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때는 바알이 죽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 여름이었다. 항상 가나안 신들을 섬기려는 유혹을 당하는 이 사람들에게 사무엘의 기별은 애매하지 않았다: 바알은 죽었고, 여호와는 살아 계셨다. 그리고 그는 원하면 아무 때고 천둥과 비를 보낼 수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 후의 역사 속에서 가끔 그 요지를 기억하기 어려웠다 하더라도 사무엘은 그 당시에 그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였다. (106.1)
 사무엘의 연설의 결론이 그토록 우렁찼으므로 그의 발표의 논리가 요구하는 반응이 도출되었다: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19절). 회개였다! 백성들은 왕을 구하는 그들의 악한 요구로부터 돌이켜 여호와만 섬기고자 하였다. (106.2)
 그러나 그들을 회개의 기점까지 이끌고 온 후 선지자는 갑자기 열정이 식어버렸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20절). 한때 백성들은 고집스럽게 왕을 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리고 사무엘의 실감나는 수사(修辭)도 그들을 달리 설득시킬 수 없었다(8:19, 20). 그들은 그 같은 고집으로 회개를 하겠다고 버틸 수 없었는가? 왕권이 그렇게도 불가피한 것이었는가? 만일 여호와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을 곧 “회개하셨다”(15:35, 「제임스왕역」)면 백성들은 왕을 요구한 것에서부터 회개할 수 없었을까? (106.3)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을 위하여 중재하려는 자신의 기꺼운 태도를 그들에게 확신시키면서 이스라엘을 왕권의 길로 가도록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왕이 있든지 없든지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진리인 것이다. 사실상 사무엘은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무조건적인 요소를 말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12:22). (106.4)
 그러나 동시에 사무엘은 그들의 여호와와의 관계의 조건적 요소를 백성에게 상기시켰다: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25절). “멸망한다”라는 말은 사울의 짧은 통치와 비극적인 그의 버림받음이 기록된 13-15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자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것이다. 사울은 곧 멸망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왕과 백성이 멸망할-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감-때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여전히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었다. (107.1)
 다시 한번 성경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그의 뜻을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할 선택권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 배우들은, 비록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로 섬긴다할지라도 결점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그러나 자주 표준 검사에서 낙방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사사와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죄와 투쟁하였다. 그들도 역시 반역심, 저항심, 상한 자존심과 싸워야 하였다. 최상의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가끔 하나님의 계획 A와 하나님의 계획 B 사이에서 우왕좌왕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항상 바른 것만을 택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107.2)
 그러나 이 모든 것 속에서 여호와는 여전히 상황의 주인이시고 그의 백성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백성의 혼탁한 역사 속에서도 여호와의 강력한 역할을 가릴 만한 인간적 요인은 없었다. 폴친이 말한 것처럼,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교통 정리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한다”(Polzin, Samuel, 124). (107.3)
 고통스런 왕정의 길을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 가실 때에 보이신 여호와의 손길을 더듬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왕을 세우라고 명하셨다(8:7, 9, 22); 여호와께서 사울을 택하시고 사무엘에게 인도하셨다(9:15-17); 여호와께서 사울이 예언하도록 하셨다(10:10); 여호와께서 제비로써 사울을 공개적으로 택하셨다(10:19-24); 여호와께서 길르앗 야베스 싸움에서 사울에게 승리를 주셨다(11:6, 13); 길갈에서 사울은 “여호와 앞에서”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11:15);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의 요구의 응답으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우레와 비를 내리셨다(12:18). (108.1)
 그러나 끈질긴 여호와의 임재는 인간의 자유와 신의 최상권 사이의 긴장의 해결이 쉬운 것이 아님을 늘 상기시켜 줄 따름이다. 그리고 역설은 12장의 사무엘의 마지막 말에서 뼈저리게 분명해진다. 한편으로는 영광스런 약속이 있다: “여호와께서는 ...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22절). 다른 한편으로는 섬뜩한 경고가 있다: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25절). (108.2)
