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로, 사울이 권력을 잡게 된 과정 속에서 주요 도시인 기브아와 길르앗 야베스는 사사기의 초기 기록에서 둘 다 심한 오명을 얻었다. 사울의 고향 기브아는 그 여인이 해를 당한 곳이며(삿 19:12-16), 사울이 구원한 길르앗 야베스는 베냐민 지파를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과 연합하기를 피함으로 언약의 책임을 거절한 곳이다(삿 21:9).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그 도시를 멸망시켰으며, 훼파하되(히브리어, 헤렘[ḥerem]) 살아 남은 베냐민 남정들을 위하여 400명의 처녀를 남겨 두었다(10-14절). 그러나 이 새로운 사건 속에서도 야베스는 나하스와 조약을 맺으므로 다시 하나님의 언약을 범하려고 하였다(삼상 11:1). 그러므로 베냐민 사람 사울은 악한 기브아와 언약을 범하는 야베스의 후손이었다. 길르앗 야베스와의 결속은 사울의 죽음 후에도 분명히 드러났다. 왜냐하면 그 도시가 몰락한 왕의 시신을 처리하였으며(31:11-13), 얼마 동안 그 집안에 대하여 충성스럽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삼하 2:4-7). (101.1)
 사사기 19-21장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또 다른 고리는 11장에서 어렴풋이 보인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브아에 와서 강간범과 살인범의 처벌을 요구할 때에 그들은 이렇게 요구하였다: “이제 그 사람들을 끌어내어, 우리가 [그들을] 죽여 버리게 하라”(삿 20:13, 히브리어). 사울이 야베스를 구원한 후에 백성들은 같은 말로 같은 요구를 하였다: “그들을 끌어내어, 우리가 그들을 죽이게 하라”(11:22, 히브리어). 성경 전체에서 이와 같은 말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이곳뿐이다. (101.2)
 그러면 이 둘째 경우에서 누가 범인인가? 그들의 처형을 요구하는 부르짖음(12절)은 이 장의 해석을 까다롭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범인을 사울의 왕권을 거절한 “비류”라고 본다(10:27). 11:12의 일반적인 번역들은 부정사를 끌고 들어오든지(“사울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던 자가 누구냐?”[두 개의 히브리어 필사본, 「70인역」; 비교 시리아어 성경 및 타르굼]), 아니면 다른 의문부호를 부가함으로써(‘사울이 우리를 다스리겠느냐?’하고 묻던 자가 누구냐?”[「새국제역」, 「새개정표준역」]) 그런 해석을 지지한다. (102.1)
 그러나 히브리어를 자연스럽게 읽으면 그 뜻은 단순히 “사울이 우리를 다스리겠다고 말한 자가 누구냐?”이다. 그렇게 읽으면 범인들은 왕을 요구했던 장로들이 되는 것이고(8:4, 5), 사울의 왕권을 지지했던 사람이면 다 해당되는 것이다. 폴친은 히브리어를 자연스럽게 읽고 백성들이 지금은 왕을 구했던 악한 요구를 회개하려고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사울을 전통적 위대한 사사들 중 하나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보았다. 만일 성령이 사울에게 그토록 강하게 역사하신다고 하면, 열방과 같이 왕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백성들은 생각하였다(Polzin, Samuel, 108-114). (102.2)
 그러나 누가 범인인가에 상관없이 사울은 처형에 관한 말을 중단시켰다(11:13). 그러자 사무엘은 백성들을 길갈로 불러서 “나라를 새롭게” 하였다. 그러나 잠깐! 사울은 이미 사석에서 기름부음을 받고(10:1) 공석에서 왕으로 알려지지 않았던가?(10:24). 그런데 왜 왕권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한가? 아마도 11:12의 히브리어를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 결국 맞는 것이다. 어쩌면 백성들은 왕권을 거절하려고 했던 것 같다-실지로 그들은 아마도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새롭게 하다”고 번역된 단어는 “항상 실지로 파괴되고, 상하고, 상실된 것을 새롭게 하고 회복시키는 일을 가리킨다”(Polzin, Samuel, 110). 그 단어가 언급된 여덟의 경우는 아사의 제단 수축(대하 15:8), 요시아의 성전 회복(대하 24:4, 12), 그리고 이사야에 의해 약속된 “황폐한 성읍”의 회복(사 61:4) 등을 포함한다. (102.3)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흥미로운 질문들로 박동친다: 만일 사울이 확고한 품성을 가진 역동적인 영적 지도자였더라면 그가 백성을 회개와 영적 쇄신으로 인도하여 왕이 없는 하나님의 이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신이 사울 위에 크게 임하셨을 때에 그는 그 상황을 처리하러 일어나서 원수를 패퇴시켰다. 그런데 그때에도 그는 백성들을 불러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라고 하였다(삼상 11:7). 그는 자기의 두 발로 서서 이스라엘을 실지로 인도할 마음이 없었는가? (103.1)
 그리고 사무엘은 왜 왕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성경에 설명되지 않는 이유로 그는 백성을 하나님의 이상적 계획 A로 인도하려 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따르려고 했을지라도. 그는 왕권 즉 하나님의 계획 B를 고수하려 하였다. 사울과 백성들은 사무엘을 순종하여 길갈로 따라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왕권을 새로이 하였다. 독자는 저자의 눈물 젖은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왕정이 완전히 몰락한 후에 이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서 그 큰 구원을 이루신 후에 백성들이 양심의 소리에 신실했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 A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갔던가? (103.2)
 ■ 말씀에 들어감
