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바울은 주의 만찬(Lord's Supper)에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떡과 포도주를 지나쳐 버린다. 그것은 또한 그가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 이러한 요소들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다. 잠시 후에—9장10장에서—그는 우리의 구원을 이룬 “더 나은 피”를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미사(mass)의 가르침과 같은 것을 주장하려 했다면, 이곳이야말로 그것을 위해 독자들을 준비시키는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연결을 전혀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147.1)
 그는 예수님의 왕의 측면을 발전시키지도 않는다. 그가 멜기세덱은 왕이요 제사장이라는 점을 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 더 나아가지 않는다. 멜기세덱은 문자적으로 “의의 왕”을 의미하며, 그가 또 “평강”을 의미하는 살렘(예루살렘)의 왕이었기 때문에 “평강의 왕”이기도 했다. (147.2)
 의의 왕이시요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은 풍성한 설교 제목을 제공한다. 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그러한 설교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사도는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사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책 전체를 통하여 왕위의 대권을 받은 예수님을 발견하기는 하지만—일찍이 1:3에서 우리는 그가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신 것을 본다—그러한 측면이 히브리서의 초점이나 관심사가 아니다. (147.3)
 왕으로서보다는 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관심이 바로 이곳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멜기세덱이 논의에 등장한다. 아론보다 오래 전에 제사장이었던 이 고대의 사람은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의 봉사에 빛을 던져 준다. (147.4)
 이것이 우리를 히브리서 7:3으로 이끌어 간다—“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멜기세덱에 관한 온갖 추측 후에 오는 설명은 간단하다. (147.5)
 창세기 14:18-20에 관하여 주석을 하면서 바울은 그의 시대에 통상적으로 있던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즉 본문의 자료뿐만 아니라 그 본문의 침묵이 연구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14:18-20이 멜기세덱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에 주의해 왔다. 이제는 그것이 말하고 있지 않는 것에 주의해 보라. 우리는 부모나 족보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출생과 사망의 기록이 없는 것을 발견한다. 기록된 사실만에 의하면, 그는 단순히 장면에 나타날 뿐이다. 마치 그가 결코 태어나지 않았거나 죽지도 않은 것처럼, 마치 그가 영원히 제사장으로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148.1)
 오랫동안 리뷰 앤드 헤럴드의 편집장이었던 유라이아 스미쓰(Uriah Smith)는 1세기 전에 그것을 바로 간파하였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토록 당혹케 하였던 표현들은 우리가 멜기세덱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기록의 유무(有無)를 따지는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라고 그는 기록하였다. “이 표현들이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그에 관하여 그가 산다고 증거하느니라,’ 등등이다. 기록은 그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그의 출생이나 죽음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기록에 관한 한, 생명의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에 관하여 족보도 어미도 아비도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 사이의 관습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표현들이 단순히 기록 유무의 입장에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멜기세덱은 자신 안에 왕과 제사장이라는 이중의 직분을 가진 하나님의 출중한 종으로서 행동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한다. 그의 앞서 있은 것은 모두가 공백이요, 그의 뒤에 있은 것도 모두가 공백이다. 출생이나 죽음의 장면은 전혀 나타나지 않은 채, 그는 이 세대(dispensation)에 제사장-왕이라는 그의 신분으로 그리스도의 적절한 원형(原形, prototype)이 된다”(Review and Herald, 5 Nov. 1895). (148.2)
 만일 히브리서 저자가 근본적으로 멜기세덱에 관한 논문을 쓰기로 의도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논리가 인위적이고 무리한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앞에서 히브리서 7:3에 관한 부분에서 보았듯이, 그의 초점은 진실로 예수님에게 있다. 멜기세덱—그가 성경의 기록에 나타난 바대로—은 예수님과 방불(彷彿)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은 멜기세덱과 방불하지 않으시다. (「새국제역」 성경의 10절 다음에 나오는 소제목이 얼마나 핵심에서 벗어났는지를 살펴보라! “멜기세덱과 방불한 예수님.”) (148.3)
 멜기세덱과 레위
 히브리서 7:4-10은 멜기세덱의 위대성을 제시한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행위가 아브라함에 대한 그의 우월성을 이룬다: 족장(族長)이 탈취물에서 그에게 십일조를 주었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7절). 그러나 사도의 관심은 아브라함에서 멈추지 않는다. 문단의 대부분이 족장과 멜기세덱을 다루고 있지만, 9-10절은 논의가 향하는 방향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레위보다도 더 위대하다. (149.1)
