실한 마음, 지도하는 성령님, 보호하는 강인함, 그리고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예수님의 애정어린 양육을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노라. (203.3)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킴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퍼시픽 유니온 칼리지에서 신학과 음악을 전공할 때, 나는 여기숙사 중 하나에 부속된 큰 예배당에서 저녁 예배 때 설교를 할 예정이었다. 다이어리를 갖고 있지 않아서 나는 어딘가에 메모해 놓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몇 달 후 나는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가 충격적인 전화를 받았다.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는데, 설교해야 할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찬미를 몇 장 더 부르고 있으면 바로 거기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204.1)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나의 1967년 샤브(Saab)에 뛰어 올라탔다. 그런데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나는 캠퍼스로 향하는 길을 뛰어 내려갔다가 예배당으로 가는 언덕길을 을 길을 뛰어 올라가 숨을 헐떡거리며 예배당에 도착했다. 온 몸에 땀이 비오듯하는 가운데 도착했을 때 나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예배당에서 나와 떠나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내가 데이트 중인 여학생의 자매도 있었다. 깊은 유감을 느끼면서, 나는 그녀와 모든 다른 이들을 피해서 집으로 걸어와서는 즉시 샤브를 팔려고 내놓았다. (204.2)
 여러분이 약속을 할 때에, 특별히 하나님과 약속을 할 때, 그것을 잘 정돈해 놓을 필요가 있다. 약속을 적는 달력을 마련하면 도움이 된다. 민수기 28장29장이 바로 그것에 관한 내용이다. 레위기 23장은 이미 매 주의 안식일과 특별한 연례 절기들의 준수에 대한 지시사항들을 주었다. 민수기 28장29장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여호와께 매일, 매 안식일, 매 달 첫째 날, 그리고 연례 절기들에 드려야 하는 희생제물들의 종합적인 리스트를 제공한다. (205.1)
 고정된 거룩한 때에 정규적으로 드리는 희생적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맺은 그들의 언약 관계를 상기시킬 것이었다. 민수기의 이곳에 이 일람표가 배치된 것은 이제 막 약속의 땅을 점유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들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으뜸으로 모셔야 한다는 사상을 공고히 해 준다. (205.2)
 전체 희생제사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것은 매일 아침마다 한 숫양을, 그리고 또 다른 하나를 저녁에 그 날의 마지막 희생제물로써 드리는 번제였다(민 28:1-8; 출 29:38-42). 각각의 제사에는 소제와 전제가 동반되어, 그것을 여호와를 위한 풀코스 메뉴로 만든다 (민 15장 참조). (205.3)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먹었던 끼니와 동일한 수효인 두 끼 식사를 그들의 신들에게 제공하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것은 여호와의 일용할 “양식”으로 차려졌다(민 28:2). (205.4)
 “바알 신의 우가리트 신화에서, 일루(Ìlu: El)신은 앗티라투(ÁT—iratu) 여신이 그에게 오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이야기하였다. ‘당신은 방랑으로 인하여 진정 배고픕니까?’ 고대 바빌로니아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서, 신들은 대홍수 기간 동안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고통당했는데, 이는 그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릴 인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트라하시스(‘노아’의 역할)가 후에 희생제물을 드렸을 때, 신들이 제물의 냄새를 맡고(창 8:20,21과 비교해 보라) 파리 떼처럼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여호와와는 다르게, 그들은 그 냄새를 즐겼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배고픔이 끝날 것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한 기도에서, 힛타이트의 왕 무르실리 2세(Mursli II)는 신들이 그들을 공궤할 인간들의 부족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그의 땅에서 재앙을 제거해 달라는 논증으로 음식에 대한 신들의 필요를 이용하여 간청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분께 영양분을 공급할 인간의 희생제물이 필요 없다(시 50:12,13)”.1 (205.5)
 이교의 제물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것들은 그분을 믿는 믿음과 그분과의 교제의 징표일 뿐이었다. 그분은 모든 신체적, 정신적, 영적 삶의 원천이자 유지자이시다. 그래서 고라의 아들들의 영혼들도 그분을 목말라하였고(시 42:2), 그들의 마음과 육체가 기쁨을 인해 노래를 불렀다(시 84:2). (206.1)
 기본적인 희생제물은 양이었다. 그래서,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하나님의 고난 받는 메시야를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가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잠잠히 견디는 양으로 비교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사 53:6,7). 또한 침례요한이 처음 대중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소개한 것도 적합하다. 마치 그가 “여기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생제사 제도를 성취하신 분이 계신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206.2)
 매주 일곱 번째 날의 기본적인 안식일의 휴식은 제의(祭儀) 제도에 의존하는 의식상의 준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전 제도보다 먼저 제정되었으며, 행성 지구의 창조의 “생일”을 경축했다(창 2:2,3; 출 16:22-30; 20:11; 31:17). 하지만 예전 제도는 두 마리의 양을 더 드림으로써(민 28:9,10), 그리고 성막 내부의 “진설병”(임재의 떡)을 새로운 것으로 준비함으로(레 24:8) 안식일을 영예롭게 하였다. (206.3)
 매월 초하루에 제사장들은 일단의 번제들과 하나의 속죄제를 추가로 드렸다. 부수적인 소제와 전제와 아울러, 그것들이 정규적인 아침 번제를 보충했을 것이다(민 28:11-15). 초하루 날은 매우 중요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달력은 지구 주위를 한 달에 한 번씩 도는 달의 공전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음력이었기 때문이었지만(출 12:2), 그들의 달력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연간 주기에 부합되도록 정기적으로 조정되었다. (207.1)
 창조의 네째 날, 여호와께서는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창 1:14)고 하심으로 천체들에게 행성 지구에 사는 인간의 시간을 구조화하는 기능을 부여하셨다. 그래서 초하루의 예배, 즉 월삭에 드리는 예배는 여호와를 우리의 태양계와 그리고 인간의 시간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으로 기념했을 것이다. 안식일은 또한 창조주께 영예를 돌리고 시간(일주일 체계)을 구조화한다. 안식일의 기원은 천체의 운행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본(本)과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창 2:2,3; 출 20:8-11). (207.2)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기적으로 천체들에 관한 하나님의 창조적 주권을 재긍정하는 것은 중요하였다.왜냐하면 여타 고대 근동지방 사람들은 해, 달, 별, 그리고 행성들을 신으로 경배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가족은 달 숭배의 배경을 가진 메소포타미아 출신이었다. (207.3)
 이사야 66장 22-23절은 모든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매월 초하루일(월삭)과 매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이라고 예언한다. 초하루와 매주 1회의 안식일의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의 타당성은 죄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새 땅에 대한 이상 가운데서, 요한은 창조주의 선물인 또 다른 매 달마다의 자연 이벤트를 보았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2). (2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