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그 점은 7장의 모든 논리를 거의 가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문제가 원래의 독자들에게는 적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그리고 우연히도 그 문제는 그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더 많은 지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주장은, 특별히 성전이 희생 봉사와 함께 아직도 예루살렘에 서 있을 동안에—A.D. 70년까지 그랬던 것처럼—1세기의 사람들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며, 심지어는 귀에 거슬렸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였다. (151.5)
 구약의 법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사장직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셨다. 그러나 새 반차의 제사장이 일어날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이 한 사람을 새 반차의 제사장으로 임명하실 것이라고 성경 자체가 예언하였다.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17절). 그러므로 유대 지파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옛 제도와 구조를 바꾸는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 제사장이 되신다. (152.1)
 그러나 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님은 제사장이 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 7:1-10은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레위보다 그러하며,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는 옛 반차를 능가함을 “입증한다.” 이것이 7:15에 기록된 “더욱 분명하도다”라는 말의 의미이다. 새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아 직임을 맡으신 것이 아니다(16절). 여기서 바울은 이 장에서 일찍이 우리가 보았던 두 곳에서의 암시를 종합하고 있다: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3절); 그리고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8절). (152.2)
 7장의 나머지 부분은 새 반차가 옛 것을 능가하는 세부적인 사항들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살펴보기 전에, 7:11-19의 다른 두 가지 항목들이 주석을 요구한다. 이 둘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있어 각별한 관심사이다. (152.3)
 12절에서 사도는 “율법의 변개”에 대하여 말한다. 때때로 도덕률 폐기론자들이 지지를 얻기 위한 성경절로 이 구절을 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이런 일은 때때로 있으나, 빈번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문맥을 주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러한 접근 방식의 그릇됨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가 십계명이 아니라 옛 반차에 대한 규정들(즉, 레위 지파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12-16절에서 행한 그의 말에서 명백하다. 그는 “제사 직분의 변역(變易)”(12절)과 거기에 따라 누가 제사장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할 법규(法規)들의 변역을 염두에 두고 있다. (152.4)
 둘째 항목은 우리가 이미 2장5장에서 본 완전에 관한 문제로 우리를 돌아가게 한다. 거기서 우리는 이 용어가 일련의 인간 경험들을 통하여 “완전케 되신” 아들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았다—즉,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기 위한 자격을 갖추셨다. 히브리서 7장에서 우리는 이 용어가 다른 문맥, 곧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 자체와 관련하여 사용된 것을 발견한다. (153.1)
 히브리서 7:11은 옛 반차 아래서 완전해 질 수 있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다면.”) 저자는 18-19절에서 “전엣 계명”“연약하고 무익”했다고 하면서 그 사상을 반복하고 나서 기탄 없이 이렇게 말한다: “율법[제사장직에 대한 옛 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153.2)
 이 용어와 더불어, 사도는 막 뒤이어 나올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긴 신학적 토론을 위하여 그의 독자를 준비시키고 있다. 우리는 거기서 또 다시 완전에 관한 언어를 발견할 것이며, 우리가 그 부분에 이를 때까지 그것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보류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가 뒤따를 것인지에 관한 실마리만 살펴보는 것으로 일단 만족하자. 7:18-19에서 옛 반차의 결함들을 명백히 진술한 다음에, 바울은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라고 말한다. 그러한 사상—하늘의 엄위하신 분(Majesty)께 가까이 나아감—은 예수님의 새 제사장직의 반차가 초래하는 완전의 핵심 요소로 부상할 것이다. (153.3)
 이 시점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7장에서 새 반차가 옛 것을 능가하는 세 가지 면을 본다: (153.4)
 1. 멜기세덱은 레위보다 더 위대하였고, 따라서 멜기세덱의 반차는 레위의 것보다 더 좋다. (153.5)
 2. 멜기세덱의 반차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16절)에 중심을 두고 있으나 레위의 반차는 “죽을 자들”(8절)에게 두고 있다. (154.1)
 3. 레위의 반차는 완전을 가져올 수 없었으나, 더 좋은 새 반차는 필시 그럴 수 있다-그리고 히브리서 8-10장은 그렇게 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154.2)
 새 제사장직의 우월성
 7장의 마지막 부분인 20-28절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우월성을 역설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들이 제시되는 것을 본다: (154.3)
 1.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맹세(즉, 시편 110:4)로 제사장이 되셨다. 반면에 레위의 제사장들은 우연히 특별한 지파에 출생함으로 인하여 단순히 그 직임을 받았다. (155.1)
 하나님의 맹세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사실을 확증하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직접적인 간섭(干涉)과 관여(關與)를 시사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다른 문맥 하에서 히브리서 6:17이 이미 우리에게 말했듯이, 하나님의 목적을 매우 명백히 하면서 의심의 그림자를 제거한다. (155.2)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제사장이 되신다는 주장에 도전한다 할지라도 무슨 상관인가!—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유대인 비평가들이 그 주장을 거절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할지라도 무슨 상관인가!—하나님이 맹세로써 그 사실을 확증하셨는데. (155.3)
 우리의 시대에도,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에 대한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리며, 컴퓨터와 첨단 기술이 발달한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우리의 전망이나 이해에 상관없이, 그 가르침은 확고하며, 움직일 수 없으며, 파괴될 수 없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진실로, 맹세하셨다—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다. (155.4)
 2. 예수께서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그는 영원한 제사장직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봉사는 지속적이며, 계승(繼承)에 의하여 단절되지 않으며, 죽음에 대하여 안전하다. 많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priests) 대신에, 이제 우리는 한 제사장(Priest)을 모시고 있다. (155.5)
 그 진리는 우리를 위하여 중요한 영적 화물을 날라다 준다. 그것은 누가 하늘 상점을 보살피며, 누가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우리가 언제나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거래하고 있는 분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나 받아들여지며 언제나 환영받으리라는 것을 안다. (1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