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8 장 재림 전 심판
 비판의 심리적 근거
 신약이 분명하게 심판을 확언하는데도 왜 재림교회의 입장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계속되는가? 이 점에 대한 나의 관찰은 두 가지 가능성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데, 둘 다 본질적으로 심리적 측면이다. (148.1)
 첫째 이유는 조사 심판의 현재성과 관련돼 있다. 재림교인들은 항상 이 심판이 지금 진행 중이라고 가르쳐 왔다. 그것은 인간 법정에 출두하라고 소환 받은 적이 있으며 재판관이 들어올 때 모두 일어나라고 날카롭게 외치는 법정 서기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는 자를 무기력하게 하는 선언이다. 경험 많은 변호사 루이니져(Louis Nizer)는 “공판을 시작하는 날 아침에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보여 주는 모든 신체적 징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한다. “손에는 진땀이 나고 이마는 젖어 있으며, 볼은 홍조를 띠거나 창백한 병색이 된다.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일부러 하품을 하며 입술은 바싹 마르고 화장실을 자주 드나든다.”7) (148.2)
 끝에 있는 심판 곧 천년기 후에 있는 심판은 그와 같은 심리적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랜 후의 일은 그것의 공포를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다. 오래 전 일이며 멀리 떨어져 있는 십자가 사건과 이 심판을 결부시키는 신학적 고안은 우리를 훨씬 덜 불안하게 한다. (148.3)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심판이라? 기겁할 일이다! (149.1)
 둘째 이유는 본질적으로 첫째 이유와 결부돼 있으며 “조사”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선회한다. 이 사건의 현재성과 연관된 이 단어는 밤낮으로 움직이는 하늘 비밀 조사단의 감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켰다. 그 긴장을 한층 더 고조하기 위해, 어떤 재림교인들은 하늘의 이 대심판이 산 자의 소송을 시작하는 그 순간에 최종적 판결이 내려지고, 그런 후에 곧바로 개인의 은혜의 시기가 끝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삶에서 하찮은 죄나 장난에 탐닉하고 있는 순간에 이 일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한다.8) 조사 심판에 대한 이런 견해가 내가 지적한 대로 결국 그 교리를 완전히 부인했던 밸린저에 의해 주장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9) (149.2)
 재림교회의 이미지에 대해 염려하는 재림교인들은 그들을 쉽사리 오해와 조롱거리로 만드는 우리의 신학의 이런 분야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의 보고(寶庫)” 곧 그것을 통해 온 우주가 “하나님의 사랑의 최종적이고 충만한 표현”을 목도하게 될 수단 이하의 것으로 묘사되는 것을 잠잠히 보고 있을 수 없다.10) (149.3)
 효과적인 대응을 위하여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 교리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이제는 그것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제시할 차례인 것 같다. 이 전체적인 토론에서 “조사”(investigative)라는 단어를 전문용어로 본다면 이 표현에 관하여 두 가지 사항을 질문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1. 처음에 우리가 이 용어를 어떻게 입수하게 되었는가?

 2. 그것을 용도 폐기해도 되는가? (149.4)
 “조사 심판”(investigative judgment)이라는 표현의 기원
 나는 제임스 화잇이 “조사 심판”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1857년 1월 29일자 리뷰(Review)지의 한 기사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견해를 여러 해 동안 지지하였다.11) 하지만 근자에 또 다른 재림교인 저술가는, 엘론 에버츠(Elon Everts)라는 사람이 1856년 12월 17일에 리뷰지의 편집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처음으로 사용했고, 1857년 1월 1일자 잡지에 출판되었다고 주장하였다.12) 그런데 지금 내가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1월 1일자 편집자 칼럼을 위해 보내진 편지에 처음으로 나타난 표현이 어떻게 제임스 화잇이 불과 4주 후에 쓴 기사에서 결정적인 용어가 될 수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상당한 모호함이 존재 하며, 사실을 밝히기 위해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150.1)
 그랬을지라도 그 표현은 초기 재림교인들 가운데서 전반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것은 편의를 위해 사용된 용어였고,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만족히 여기지는 않았다. 유라이아 스미쓰는 더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과 바꾸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13) 그러나 그것을 대치할 적합한 용어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의 신학적 타당성과 관련하여 재림교회 내에서 중요한 동요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물론 엘렌 G. 화잇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선구자들 가운데 널리 받아들여졌다.14) (150.2)
 그 표현을 용도 폐기해도 되는가?
 우리는 “Harvest Ingathering”(추수수확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그냥 “Ingathering”(수확운동)이라는 말로, 그 계획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Missionary Volunteer Society”(선교 자원군 회)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Adventist Youth”(재림교회청년회)라는 용어로, 그 프로그램이 계속 되고 있다. 우리는 “Home Missionary Society”(가정선교회)라는 용어와 그 후에는 “Lay Activities Department”(평신도활동부)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Church Ministries Department”(교회전도부)라는 용어로, 그 프로그 램이 계속되고 있다. (151.1)
 우리는 “SAWS”(재림교회 구호 봉사부)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오늘날에는 “ADRA”(재림교회 발전 및 구제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렇게 바뀌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놀랐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는 데 왜 바꿀 필요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과거를 되돌아 보고 그 변화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ADRA”(아드라)가 우리가 말하고 자 하는 바를 훨씬 더 포괄적으로 표현해 준다. 그 프로그램은 계속 진행되어, 전보다 호전되고 있다. (151.2)
 우리가 “조사”라는 표현을 버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하면 우리가 전술한 실례와 다른 차원에 처하게 될까? (151.3)
 이것이 민감한 문제임을 인식하기 위해 여기서 잠시 멈춘다. 그것은 근본적인 사항에 함부로 손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우리의 신학적인 입장을 변경하거나 용어를 수정하는 것—분명하고 정확하게 혹은 세세하게 밝히기 위함이라 해도—은 믿음을 배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엘렌 G. 화잇의 입장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일한 마음으로 그들이 지금 갖고 있는 빛에만 만족한다면, 그분께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들을 위해 비치고 있는 증가된 빛과 계속하여 증가하는 빛을 받기 위해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15) (151.4)
 물론 이것이 아직 설익은 다른 이론을 교회에 유포시키는 모든 신학적 정신이상자들에게 면허증을 주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무조건 맹종하는 소위 케케묵은 정통교리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다. (152.1)
 이것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조사”(여기서는 용어 자체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 주의하길 바란다)라는 말이 논의 중인 심판을 지지하기 위한 논증을 펴는 데 필수불가결하지는 않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분명히 그 단어가 재림교회의 어휘 속으로 우연히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들어오게 되었음을 기억한다면, 마땅히 받을 존경 이상의 것을 그 단어에 돌리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선구자들이 여러 해 동안 그 단어 없이도 논증을 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끈 덕지게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152.2)
 대체 용어—우리가 “조사”라는 단어를 바꿔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재림 전”(Pre—advent)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대체 단어라는 데 네 가지 이유가 있다.16) (1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