 그가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지를 관찰해 보라: 레위가 그의 증조부의 행위를 통하여 십일조를 “바쳤다”! 참으로 이상한 논리이다! 우리가 3절과 씨름한 후에 이제는 이 문제에 봉착한다. 성경 학도들 사이에 7장이 악명 높은 장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3절에서와 같이 조금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한다면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기에다 겸손을 조금 더하라. 우리는 20세기의 사고 과정들을 우월한 것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전수받은 그레코-로만(Greco-Roman)식의 사유 형식을 따르지 않는 논리는 이상하고 흠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149.2)
 그러나 우리의 시대가 모든 지혜를 다 소유하고 있는가? 여기에 좀 색다른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시간을 조금만 들인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일 수 있는 논리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성서적 논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사유(思惟) 과정의 우월감을 제쳐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149.3)
 사실상,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이 잃어버렸고 따라서 회복할 필요가 있는 사상이 히브리서 7:9-10의 배후에 놓여 있다. 여러 세대들에 걸쳐 남녀들은 하나님과 인류 앞에서 개인의 철학, 곧 한 사람, 혼자만의, 고적한 철학을 먹고산다. 개체는 중요하지만 그것은 반쪽의 그림에 불과하다. 성경은 다른 반쪽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는 개인들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개체적 신원과 함께 단체적 신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서로서로의 일부분이다. 존 던(John Donne)이 기록하였듯이, “어떤 인간도 섬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의 조종(弔鐘)을 울리는 것은 또한 우리의 죽음에 대한 종소리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그가 누구든지 간에—이 고통당하고 상하고 죽을 때, 우리 또한 움츠러든다. (150.1)
 우리는 성경 전반을 통하여 공동체(共同體)와 개체성(個體性)의 개념을 발견한다—우리가 현대의, 제한된 사고의 틀을 깨뜨리고 그 것을 식별할 수 있을 때 그러하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대면하셨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다(행 9:4-5). 그런데 사울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우리의 개인주의적 양식(mode)에 의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단체적 양식을 펼치고 있다.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은 그들의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다. (150.2)
 단체적 신원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도 가장 중요한 표현들이 아담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핵심 용어들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 있다—우리는 하나의 백성이요, 하나의 민족이요, 또는 한 운명을 타고난 죄인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영생을 가진 하나의 새 민족을 만드셨다. 그가 죽으셨을 때 우리가 죽었고, 그가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살아났다. 우리가 그의 것이 되기로 선택하는 한,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문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 .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5:19; 6:5). (150.3)
 우리는 서로서로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한다-심사숙고한다면 이런 개념은 사회와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회 보장(Social Security) 번호, 곧 대중 속의 이름 없는 얼굴 이상의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집단 요법이 덜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돌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마음 상한 남녀들을 더욱 돌보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151.1)
 그러므로 히브리서 7:9-10은 우리의 시대에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도의 논증은 그로 하여금 멜기세덱은 레위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일 수 있게 한다. 그 이유는 십일조를 받도록 지정된 사람들의 조상인 레위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이다. (151.2)
 8절은 또 다른 점을 소개한다. 멜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었다-즉, 기록은 그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는]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3절). 사도는 이 장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의 제사장 반차의 우월성을 펼칠 때, 이 사상이 암시하는 바를 그려낼 것이다. (151.3)
 새 제사장직이 일어남
 다음 문단인 7:11, 19는 첫 열 절의 토론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보인다. 저자는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다”(14절)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첫째의 주요 관심사는 예수께서 제사장 지파인 레위 지파에서 태어나지 않았을지라도 그가 제사장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확립하는 것이다. (1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