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요한계시록 제9장 인(印)침을 받은 성도들
 요한계시록 7장은 괄호와 같이 여섯째 인(印)과 일곱째 인 사이에 삽입되었다. 하지만 이 장은 그 인들의 순서에 아주 잘 맞는다. 여섯째 인을 떼는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 심판이 임박하므로, 악인들은 산들과 바위들에게 자기들 위에 떨어져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로부터 자기들을 숨겨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들은 공포속에서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 6:17)라고 묻는다. 요한계시록 7장이 그 질문의 답을 준다.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에 설 수 있는 자들은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134.1)
 성경절 : 요한계시록 7:1-17

 (134.2)
 144,000인(7:1-8)
 여기에 나오는 장면은 네 명의 천사들이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그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치지 못하게 제지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계 7:1). “땅의 네 모퉁이”라는 표현은 나침반의 네 방향을 가리키는 고대의 방식이다. “땅의 네 모퉁이”란 표현은 이것이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134.3)
 구약에서 바람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심판을 집행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파괴적인 위력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사 66:15-16; 렘 23:19-20; 호 13:15). 예레미야는 앞으로 예루살렘에 내릴 심판을 예언하면서 그 심판이 광야에서 불어오는 강하고 뜨거운 바람으로 일컬었다(렘 4:11-13). 그는 또한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바람”(“destroying wind” [NKJV]. 한국어 성정에는 “멸망시키는 자의 마음/심령”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루아흐[ruah]가 ‘바람’‘마음, 심령’을 모두 뜻하기 때문이다.—역자 주)을 보낼 것을 예언하였다(51:1-2). 하늘 “사방 바람” 또는 “네 바람”은 구약에서 잘 알려진 개념이다(렘 49:36; 슥 6:5). 다니엘은 이상 중에서 하늘의 네 바람이 대양의 파도를 불러 일으킬 때에 그 바다속에서 네 짐승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단 7:2-3). 외경(外經) 집회서(集會書, Ecdcsiasticus)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은 요한 시대의 유대인들은 바람을 하나님의 심간의 상징으로 이해했음을 보여 준다. “주님께서 만드신 바람도, 벌을 내리실때는 세차게 불게 하여 재앙을 크게 하신다. 세상 끝나는 날에 바람은 광란을 일으켜 바람을 만드신 분의 분노를 달래리라.”1 (134.4)
 바람이 부는 것은 요한계시록 6:17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노와 연관된다. 이 바람은 이 장면의 후반에 언급된 “큰 환란”의 때에 일어난다(계 7:14). 부는 바람들은 마지막 7재앙을 묘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며, 7재앙은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나타낸다(15:1). 그래서 바람이 부는 것은 재림 직전에 악인들에게 부어질 마지막 7재앙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일정한 기간 동안 이 파괴적인 세력들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이 땅을 해치지 못하도록 저지당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인(印)치는 일이 계속되는 한 그 바람들은 놓이지 않는다. (134.5)
 하나님의 백성을 인(印)치심
 그 다음에 요한은 동편을 의미하는 고대의 용어인 “해 돋는 데”로부터 다른 천사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계 7:2). 성경에서 동편은 주로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겔 43:2). 예수님은 “돋는 해 (Sunrise)”로 일컬어지셨다(눅 1:78). 인자(人子, Son of Man)의 오시는 징조가 동편에서 나타날 것이다(마 24:27-30).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군대와 함께 아마겟돈(Armageddon) 전투를 하러 오시는 것을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란 말로 표현하였다(계 16:12). 이러므로 천사가 동편[“해 돋는 데”]으로부터 온다고 말하는 것은 그 천사가 하나님 자신에게로부터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134.6)
 이 천사는 그들 네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인침을 끝마칠 때까지 바람을 불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한다. 고대에 인봉(印封)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문서들을 인봉하는 것은 그것의 내용을 값지게 하거나 그 문서를 조작하지 못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을 치는 것의 기본적인 의미는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었다. 어떤 물건에 인(도장)을 찍는 것은 그것의 소유자임을 가리켰다. 이것이 신약에서 인을 치는 것의 상징적 의미이다. 바울에 의하면, 인을 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는 뜻이다.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된 인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뜻이다(계 14:1). (134.7)
 신약에서 인을 치는 것은 누가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백성인지를 확인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인정하시고, 성령으로써 그들을 인 치신다(고후 1:21-22; 엡 1:13-14). 성령의 임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린양의 피로 자신의 두루마기를 씻어 희게 한 사람이다(계 7:14). 성령을 잃는 것은 하나님의 인치심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말라, 그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134.8)
 위의 문장에서 밝혀진 것과 같이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인 치심을 받는 것은 마지막 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을 인치는 일은 바울시대 이후로 전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인치는 일은 마지막 때에 그 절정에 이른다. 지금은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과 사탄의 편에 선 자들을 구분하는 시험의 시기이다. 짐승의 편에 선 자들은 그들의 이마나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다(계 13:16-17).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을 것이다(14:1). (134.9)
