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을 “경고”하고, 그리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9절)는 명령들을 겨우 부분적으로만 이행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문체상의 이유로 「새국제역」과 「새개정표준역」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왕에게 기대되는 행동에 관한 사무엘의 묘사를 긴밀히 연결시킴으로 11절 시작에 있는 히브리어 “그리고”를 생략하였다. 그래서 여호와는 하나님의 경고로서 왕권의 부정적인 목록만 사무엘에게 주신 것 같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제임스왕역」과 「새개정표준역」은 왕의 행동에 관한 사무엘의 설명을 시작하는 그리고를 살렸기 때문에 왕의 행동의 묘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무엘이 만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그리하여 8:10, 11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사무엘은 왕을 구하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렀다. 그리고 그는 말하였다: ‘이것이 ... 왕이 할 일이다.’ (90.2)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8:9“왕의 제도”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그들로 왕의 미쉬파트(mishpaṭ)를 알게 하라.” 「제임스왕역」에는 “그들 위에 다스릴 왕의 방법(manner, 미쉬파트)을 알게 하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보통 “심판”이나 “공의”로 번역된다. 헤세드(ḥesed, “인자”), 그리고 체데크/치드카(ṣedeq/ṣidqah, “의”)와 함께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세 신학적 용어들 중의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것들 세 가지 중의 하나이다(렘 9:24). 이것은 역시 미가 6:8의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것들 중에서 선두를 달린다. “공의를 행하며”미쉬파트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성과 행동에 직접 뿌리를 두고 있는 이 미쉬파트는 이 땅의 왕의 품성과 행동의 주요 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위대한 왕의 시편인 시편 72편에서 시작하는 말은 이렇게 선포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미쉬파트]을 왕에게 주”소서!(1절). (90.3)
 그러나 사무엘상 8장10장에서는 미쉬파트“관행,” “길,” 혹은 “제도”(「제임스왕역」의 “manner”와 비교하라]에 더 가까운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10:25에서 사울이 공식적으로 왕으로 선포될 때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미쉬파트]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미쉬파트는 신학적 배경 속에서 두드러진 “공의”의 요소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왕권에 대한 예언적 비평이 없고, 10:25는 사무엘이 왕과 백성의 권리와 특권을 단순히 기록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왕의 권력의 범위와 그 제한성을 자세히 기록한 주석이다. 요컨대, 10:25는 왕권에 관하여 잘 기록되고 보존된 온전하고 균형진 묘사를 가리킨다. (91.1)
 그와 같은 왕의 미쉬파트8:9에서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명하사 백성들에게 말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대로 8장의 사무엘의 연설은 균형진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그는 왕이 그들의 자유를 줄이고 그들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는 모든 길을 열어 놓았다. 시편 72편에 기록된 것과 같은 여호와의 택하신 왕이 백성을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할 선한 일들 즉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일 처리를 해주는 것, 고통당하는 자들과 곤핍한 자들을 변호하고, 압제자들을 분쇄하는 등의 일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사사기 17:6; 21:25에 암시된 바 왕권의 기여 즉 혼란한 사회에 왕이 질서를 확립시키는 기여를 사무엘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사무엘이 부정적으로 말한 것들도 유별난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것들은 여타 경우에서도 꽤 적절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다스리기 위해서는 왕에게 재산과 인력과 수입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왜 십일조(8:15, 17)가 그렇게 압제적인 것으로 보였는가? 만일 사무엘이 “왕의 제도”에 관하여 균형진 묘사를 했더라면 그럴 필요도 없었고,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91.2)
 백성들의 저항은 그들이 사무엘의 연설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는 가려진 의도를 파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19절). (92.1)
 사무엘이 하나님께 백성들의 말을 전하였을 때에 또 한 번 여호와께서는 사무엘보다 더 너그러우셨다. 그분은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 백성의 악함을 인하여 그들을 후려내치지 않으셨고,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22절). 사무엘은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없었다. 그는 백성들을 집으로 그냥 돌려보냈다. (92.2)
