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9. 허다한 증인들에게 둘러싸임
 히브리서는 기독교 신자들이 “믿음과 오래 참음[헬라어: 마크로 쒸미아 makrothumia, ‘인내’]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라고 권고한다(히 6:12). 그것은 신자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131.1)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헬라어: 휘포모네 hypomonē]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5, 36).
(131.2)
 저자는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위기에서, 자신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았던 모든 이에게 생존을 약속한 하박국의 고전적인 확증을 인용함으로써 인내 혹은 오래 참음을 위해 이런 호소를 한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0:38; 합 2:4, 강조 첨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께서 당신의 약속대로 과연 미래에 오시는 것일까라고 의심할지도 모르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하박국 2:4을 적용한다. 자신의 신앙을 보존한다면 그들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이 기독교 신앙고백으로부터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임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강조 첨가). F. F. 브루스(F. F. Bruce)는 마지막 말씀을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생명을 성취한다”라고 번역했다.1) (132.1)
 확고 부동한 인내에 대한 호소가 12장에서 다시 나오는데, 거기 이렇게 되어 있다: “인내[헬라어: 휘포모네 hypomonē, ‘오래 참음’]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 2). (132.2)
 순례 모티프(motif)는 히브리서를 조직하는 개념으로 명백히 작용한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순례 여행은 이별, 고난, 그리고 목적지라고 하는 독특한 특성들을 지녔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전에 있었던 어떤 영감적인 믿음의 실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위기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을 부활시기려고 했다.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위대한 “믿음 장”(11장)을 전개했는데, 그것은 순종과 인내의 행위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보여준 몇몇 위대한 남녀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성취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행동한 이들에게서 본받을 가치가 있는 인내하는 믿음의 표준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2) (132.3)
 믿음의 본질
 저자는 과거 몇몇 입증된 증인들의 믿음의 성격을 정의함으로써 이 장을 시작했다: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에 대해 흔들림 없어 하는 것이요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는 것이다”(히 11:1, NIV). 혹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신이다(NRSV, NASB),” 혹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NAB). 간단히 말해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를 인정하며, 그것은 현재 소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소망은 믿음의 앞을 내다보는(forward-looking) 측면이다. 이것은 바울의 묘사와 일치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헬라어: 휘푸두네 hypomonē]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그러므로 바울이 단언한 것처럼 믿음과 소망의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로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강조 첨가). (133.1)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믿음과 소망의 인내하는 특성을 강조한다. 브루스(Bruce)가 설명하는 것처럼, 그 믿음에 대해 구약의 성도들(saints)은 현저한 본보기가 되었다(히 11:1-40).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삶을 그것의 지도에 따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아직 미래의 것들은 믿음으로 현존했고, 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도 내적 안목에는 가시적이었다.”3) 믿음은 공로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보이지 않는 질서(order)를 보게 하는 기관(organ)이다(11:27에서 모세가 한 것처럼).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긴 하지만(엡 2:8), 그것을 행사하는 것은 인류의 책임이다. (133.2)
 히브리서는 구속받은 신자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의 필요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become)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continue)이었다.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치고 배반한 것처럼 영적인 전쟁 피로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참조 고전 10:1-10; 히 3:16-19). 히브리서는 고군분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고백에 충실하고, 위기의 때에 굳세게 견디고, 또 하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의 순례자들로 버티도록 격려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 순종하는 신실성에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신뢰는 살아있는 믿음의 본질이다. 그것은 성경 기록에서 발견된 믿음의 전사들의 생애에서 입증되었다. (134.1)
 입증된 증인들
