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6장의 서두는 이제 구원을 위한 시기가 되었음을 확신케 하여 준다. 뒤따르는 구절의(13-27) 가계는 이 사역을 위해 적절한 인물인 모세와 아론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90.1)
출애굽기의 가계를 창세기 46:8-27의 가계와 비교할 때 우리는 눈에 띠는 차이가 있음을 알게된다. 이들 가계도는 야곱의 첫 세 아들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대하여는 기본적으로 같다. 출애굽기 6장의 나머지 가계도는 레위 족속의 증가를 내포하고 있다. 모세와 아론은 레위의 후손이며, 그들이 이 가계도의 초점이 됨이 분명하다. 도입부(6:13, 14a)와 결론 부분(6:26, 27)은 이 가계도가 이들 두 형제들에 관한 것임이 분명하며 그들은 실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고자 쓰시고 있는 인물들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90.2)
성경의 족보는 적출(嫡出)에 관하여만 언급한다. 이들 두 인물들이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혈통이 부조들의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적출 출신이어야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가계가 쓰여진 것이다. (90.3)
이 가계는 분명히 아론을 모세보다 상위의 사람으로 강조하고 있다. 아론이 모세보다 앞서 언급되어있다. 그의 아내와 네 명의 아들과 한 명의 손자의 이름이 언급되어있다. 모세 가족들의 이름은 언급이 없다. 사람들은 모세의 경우 그의 지도력으로 인해 그다지 존경이나 존대가 필요 없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론의 경우 상당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실로 중요한 인물임을 증명할 수 있는 상당한 노력이 취해졌다. 족보 끝(6:26)에 있는 요약 부분의 언급은 통상적 이름의 순서를 바꾸어 모세 앞에 아론의 이름을 적었다. 우리는 또한 아론의 가족이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된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혈통에 대한 증명은 이스라엘의 평민들보다 제사장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가 행하는 제사장 직분이 올바른 존경을 받도록 확실히 하시기를 원하셨다. (90.4)
거룩한 방법
정해진 시간이 되었다. 혈통으로 또 행동으로 적법인 인물들이 지도자가 되었다. 이제 애굽의 왕에게 나갈 올바른 방법을 취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장(6:28-7:7)에서 그들의 필요를 친절하게도 공급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 방법으로 인하여 예상되는 결과를 조명해 주신다. (91.1)
첫 단계는 하나님께서 모든 과정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라”라고 말씀하신다.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고하라”(6:29). 모세의 모든 기별과 그 내용은 거룩한 분에게서 나온 것이다. 모세가 신적 계시의 기별자라는 의미에서 단지 그 혼자만이 진정한 의미의 지도자이다. (91.2)
모세는 자신이 “입이 둔(鈍)한 자”라며 거절하였다(30절). 그는 말을 잘 하지 못했거나 애굽어를 너무 많이 잊어버렸기 때문에 공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다소 불편함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개념치 말라, “아론이 대언자가 되리다”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말을 하면 아론은 그의 말을 바로에게 전할 것이다. (91.3)
본문은 종종 선지자의 진정한 사명을 보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과 같았으며 아론은 바로에게 선지자와 같았다. 분명한 개념은 선지자는 그의 말을 작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들은 바를 바로 전할 뿐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바로는 하나님의 기별을 듣게 될 것이며 확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가도록 놓아주게 될 것이다. (91.4)
기별을 듣는 가운데 4중의 연속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다.
(2) 하나님께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며, 바로는 듣게 된다.
(3) 하나님의 전능하신 심판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내신다.
(4) 이로서 애굽은 “나는 여호와로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92.1)
본문은 또한 분명히 새롭게 된 모세의 사명에 관한 결론 부분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음장의 도입 부분이다. (92.2)
강퍅해진 마음
4중의 연속적인 사건의 첫 번째 단계인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것에 대한 더 자세한 토를 달고자 한다. 이 문제는 선택의 자유에 관심이 많은 서구문화 속의 성경학자들로 하여금 많은 시간을 소요케 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으로 바로에게 그와 같은 악한 일을 허락했으며 그 대가로 그를 처벌하셨는가? 공의로운 처사인가?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 (92.3)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가 몇 가지 선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독단적으로 무엇인가를 결정하시지 않으시며 애굽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진행할 뿐이다. (92.4)
바로가 가진 선택의 자유는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법으로도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했다고 하는 성경절이 9-10개인 반면에 6개의 다른 성경절은 단순히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만드는 요인 없이 그의 마음이 강퍅케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7:13, 15, 22; 8:19; 9:7, 35 참조). 바로가 스스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했음을 설명하는 다른 3개의 구절은 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까닭에 성경은 하나님과 바로가 모두 마음을 강퍅케 함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92.5)
성경 줄거리의 흐름은 바로가 자유로운 선택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출애굽기 10:1은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하셨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하지만 계속하여 읽어 나가면 바로의 신하들이 모세와 아론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10:7). 바로 스스로도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대표자들만 가도록 허락하였다. 후에 그는 정확히 누가 떠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거론함으로 함께 떠나는 것을 금하게 된다(10:8-11). 모세와 아론은 바로가 마음을 바꿀 것을 계속하여 간청한다. 애굽인의 반응과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은 만약 그들 양쪽 모두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이 한 개인의 선택할 의지를 독단적으로 빼앗은 행위로 이해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93.1)
그러면 당신은 아마도 하나님과 모세가 왜 동일한 용어를 쓰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가능한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애굽 왕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음을 분명히 하시고자 하셨다. 모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이 자신들의 백성 가운데서만 그리고 자신들의 지역적인 영역 안에서만 역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애굽의 왕이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세뿐만 아니라 바로에게도 증명코자 하셨다.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실 뿐만 아니라 바로의 마음 또한 움직이고 있다는 명백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93.2)
출애굽기와 모세오경을 북미주의 대학생들에게 수년간 가르치면서, 나는 이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것에 대한 학생들의 질문과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품었을 질문을 비교했을 때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했다. 북미주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개인의 결정에 관한 한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만약에 바로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다. (93.3)
하지만 우리는 출애굽의 이야기가 20세기 서구인의 관심사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심리적 관심사를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시름에 빠져 무기력하게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특별히 그들의 압제자인 바로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는가 하는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을 구해줄 것을 탄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궁금증은 구원의 약속으로 자신들이 해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를 구하시고자 하는 의지와 권세를 가지고 있으신가? 만약에 이스라엘이 지녔던 이와 같은 질문이 그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왜 이야기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쓰여졌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원수의 마음조차도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강력히 역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에 대한 공의가 아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재확신케 되는 것이 기사의 주된 줄거리이다. (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