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넓은 우주와 그토록 무수한 천체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길래 죄 때문에 망쳐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려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나이까?
(65.2)
 사람이 무엇이기에
 무수한 별들이 은모래처럼 반짝이는 광대 무변한 별들의 바닷가를 거닐던 시인은 갑자기 이 광활한 우주 한 귀퉁이에서 숨쉬는 한줌 티끌에 불과한 자기, 허허벌판에 자라난 유야무야한 한낱 갈대와 같은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친다. (65.3)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8편 4절). (66.1)
 저 무변(無邊)한 하늘을 펴시고 저 무수한 별들을 지으신 엄청나신 하나님! 저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무수한 별들 축에도 들지 못하는 한낱 보잘것없는 유성(遊星)에 불과한 이 땅덩이 위에서, 풀처럼 자라났다가 들꽃처럼 시들어버리는(이사야서 40장 6절 참조) 인생, 이 연약한 사람(히브리어:에노쉬)을 생각에 깊이 두시고(히브리어:자칼), 한줌 흙에 불과한 흙의 자식들인 우리 인자(人子, 히브리어:벤 아담)를 권고(勸告)하셔서 찾아와 만나주사(히브리어:파카드) 온갖 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끔찍이 생각하시나이까? (66.2)
 무수한 별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무변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너무도 미미하여 참으로 보잘것없는 인간의 존재를 생각하던 시인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이러한 인생에게 기울이신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베푸신 다함이 없는 은혜를 낱낱이 기억에서 되살린다. (66.3)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海路)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편 8편5~8절). (66.4)
 시편에 기록된 자연시들(8, 19, 29, 104편 등)은 자연 자체를 예찬하는 것으로 목적을 삼지 않는다. 작가를 제쳐놓고 찬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로마서 1장 25절)기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작품을 작가인 양 피조물을 신으로 착각하는 것이 범신론(凡神論)이다. 희랍의 황당무계한 신화에는 우주가 신들을 창조해 냈지만,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는 정반대의 선언으로 시작된다. 작가가 있어야 작품을 만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67.1)
 천연계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사람이란 무엇인가(What is man)? (67.2)
 사람은 천사가 아니다. 그런데 이 곳의 천사는 히브리어의 “엘로힘”으로 본래 하나님을 일컫는 대표적인 표현인데 종종 천사나 사람까지도 하나님을 대표하는 입장임을 강조할 때 그렇게 쓰기도 했다(출애굽기 21장 6절; 4장 16절; 7장 1절; 시편 82편 1절 참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천사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더더구나 아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자신이 하나님 노릇을 하려드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창세기 3장 5절)려 한 것, 그것이 인간이 저지른 첫 번째 범죄이기도 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닮았지만 하나님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67.3)
 그렇다고 인간은 동물도 아니다. 분류학에서는 인간을 동물계(界)에 포함시켜 척추 동물문(間), 포유류강(綱), 영장목(目), 사람과(科)에 넣어 진화론적인 족보를 꾸몄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움을 받은 지구의 왕이요 통치자인 것이다(창세기 1장 28절 참조). “산 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를 읊으며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예속시키는 것도, 자연을 두려워하여 우러러 숭상하던 동양의 옛 사상도 모두 그것의 통치자로 임명받은 고상한 인간의 바른 처신이 아니다. (67.4)
 창조의 손, 구원의 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 달과 별들”(시편 8편 3절), 그리고 “주의 손으로 만드신”(6절) 천연계는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하늘과 땅 위에 변함없이 드러내건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그렇지를 못했다. 지구의 통치자 인간은 어리석게도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했고 지구를 사단의 반역에 가담시키고 자신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 결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로마서 8장 22절)이 처절한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68.1)
 빗나간 자식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 애태우며 보내는 나이 많은 한 어머니를 옆에서 보다못한 이웃이 말을 건냈다. “이젠 그런 자식을 그만 잊어버리세요. 아예 안 낳은 셈 치시라고요. 소용없으니까요.” 시름에 잠긴 노모는 대답했다. “나도 그 애가 당신 자식이라면 벌써 잊어버렸겠소.” 그렇다. 자식이 부모의 분신(分身)이듯 저렇게 넓은 우주와 그토록 무수한 천체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길래 죄 때문에 망쳐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다가, 티끌 같은 인간을 구원하여 당신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려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이처럼 죄로 추해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나이까? 그것이 히브리서에 인용된 시편 8편의 의미이다. (68.2)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브리서 2장 9절). (69.1)
 죄로 망쳐진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려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 그분이 예수이시다. 창조하실 때는 손과 손가락을 움직이셨는데, 구원하실 때는 팔을 쓰셔야 했다(이사야 52장 10절; 53장 1절, 59장 16절; 시편 77편 15절 참조).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넓게 벌린 예수 그리스도의 양팔은 “다 이루었다”는 구속의 선언이 있기까지 거두어지지 않았다. (69.2)
 하나님의 영광인 인간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그리고 영원히 찬란해진 것이다. (69.3)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편 9절). (69.4)
 쓴잔(蓋)

 허정문


 한 오라기 뜻을 머금어

 쉬 그리

 사랑하심 일진대

 어이

 가슴속에 저미어오는

 당신의 모든 것을 ∙∙∙ .


 솔로몬의 영화마저도

 차라리 새길 수 없는

 애틋한 겟세마네의 정열만큼

 그저

 고개를 떨구어

 꿇어 감사에 겨운 눈물이던가.


 외곬 향해 우뚝 선

 쓰디쓴 잔을

 값없이 빛없이

 마셔 흘러나린 무언(無言)의 핏물이

 되려

 봇물 터뜨리는 생수가 될 줄이야.


 날(刀)세운 세상길에

 홀연히

 타오르는 십자가의 자태(姿態)여! (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