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재림교인들은 하늘 성소에서 “조사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해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심판은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의 둘째 곧 마지막 국면을 대표한 다. 현재 진행 중인 이 심판은 죽은 자나 산 자를 막론하고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 공언하는 자들 개인에 대한 조사와 관련돼 있다. (143.1)
재림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조사 심판 교리보다 더 조롱과 멸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재림교회 밖의 신학 자들의 반응은 사실상 완전히 부정적이어서, 어떤 이들은 그 교리를 1844년의 실패를 해명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재림교회 자체 내에서도 걸출한 지도자들이 때때로 그 개념에 대해 강한 회의(懷疑)를 내비쳤다.1)(143.2)
나는 이런 부정적 반응을 평가한 후, 그 아래 깔려있는 공통 분모는 조사 심판 개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교 보증에 배치된다는 인식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재림교회 목사요 전도자로서 성직을 박탈당한 앨비언 폭스 밸린저(Albion Fox Ballenger)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2)(143.3)
밸린저는 재림교인들 사이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열띤 토론이 벌어지던 1880년대에 재림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이 논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1888년에 논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결국 이 교리가 틀림없이 그의 신학을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3)(144.1)
그러나(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실인데) 1888년 논쟁이 율법 대(對) 은혜의 상호 갈등 양상에 대한 강조와 관련하여 일어났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밸린저의 관심은 사실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재림교회의 경향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고소의 근거는 성소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에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재림교회 율법주의의 핵심이었다.4)(144.2)
따라서 그가 재림교회의 성소 교리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에 착수했을 때, 율법주의의 모든 요소를 뿌리뽑으려 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딱 하나의 예외 곧 그가 완전히 배격했던 조사 심판 개념만을 제외하고는 재림교회의 전통적인 성소 신학의 모든 주된 요소를 그대로 보유했다.5) 재림교회의 이 가르침을 비판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조사 심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교의 보증에 전적으로 위배된다고 보았다. (144.3)
심판—신약의 분명한 가르침
재림교인들은 반대와 논쟁에 대처하는 명수이고, 따라서 우리의 비평가들은 거듭거듭 자신들의 신학적 조소를 이겨내는 우리의 능력 앞에서 좌절을 겪었다. 특히 재림교회는 이 경우에서처럼 비평에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을 때는 귀를 막았다. 조사(investigative) 심판의 개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교의 보증에 저촉된다면, 심판 자체의 개념은 왜 저촉되지 않는가? 심판이 신약의 근본적인 가르침임을 확실한 근거를 내세워서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주제에 관한 수많은 구절 가운데서 여기에 몇 가지를 제시한다. (145.1)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롬 2:5, 6).(7, 8절에 의하면 어떤 이는 “영생”을 얻고, 어떤 이는 “노와 분”을 받는다. (145.2)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26~30). (145.3)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145.4)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벧전 4:17). (145.5)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의문은 심판해 달라고 아우성친다. 미국 노동자의 지도자 지미 호파(Jimmy Hoffa)를 누가 죽였는가? 그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인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않고 사라질 미미한 먼지에 불과했던가? 존 F. 케네디와 마르틴 루터 킹 목사를 암살한 데는 음모가 있었는가? 조직 범죄자들은 어떤가? 특히 청년과 어린이들의 두뇌를 파괴시키고, 정신 나간 운전자들을 통해 도로상에서 수천의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생계를 이어가는 알코올과 기타 유해한 마약 거래자들은 어떤가? (146.1)
또한 매일 법망(法網)을 빠져나가는 지식층 범죄자들은 어떤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거대한 재정 스캔들이 미국을 휩쓸었다. 금융업계의 관리들이 여러 주에서 여러 해 동안 수 십억 달러라는 거액을 무모하게 투자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146.2)
그 당시 뉴욕 주의 현직 주지사였던 마리오 쿠오모(Mario Cuomo)가 그때의 재정 스캔들에 대해 내린 신랄한 논평은 심판과 공의의 전반적인 문제에 의미를 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남자 마이카[뉴욕의 퀸] 출신의 청년인데 빵 한 덩어리를 훔치다 붙잡혔다면, 그들이 당신을 라이커스 아일랜드(Rikers Island)로 보낼 것이고, 당신은 그곳에 간 첫날밤에 비역질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수 십억 달러를 사취한 사업가라면 그들이 나와서 당신과 골프를 칠 것이다.”6)(146.3)
그러면 냉혹한 암살자들이 조용한 밤이나 심지어 백주에 가족에게서 앗아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무수한 죄없는 남녀노소는 어떤가? 실권을 쥔 자들이 무기도 없이 무방비 상태인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할때, 누가 그 이유를 밝히려 들지 않겠는가? 또한 매일 유아와 무구한 어린이들에게 자행되는 범죄(때론 그들의 안전한 가정 안에서 자기 부모나 보호자에 의해)는 어떤가? 조사할 필요가 없겠는가? 세상의 악당들이 석방되어 철면피하게 윤리와 예절을 비웃어야 되겠는가? (146.4)
성경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인간의 초보적인 정의도 재판을 요구하며 아우성친다. 따라서 심판이 그리스도교의 보증 혹은 구원의 계획에 저촉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인간 심리의 매우 기본적인 측면 곧 해명을 위한 요구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147.1)
만일 보증에 대한 우리의 필요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우리의 강조가 유효하지만 그것이 심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흐려놓는다면, 그것을 일종의 망상으로 보아도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교의 보증은 진정으로 신약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심판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이것들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거나 무효화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신학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147.2)
우리는 신학자요 성경 연구자로서 신학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특정 가르침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타당한지를 검사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면 그것은 말씀 경청의 과정을 해친다. 이것이 바로 야심찬 개혁자 마르틴 루터로 하여금 야고보서를 배격하도록 이끈 사고 방식이었다. (147.3)
신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성경의 다양한 기본적인 주제들을 균형적으로(때론 상호간에 긴장이 있다) 유지하고자 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교의 보증을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우리가 성경에 신실하게 남아있기를 원한다면 심판의 개념을 거절할 수 없다. (1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