 저자는 히브리 성서들에서 신자로서 두드러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여러 인물들—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그리고 다른 이들(11:4-28)—을 언급했다. 저자는 그들의 신앙에 대한 신적 승인을 강조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는 진실하기 위하여 신앙이 “하나님께” 향해야 한다고 상술할 때, 구원하는 믿음의 관계적 측면을 강조한다(히 6:1, NASB). 참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당신을 열렬히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기도 한다. “그렇다면 보상에 대한 굳건한 기대는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소망의 문제이다.”4) (134.2)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데, 이는 그의 믿음과 의로운 삶 때문이었다(11: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창 4:4; 참조 마 23:35). 유대인의 전통은 불이 내려와서 아벨의 제물을 태웠으나 가인의 제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5) 이 성경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적절한 희생제물을 보실 뿐 만 아니라, 주로 바치는 자의 마음과 생애를 보신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창 4:4에서 순서를 참조하라). “히브리서 저자에게 의의 근원이 믿음이었다는 것은 자명했다”(참조 11:5-7).6) (135.1)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11:5). 기록은 그가 아버지가 된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진술한다(창 5:22). 이것은 에녹이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데 자신을 돕도록 매일 하나님께 의존했기 때문에 신적 승인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설명한다: (135.2)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황홀경 속에서나 이상 중에서가 아니라 그의 일상 생활의 모든 의무를 행하는 가운데서였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할 일이 있었던 까닭에 그는 이 세상을 완전히 등진 은둔자가 되지 않았다. 가정에서와 사교 생활에서, 남편이요 아버지로서, 친구로서, 시민으로서 그는 확고 부동한 하나님의 종이었다.7)
(136.1)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예언적 이상을 주셨고, 또 그는 의의 설교자가 되었다(참조 유 14, 15). 그는 열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확고하게 유지했다. 그러나 에녹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인증은 그가 “믿음으로” 영광 가운데 승천하여 “죽음을 보지 않”게 되었을 때 이르러 왔다(히 11:5). (136.2)
 히브리서는 노아를 믿음의 본보기로 언급하는데, 그 이유는 “믿음으로” 노아가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건조했기 때문이다(히 11:7). 그렇다면 구원하는 믿음은 “[아직] 보지 못하는 것 들”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노아의 행위는 11:1, 6에서 정의된 것처럼 믿음의 본질을 각색한다. 노아는 당대에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되었다(창 6:9; 7:1).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창 6:22). 노아의 자원하는 순종은 그의 신앙의 질을 입증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효율적으로 이렇게 증언했다: “그의 신실성과 정직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그의 가족 모두를 구원하셨다. 부모의 충성에 대한 얼마나 큰 위로인가!”8) (136.3)
 “믿음으로 노아는 ∙∙∙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 11:7). 이 선언은 사도 바울의 분위기를 띤다. 그것은 의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고 선언한다. 노아는 넉넉한 믿음과 확신의 분량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했다. 동시에 “자신의 믿음을 통하여 그는 온 세상의 그릇됨을 드러냈다”(NEB). 그는 성경적 구원의 방법을 정확히 설명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 (136.4)
 저자는 믿음에 대한 자신의 최고 본보기로 아브라함을 소개한다. 그는 다른 어떤 구약의 인물보다 더 많은 공간을 이 부조에게 할애한다(11:8-12, 17-19). 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이 부름받고 떠나는 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시작한다: (137.1)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8-10; 참조 히 12:1, 8, 강조 첨가).
(137.2)
 저자는 아브라함의 생애가 믿음과 순종 사이의 상호관계를 나타냈다고 지적한다(8절). “믿음으로”라는 반복되는 문구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에 대한 능동적인 반응”을 말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레인). 이것을 통해 아브라함은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본보기가 되는 증거를 제공한다. 그는 약속된 “기업”으로 가기 위해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떠났다(8절). 아브라함이 자신의 기업으로 이해한 것은 히브리서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 도성(city)이었다는 것을 11:9, 10, 13-16에서 선언한다. 여기서 히브리서는 지상의 영토가 기업이라는데 초점을 맞추는 유대주의와 시온주의의 전통과는 다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히 11:10, 강조 첨가). 이 소망은 견고한 기초가 없는 장막에 그가 계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통해 드러났다. 장막에 거주한 부조들의 관행은 그들이 순례자요 나그네였음을 지적했다. 그것은 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 가나안이 약속된 기업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냈다. 히브리서는 이 중대한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한다: (1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