 인침을 받은 자들의 충실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각 세대마다 적절한 시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그러나 최후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충실함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계 12:17; 14:12). 특히, 넷째 [안식일] 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참고 계 14:7). 성경 시대에 안식일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징이었듯이(출 31:12-17; 겔 20:12, 20), 그것은 또한 최후의 위기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표징이 될 것이다(계 13:16-17). (134.10)
 요한계시록 7장의 인치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에 대한 최후의 인준(認准)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의 인(印)은 보호의 표징이다.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은 마지막 7재앙의 멸망시키는 세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은 그 큰 진노의 날에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다(계 7:3). 이러한 개념은 바벨론 포로 전에 있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하여 기록한 에스겔 9장의 상황으로 연결된다. 선지자 에스겔은 그 이상속에서 하늘의 사자(使者)가 서기관이 사용하는 먹 그릇을 옆에 찬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시기를 예루살렘 성읍으로 돌아다니며 하나님께 충성된 자들의 이마에 표를 그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사형집행자들에게 이마에 표를 받지 못한 모든 사람을 죽이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형 집행자들에게 또 표를 받은 자들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 것을 특별히 당부하셨다. 이마에 받는 표는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을 불충성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로부터 구별해 주었다. 인은 그들을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겔 9:1-11). (134.11)
 에스겔의 이상 속에서 이마에 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의 위기에서 보호함을 받은 것같이,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 때의 상징적 네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다. 인을 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해 주고, 그들을 마지막 7재앙의 해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한계시록 6:17에 제기된바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능히 보호를 받으면서 설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인 받은 백성이다. (134.12)
 인(印)침을 받은 144,000인 (7:4)
 이상이 계속됨에 따라요한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144,000”(계 7:4)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인치는 일은 끝났고, 마지막 7재앙의 멸망시키는 세력은 놓임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침을 받은 144,000인은 이제 막 큰 환란을 통과하려고 한다. (134.13)
 이들 144,000인은 누구인가? 문맥을 보면, 이들은 마지막 때 직전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의 상징적인 책이므로, 144,000은 문자적인 숫자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참고 계 1:1). 계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에서 숫자는 보통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144,000이란 숫자는 12에다 12를 곱하고, 거기에다 다시 1, 000을 곱하여 얻은 숫자이다(12 x 12 x 1,000=144,000).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구약게서 12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지파의 숫자이다. 신약에서 12는 12사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의 숫자이다(엡 2:20).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상에서, 요한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들이 그 도성의 12대문에 새겨진 것과 12사도의 이름들이 12개의 기초석(foundation stones)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12 x 12로 만들어진 144는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교회]으로부터 떼어낸 일부 선택된 무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134.14)
 144,000이란숫자는 요한계시록 9:16의 사탄의 마병대 수인 “2만 만”[2억]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숫자이다. 이 두 숫자는 네 천사와 관련하여(계 7:1; 9:15) 그리고 마지막 때를 배경으로하여 언급되었다. 이 두 경우에서 요한은 “내가 들으니, 그 수가 ∙∙∙ ”(계 7:4; 9:16)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요한계시록에서 숫자가 이런 식으로 언급된 것은 이 두 곳뿐이다. (134.15)
 이스라엘의 12지파(7:5-8)
 144,000이란 숫자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12지파도 문자적인 숫자가 아니라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앗수르가 북방 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했을 때, 열 지파가 포로로 잡혀갔다(왕하 17:6-23).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 이방 지역에 섞여 살다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두 지파인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후에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다. 나중에 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유대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유대인들은 전 로마제국으로 흩어졌고, 이리하여 이 두 개의 남은 지파들도 그들의 민족적 존재감을 상실했다. 오늘의 유대교는 이스라엘의 12지파 모두를 대표하지 못한다. (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