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9. 허다한 증인들에게 둘러싸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 11:13).
(138.1)
 따라서 부조들은 종말론적 소망을 가졌는데, 이는 하나님의 도성은 미래의 실체로 남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은 앞을 바라보았으며 자신들이 볼 수 없는 것을 확신했다(참조 11:1). 그들은 추상적인 천상의 장소를 바라지 않고 “터가 있는 성”(10절) —즉 진동치 못하고 영속되는 거처를 제공하는 성(참조 12:28; 13:14),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 예루살렘”(12:22) —을 바랐다(10절).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그 이상에서 이 소망을 자세히 설명한다. (138.2)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히 11:27)던 사라,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와 같은 믿음의 전사들을 좀더 열거하고 또 여럿을 열거한 후 히브리서 11장은 목회적 호소로 끝맺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40). 이 단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인정한다. 그는 히브리 성인들이 새 언약의 백성과 관련해서만 궁극적인 구원을 성취할 것임을 단호히 말한다. 옛 성인들이 “더 좋은 부활”(11:35)을 경험할 때에만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그들도 영원한 기업으로 들어갈 것이다(39, 40절). (138.3)
 히브리서는 옛 언약 아래에서 신실한 남녀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약속된 영원한 기업은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를 통해서만 주어질 것이다(참조 9:15). 이 확증은 동요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적인 호소의 기초가 된다. (139.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 2, 강조 첨가).
(139.2)
 저자는 오직 자신이 보존하는 믿음의 최고 본보기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호소함으로써 효과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적의에 찬 반대와 심지어 순교까지도 견딜 영웅적인 기독교 제자도로 고무시키기 위해 자신의 독자들 앞에 예수를 세운다. (139.3)
 욥의 감동적인 모본
 야고보서도 역시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고 하면서 기독교 신자들을 격려한다. 야고보서는 고난 가운데서 인내한 욥의 경우를 소개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 야고보서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책에 기록된 것처럼 욥의 훌륭한 증언을 간단히 고찰하도록 한다. (140.1)
 욥은 아마도 구약이 거명하는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고통당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삶의 비극적 상황은 그를 당황하고 실망하게 했다. 그는 모두에게 완전히 버림받고 미움받는다고 느꼈다(욥 19:13-20). 그의 경험은 모든 논리적 혹은 신학적 설명에 도전하였고, 그것은 그를 완전한 절망의 끝으로 이끌었다. 그는 자기의 구변에 능한 친구들이 필요한 설명을 주는데 실패한 “번뇌케 하는 안위자”(욥 16:2) 임을 발견했다. (140.2)
 그러나 모든 쓰라린 어둠 가운데서 욥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자신의 고결함과 자신의 믿음을 고수했다(27:1-6). 그의 경험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 그분에게서 왔음에 틀림없다(12:13). 놀라운 말로 욥은 이렇게 선포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그가 비록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여전히 나의 소망은 그에게 있을 것이다가 원문의 더 적절한 번역임—역자 주) ∙∙∙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욥 13:15, 18, 강조 첨가). 그는 그의 친구들이 한 것처럼 자신의 고통을 형벌로 보지 않고,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가 받아들인 신성한 시험으로 보았다(23:10). 눈물을 흘리며 그는 자신의 믿음의 확실성을 표현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保人)이 높은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욥 16:19-20). (140.3)
 욥은 죄없는 완전을 주장하지 않고 단지 그의 근본주의자 친구들의 참소에 대해 자신의 결백을 선언했다(31장). 그의 도전은 이렇다: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욥 31:6). 그의 고군분투는 진지한 신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사후에 남은 자신의 증언처럼, 자기 변호의 말이 책에 기록되고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지길 바랬다(참조 19:23, 24). 또한 욥은 자신의 흔들림없는 믿음에 대해 얘기했다: (141.1)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Redeemer, 혹은 “옹호자”(Defender), NIV 난외; 혹은 “변호자”(Vindicator), NEB]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혹은 “내 무덤 위에,” NEB 난외]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영문에는 “안에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어에 더 충실한 번역임—역자 주)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9:25-27).
(141.2)
 욥은 자신이 무덤에 머무르는 것은 단지 잠깐일 것이며(참조 14:13, 14)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하늘 법정에서 그의 변호자가 되실 것을 확신했다(참조 19:25-27, NEB). 게다가 이 구절은 욥이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그의 생명과 개성이 회복될 것임을 믿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프랜시스 I. 앤더슨(Francis I. Andersen)은 이렇게 진술한다: “부활의 소망은 바로 욥의 믿음의 심장부에 놓여 있다.”9) (141.3)
 엘렌 G. 화잇은 자신의 거절과 절망에도 아랑곳없이 하나님의 공의의 승리에 대한 욥의 놀라운 확증을 이러한 말로 포착한다: “욥은 실망과 낙담의 깊은 구덩이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하시는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높은 경지로 올라갔다.”10) 모든 핍박 당하고 고통 당하는 신자들이 끝까지 견디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예증인가! (142.1)
 시편에 나타난 확증의 노래들
 시편에서 다른 저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온전한 신뢰에 대해 증언한다. 그들은 필요로 하는 때에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언약의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에 대해 시적 형식으로 노래한다. 그들은 그분의 보호와 신실하심에 자신들을 바친다. (142.2)
 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동안 완전한 확증으로 주님을 찬양했다. (142.3)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5, 6, 8, 11).
(142.4)
 치명적인 위험을 직면하는 가운데 다윗의 확증은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께서 매일의 기도 가운데 자기 앞에 항상 계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다(8절). 그는 불시의 죽음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생명의 희락을 경험하는 것을 기뻐했다(9-11절). (142.5)
 시편 16편은 죽음의 공포에 떠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감으로 남는다. P. C. 크레이기(P. C.Craigie)는 이렇게 설명한다: “온전한 삶을 누리려면 대담하게 통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그러나 결코 통제될 수 없는 것도 바로 두려움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 쏘는 것은 시편 16편의 새로운 의미에서 제거된다: 시올[사망]의 최종적 위협은 예수의 부활에서 정복되었다.”11)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