 요컨대, 8장이 왕권 문제를 거론할 때에 미묘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사무엘과 여호와께서는 백성이 왕을 구하는 것이 악하다는 것에 양편이 다 동의하였다. 그러나 여호와는 너그러우셨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그 백성을 위하여 이상에 못 미치는 제도에 적응하실 준비가 되셨다. 그러한 너그러움은 사무엘에게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부작위(不作爲, omission)의 죄(그의 아들들을 훈육하지 아니함)와 작위(作爲, commission)의 죄(그들을 사사로 임명함) 때문에 백성들이 악한 요구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함으로 깊은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이 사무엘의 인간적인 국면이 백성을 왕정을 향한 험한 길로 인도하기를 거부하는 마지막 경우는 아니었다. 이스라엘이나 사무엘에게서 결점을 찾고자 할지라도 그러한 결점이 여호와께서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사무엘은 아직도 그의 선택된 사자였다. (9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긴장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결정이 여호와로 하여금 계획 A로부터 계획 B로 바꾸게 하는 촉박한 상황에서 그의 백성은 원래의 이상과 하나님이 재가하신 변형물 사이에서 자기들의 찢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전심으로 그리고 영원히 그 변형물을 수용하는가? 우리가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우리는 우리도 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92.4)
 ■ 말씀에 들어감
 1. 인간 사울. 사무엘상 9-11장을 읽으면서 사울의 개인적 특성들을 자세히 기록하라. 이 세 장에만 기초하여 간단하게 그 사람의 성격을 묘사해 보라. 여기서 그대는 여호와의 뜻에서 떠나갈 경향을 찾아볼 수 있는가? (93.1)
 2. 하나님의 선택. 9장10장에서 사울이 하나님의 선택한 왕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내용들을 적어 보라. (93.2)
 3. 사울은 참으로 왕이었는가? 11장은 사울의 초기 정치를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왕의 통치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울의 초기 왕권이 임시적이었다고 암시하는 구절의 내용을 나열하고 요약하라. 그런 구절들의 내포된 의미들을 한두 문단으로 토의하라. (93.3)
 ■ 말씀을 탐구함
 주저하는 왕, 강요하는 선지자(9:1-27)
 제9장은 스타일과 장면의 극적인 변화를 보인다. 백성과 사무엘 사이의 대치 상황은, 사무엘과 하나님 사이의 대치 상황이 그런 것처럼 제쳐 놓여진다. 비록 선지자는 반대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시려고 한다. 그래서 사무엘이 왕에게 가지 않으려 하니 여호와께서 왕을 사무엘에게로 데려오신다. 바로 이것이 이 장의 서두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9장 끝에 사울과 사무엘은 함께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운명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판명난 길로 함께 접어들었다. (93.4)
 외적으로 매우 인상적인 사람인 사울은 9:2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성경은 왜 여호와께서 신체적으로 유리한 자를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되게 하셨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셨을 때, 그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16:7) 본다는 사실을 사무엘에게 상기시키면서 육체적으로 탁월하지 않은 사람을 택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 중에서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는 사람을 택하셨다(9:2). (94.1)
 하지만 이야기에 나오는 사울의 모습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그는 유연하고 순종적이며, 심지어는 불안정할 정도이다. 아버지의 나귀를 찾아 헤맬 때, 그는 아버지가 사울도 나귀처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시면 어쩔까 하고 걱정하고 있다(5절). 그는 자기 종에게 자문을 구한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인도한 사람은 그 종이었다. 종은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6절)라고 말한다. 이 말은 느부갓네살의 공격으로 성전과 왕을 잃어버릴 나라에 대한 저자의 염려를 들려주고 있다. (94.2)
 사울은 선견자를 방문하는 것에 바로 동의하였으나 선물을 바칠 것이 없어서 걱정한다. 그의 수단 좋은 종은 그 대답을 알고 있었으며, 돈을 제공하면서(8절)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치게 하겠나이다”(8절)라고 말한다. “우리(의 갈) 길”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은 사울의 지식과 행동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저자의 방법이었을까? (94.3)
 마을에 가까이 이르자 사울과 그의 종은 방향을 묻는데, 처음에는 소녀들에게 묻고(11절), 그 다음에는 사무엘을 만나서 또 묻는다.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울은 사무엘에게 선견자를 찾을 방법을 묻는다(18절). 사무엘은 자신을 밝히고 사울을 위하여 큰 일이 있음을 알리면서 청한다(19, 20절). 그러나 사울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이며, 자기 아버지는 그 지파 중에 가장 미약하다는 말로 그런 일은 가당치 않다고 하며 움츠러든다. 그는 “하필이면 내가?”라고 묻는다(21절). (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