 1. 왕권. 왕권 문제에 관심을 두면서 12장을 읽으라. 노트에 하나님, 사무엘, 백성 등, 세 항목을 만들어라. 해당되는 항목 밑에 이스라엘에 왕권을 세우는 데 있어서 누가 책임이 있는지를 밝히는 구절들을 기록하라. 발견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그대는 누가 가장 책임이 크다고 생각되는가? 간단한 문단으로 그대의 반응을 설명하라. (103.3)
 2. 수용과 순종. 제12장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반응하시는 두 가지 다른 길을 반영하는 구절들을 두 줄로 나누어 기록하라-첫째는 백성들의 순종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것과 상관없이 그분의 사랑과 수용적 태세를 드러내는 말씀; 둘째는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버림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 요약적인 진술로 이 두 목록의 관계를 조화시키든지 아니면 묘사하든지 하라. (104.1)
 ■ 말씀을 탐구함
 왕권: 아직도 회개가 가능한가?(12:1-25) (104.2)
 제11장의 행복감에 도취된 마지막 구절과 거기서 사울을 왕으로 정함을 “크게 기뻐하”는(15절) 것으로부터 우리는 12장의 왕권의 어두운 면으로 신속히 들어간다. 거기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17절) 깨닫게 하려고 애썼다. 그의 연설은 길갈 사건의 한 부분이었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축하객들을 썰렁하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백성을 비판하기 위하여 말하지 않고 자연계의 힘을 불러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104.3)
 이 두 장의 이야기가 너무 대조적이어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사무엘서 상의 저자가 다른 자료들에서 가져왔다고 생각한다-한 자료는 왕정을 선호하고, 다른 자료는 이에 반대한다. (104.4)
 온건한 비평가인 랠프 클라인(Ralph Klein)마저도 “분명히 11, 12장은 한 사람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Klein, 113). (104.5)
 그러나 왕정의 몰락 이후에 저술하는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장은 고의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왕권을 실패로 끌고 간 모든 복합적인 요인들을 섬뜩하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비록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날카로운 말을 했을지라도 독자는 사무엘 자신도 책임의 일부를 져야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신을 변호하고, 백성들이 그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는 역시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12:2)고 말한다. 왕을 요구하게 된 발단이 바로 이 악한 아들들에게 있었다(8:2-5). 사무엘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불러 그의 무죄를 증거하게 하였다(12:5). 백성들은 동의한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 그 나머지 이야기의 증인으로 남아 있다. (104.6)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백성들에게 다시 이른다. 그들은 목이 곧았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셨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의 내용이 그들이 왕을 요구한 것에 이르자 사무엘의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아마도 이 사실은 이 장의 사건들이 11:5의 길갈의 경축 후 몇 년이 지나서 발생했다는 표이다). 사무엘은 나하스의 침공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구하게 하였다고 말한다(12:12). 그러나 8:2-5에는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사무엘의 악한 아들들에 대하여 백성이 질렸기 때문에 처음으로 왕을 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 장에 기록된 사건을 따르면 사울이 나하스를 패퇴시킨 후에 왕권을 새롭게 하자고 주장한 사람은 사무엘이었다(11:14). (105.1)
 그러나 이것은 선고였지 의논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도 사소한 것을 늘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백성과 왕에게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기별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한 음향 효과를 사용하였다: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12:17). (105.2)
 밀 수확 때에 천둥과 비는 참으로 겁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에는 여름에 비가 전혀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사무엘의 요구를 들어주셨을 때에 백성들은 깊은 인상을 받고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여 서 있었다(18절). 그러나 천둥과 비는 단순히 사무엘의 권위의 확인이나 회개하라는 두려운 부름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가 비를 주관하는 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놀라운 것이었다. 가나안 신화에 따르면 비는 겨울에 내리는데, 왜냐하면 그때가 바알이 살아 있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우기의 겨울과 건기의 여름이라는 규칙적인 리듬은 추분과 춘분 때의 인간적 다산(多産)의 광란적 예식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었다(적어도 바알의 추종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