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키나의 그림자 속에서 제11장 대중 오락 무기 (민수기 25장)
 음식과 성
 여러분이 D-Day 침공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에는 곧 하려고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 동편에 멈춰 서서, 이제 막 그 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침공할 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대신에, 그들은 초점을 잃어버렸고, 겉으로 보기에는 해롭지 않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가공할 원수였던 민간인들과 아주 친해졌기 때문에, 그들의 사명을 거의 포기하게 되었다. (184.1)
 이스라엘 백성들은 몇몇 모압 소녀들이 축제에 그들을 초대하기 위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싯딤(“아카시아 나무들”)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여행객들과 좋은 것을 나누려 하다니 얼마나 친절한가! 음식은 평소의 만나가 아니라 반갑게도 비채식주의자 식사로 바뀌었다. 저 매력적인 방문객들과 함께 벌이는 축제는 아주 재미있었다. (184.2)
 오, 거기에 두 가지 사항을 덧붙이자면, 음식은 모압 신들을 위한 제물로 사용된 것이었다. 정중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먹기를 즐겼을 뿐 아니라 여러 신들의 우상에게 허리를 굽혔다. 이것이 분명히 해야 할 일이었다. 확실히, 그런 행동이 어떤 해도 것이 어떤 해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상숭배적 예배를 참으로 호감있게 만든 것은 그 예배 예식이 저 매혹적인 여인들과의 성관계를 포함했다는 사실이었다. 음식과 성, 이것은 예로부터 남자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둘 모두를 갈망하는 정당한 욕구를 창조하셨지만, 죄가 그것들을 나꿔채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데 사용한다. (184.3)
 민수기 25장 1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 난잡한 성행위를 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한다. (184.4)
 분명히, 이 말씀은 그들이 성적 정욕에 탐닉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들은 또한 영적인 간음도 저질렀다. 그들은 자신들을 그 지역의 신인 바알브올과 결합시켰으며, 따라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십계명 중 첫째 계명을 깨뜨림으로 여호와와 맺은 그들의 배타적이며 친밀한 언약 관계를 범하였다(3절). (185.1)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를 벗어나서, 쉽게 그들을 부패시킬 수 있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고 있었다. 지역 거주민들과의 상호 왕래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실함에 끊임없이 도전이 될 것이었다. 첫 번 째 시험이 닥쳐왔고, 그들은 이미 그 시험에 떨어졌다. 금송아지 배교 직후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 위험에 대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었다.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출 34:15). 후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래에 그들이 우상숭배 때문에 더 많은 골치를 앓게 될 것이라고 확언하셨다.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라고 말씀하셨다(신 31:16). (185.2)
 신실치 못한 정탐꾼들에 의해 주도된 반역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옷단에 청색 끈을 포함한 술을 달 것을 지시하도록 만들었다(민 15:37-40). 그분은 이것이 그들이 눈과 마음의 유혹을 좇는 대신에 그분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행함으로써 그분과의 거룩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셨다(39절).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정신과 감정과 감각을 대표하는 그들의 마음과 안목을 따르려는 강력한 경향이 있었다. 어떤 나무의 열매가 하와에게 그러하였듯이,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 것들은 치명적으로 위험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도를 좇기만 한다면 안전할 수 있다. (185.3)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온갖 향상된 교육이나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감각적 유혹의 급증과 더불어, 우리는 그 못지않게 여호와와 그분의 계시된 뜻 대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따를 위험이 있다. 먼저 마음을 정하고, 그러고 나서, 그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합리화시켜 버리기는 식은죽 먹기다. 결국, 우리는 저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의 원시 문화에게 말하고 있었던 때보다 훨씬 개화되어 있지 않은가. 다른 세기, 심지어 최근 세기에 살았던 어떤 사람도 제대로 우리 상황을 이해하고 말할 수 없다. 옛 청사진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186.1)
 그렇지 않다! 지혜자는 이렇게 바르게 말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이것은 순환론적 역사관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지식과 기술의 진보는 기본적 인간 본성을 변경시킬 수 없다. 세부사항은 바뀔지 모르지만, 유혹들과 그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동일한 범주들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 담배, 자동차, 그리고 인터넷이 나오기 전인 2천 년 전 로마제국 시대에 사셨지만,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히 4:15). 우리가 여전히 동일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성경이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처럼 꼭같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거룩한 원칙들의 계시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들을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 것은 근시안적이고, 오만하며, 그저 우둔한 짓일 뿐이다. (186.2)