 요약: 사울의 통치의 문턱에서
 저자가 13장에서 사울의 실제적 통치를 묘사할 때에, 첫 사건은 사울의 종말의 시작을 알린다-마치 그의 통치가 왕정의 운명과 왕의 인도를 받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설명하는 비유인 것처럼. 요약하자면, 저자가 역설(paradox)과 양 극단적인 묘사(pendulum)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방법을 주목하는 것은 유익하다. (108.3)
 만일 7장의 마치는 장면이 이상(理想)-경건한 사사(사무엘)의 지도력 아래서 백성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함-을 나타낸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빈번히 그 표준에 다다르지 못했다. 사사가 이상적이었다면, 사사기는 왜 그런 혼돈 속에 끝나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왕이 요구된다는 마지막 말을 큰 소리로 하는가?(삿 21:25). (108.4)
 경건한 엘리는 악한 아들들을 길러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악의 와중에서 여호와께서는 경건한 한나와 엘가나를 감동시키셨고, 그들은 사무엘을 그분을 위한 봉사에 봉헌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경건에도 불구하고 사무엘 역시 실수하였고, 그의 아들들의 악은 백성들로 왕을 요구하게 하는 방아쇠가 되었다. 사무엘의 저항을 무시하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그들의 군주로 택하셨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었다(9:2). 백성들, 사사들, 제사장들, 선지자들,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상에 다다르지 못하였다. 왕도 역시 그럴 것인가? 온 이스라엘이 그 대답을 알았다. 그리고 저자는 그 이유를 말해야 한다.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악 속에서 선을 끄집어내시려고 늘 애쓰고 계신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백성이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게 하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셔야 하는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쉬운 대답은 없는 것 같다. (109.1)
 ■ 말씀을 적용함
 1. 부모들과 그들의 자녀들. 사무엘과 엘리의 아들들의 못된 본보기를 통해 볼 때 자녀들의 실패에 대하여 부모들은 어느 정도로 책임을 져야 하는가? 현재 나의 됨됨이에 대하여 나의 부모들은 어떤 칭찬과 어떤 비난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상황에서 잠언 22:6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109.2)
 2. 이상으로 돌아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최상의 이상인 계획 A에서부터 계획 B로 옮겨가도록 허락하실 때에 계획 B가 표준이 되는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아니라면 왜 아닌가? 차선책은 용납할 만한가? 내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세우신 계획 A를 나는 바라보고 있는가? 그 계획은 무엇인가? 아직도 그것은 나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이스라엘이 왕권에 관련하여 가졌던 갈등의 이야기가 그런 문제를 당한 나에게 어떤 지침을 줄 수 있는가? (109.3)
 3. 하나님의 뜻을 앎. 비록 사무엘과 여호와의 보시기에 왕을 허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는 것처럼 생각되었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달라는 요구를 속히 허락하신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좀처럼 큰 소리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위원회를 통하여 일하도록 허락하신 오늘날 타협적인 B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적당한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제안된 방향이 실지로 하나님의 타협안인지, 아니면 단지 인간적인 묘안인지를 드러내는 표지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110.1)
 4. 부드러움이냐 단호함이냐? 제8장의 사무엘의 연설은 기독교인의 행동에 있어서 강경한 노선이 부드러운 설득의 방법보다 덜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가? 사람들을 다룰 때, 언제는 부드럽고 언제는 단호해야 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 자신에 대하여는 어떤가? 각 입장에 대하여 어떤 성경적 지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다른 상황이 다른 설득 방법을 요구하는가? (110.2)
 5. 잘못하는 지도자들. 만일 성경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사사들과 왕들에 관하여 비판하는 것이 명백하다면, 일반 신자들도 언제 비판이 맹목적인지를 알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택된 종들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언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지도자가 잘못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나의 책임은 무엇인가? 그 지도자에게? 그 교회에게? 나 자신에게? 그것은 내가 신경을 써야 할 문제인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아니라면 왜 아닌가? 신명기 18:21, 22의 권고는 이미 신임서를 얻은 선지자에게 해당되는가? (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