 두 말할 필요 없이, 이스라엘이 바알브올과 “동침”하였을 때, 그것은 거룩하신 남편의 의로운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민 25:3). 왜 하나님께서 속상해하셨을까 의아해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집에 와서 보니 아내가 외간 남자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남편이 투기로 분노하여 원수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어떤 보상도 받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잠 6:34,35). 이러한 “투기”는 째째한 시샘이 아니다. 이것은 쌍방이 엄숙하고 영원한 사랑의 언약으로 그렇게 하기로 동의한 배타적인 친밀성에 대한, 적법한, 열성적인 보호이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6,7). (187.1)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음
 뉴스를 청취하거나 역사책을 끄집어 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자신들이 법 위에 있으며, 살인도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다고 간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부조들의 시대 동안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와 닮았다. 즉, 함무라비 법전은, 고위층의 시민이 더 낮은 지위의 사람을 죽였다면 그는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을 죽인 경우보다 훨씬 가벼운 형벌을 받도록 허용하고 있다. (187.2)
 반면 이스라엘의 법은 형법학 분야에서 “기회 균등 처벌”(equal opportunity punishment)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으로 동일한 경쟁 조건을 만들을 만들었다(레 24:17, 19-22; 민 35:31). 종교적 법 아래에서, 지도자나 족장은 범죄했을 때 별도의 속죄제 제물(레 4:22-26-숫염소)를 가져가야 했던 사실로 드러나듯이, 하나님 앞에서 추가적 책임을 졌다. 죄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가장 큰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제사장에게 놓여있었다. 그의 속죄제 제물은 전체 공동체에 대하여 요구되는 그것과 동일하였다(3-12절, 13-21절). (187.3)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실수를 범하여 여호와의 명망에 해를 입히거나 백성들을 실족케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향력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셨다. 그처럼,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직으로부터 “해고”되고 불살라졌으며(레 10장),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으며(민 12장), 고라와 그의 무리들은 산채로 땅에 묻혔거나 불살라졌다(민 16장). 그리고 모세와 아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민 20장). 그러므로, 요단강 근처 싯딤에서의 반역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분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민 25:4,5). (188.1)
 모세는 그들의 지파 지도자들(문자적으로, “백성의 머리들”)이 배교로 이끄는 길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처형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188.2)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경배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비교해 보라. 그 때, 하나님 편에 서기로 선택한 레위 지파 사람들이 신실치 못한 동료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형했다(출 32:26-28). (188.3)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은 그들 중에 나타난 어떤 우상숭배이던지, 그들의 친족을 살려두거나 불쌍히 여김 없이 항상 근절시켜야 할 것이었다(신 13장). 그런 처사가 가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상숭배는 그 나라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다. (188.4)
 다른 신들을 의지하거나 심지어 이런 접근을 침묵으로 옹호한 어떤 이스라엘 백성도 전체 국민을 위태롭게 하였다. 그러므로, 마치 오사마 빈 라덴이 뉴욕 시에서 대량 살상 무기를 휘두르고 있기나 한 것처럼,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길을 가고 있는 이와같은 사람들을 즉시 죽여 멈추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상숭배를 자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가 누구든 어리석었으며, 하나님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잡히면, 그 때는 성경공부의 시간이 아니라 사형의 시간이었다. (189.1)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국가가 아닌 교회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곁길로 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우리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심지어 그들의 사지를 자르거나 할 생각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여호와의 명망, 그리고 그분의 백성과 그들의 사명의 절개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 어떤 사람도 우리로 하나님을 좇는 데서부터 이탈하도록 하거나 다른 고수(鼓手)들의 박자에 맞추어 행진하고 있는 다른 “믿음들”에 동화되도록 이끌도록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