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출애굽기 제 II 부 하나님께서 구원(救援)하심 (출애굽기 3-18장) 제 3장 하나님께서 바로를 치심 (출애굽기 5:1-7:7)
 절기를 지킴
 모세가 바로에게 처음으로 요청한 것은(1절) 광야에 나가 절기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행렬이 어우러진 순례여행을 가리켰다. 순례 중의 한 목적은 모세가 하나님과 처음 대면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시기로 언약을 하셨기 때문이다(3:12). 출애굽기 5:3은 모세가 광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3일 여정의 허락을 구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의 문화로 제사는 절기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었다. (81.1)
 바로가 허락하지 않자 모세와 아론은 만약에 그들이 광야로 나아가 하나님께 경배치 아니하면 역병과 칼(죽음)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실지도 모른다는 순례여행의 불가피한 이유를 바로에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성경 어떤 곳에서도 그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셨다. 우리는 모세가 진실로 그러한 사실을 믿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가 단지 바로로 하여금 그의 백성을 가도록 허락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경고를 했는지 의아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81.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계획을 언급하셨을 때 이는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이었다(3:10; 6:11, 13, 27; 7:2). 그들이 거할 땅이 주어질 것이다(6:8). 한편 모세가 바로에게 나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 나아가 경배할 수 있는 허락을 요구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3:18; 7:16). (81.3)
 재앙이 마쳐 가는 순간까지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지 광야에 제사를 위해 순례 길에 나서는 줄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10:24). (82.1)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바로의 계획적인 기만인가? (82.2)
 바로는 아마도 모세와 아론의 첫 요구가 자유를 구하는 분명한 요구였다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경배를 구하는 단순한 청원은 적어도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언젠가는 바로도 이스라엘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바로에게 있어 체면과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경배할 시간을 허락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쉽게 탈출하도록 묵과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그와 같이 처신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의 편만한 사회적 문화에 편승했을 가능성이 높다. (82.3)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이 왜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지를 자문 할 필요가 있다. 왜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가야만 하는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이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던가? 애굽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드리는 것을 미워했으며, 희생을 드린다는 이유로 돌로 칠지도 몰랐다(8:26). 이스라엘은 자유가운데 주께 경배를 드릴 수 있어야 했다. 경배를 드리기 위하여 애굽을 떠나고자 하는 요구는 출애굽에 대한 모든 이유들 가운데 가장 심오하고 근본적인 이유였다. 만약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의 주시라면, 그분께서는 마땅히 경배받으셔야 했다. (82.4)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경배를 위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세상에서 하늘 가나안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의 출애굽에 비유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싸움의 동기 역시 경배일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향한 거짓 경배를 강요하는 자들의 핍박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어 진리 되시는 참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계 14:6-12).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논쟁 역시 이 땅의 왕국이나 왕들에게 경배할 것인지 아니면 왕 되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을 경배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다. (82.5)
 종살이와 벽돌
 모세와 하나님께서 직면하신 바로와 애굽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이 고안한 노역제도는 현명한 제도였다(5:4, 6, 10-18, 21). 바로는 분명히 가장 높은 지위였다. 그의 밑에는 간역자들과 패장들이 있었다. 간역자들은 애굽인들이었지만 패장들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5:15). 벽돌을 만드는 할당량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패장을 임명한 간역자들은 패장들을 소집해 매질을 하였을 것이다. 이들 패장들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 감독하에서 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질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그들의 노역은 민초들이 주축이 된 작업이었다. 이스라엘의 패장들에게는 의심할 여지없이 어느 정도의 특혜가 주어졌다. 적어도 그들은 그들의 문제를 바로에게 가져갈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5:15). 애굽의 강압적인 노역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종살이 제도의 일부가 되도록 하였다. (83.1)
 짚은 두 가지 이유로 벽돌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벽돌을 좀 더 견고하게 하는 내구제로 쓰였으며, 둘째로, 짚의 유기적 분해가 벽돌을 더욱 견고하고 단단하게 하는 물질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짚으로 만든 벽돌은 짚이 없는 벽돌보다도 세 배나 강했다. 짚으로 만든 벽돌은 오그라들어 깨지는 경우가 없었다(Nims, 25, 26). (83.2)
 바로의 경우도 결코 짚 없는 벽돌을 만들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는 애굽인들이 짚을 가져왔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광야에 나가 그루터기를 모아 자신들의 짚을 만들어야 했다. 이와 같은 과외 작업은 일인당 아마도 2,000 또는 2,500개로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왜 이스라엘 패장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그토록 격노케 되었는지를 쉽게 이해하게끔 하여준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똑같은 분노를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패장들이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접견한 결과를 왜 그토록 기다렸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게 한다(5:20). 그들이야말로 이 상황의 가장 큰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83.3)
 이러한 이유로 모세는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모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곤란케 하셨으며,”(NIV)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하셨다”(RSV)라고 하였다. 곤란과 문제들과 처벌 등은 이따금씩 오래된 번역들에 “악”으로 불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번역들을 해석할 때에 “악(evil)”을 죄(sin)로 이해하기보다는 단순히 사람들이 처한 곤란한 것들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있는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심지어 나쁜 것들조차도 원인을 다 하나님께 돌리기 쉽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이제 곧 배워야 할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계획의 일부이며 그들은 곧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사실을 보게될 것이다. (84.1)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의 비난으로 인하여 화를 발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그 대신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이스라엘과 바로에게 행하셨던 것들과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기초로 하여 희망과 위안의 기별을 가지고 그들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이 기별을 우리는 다음 장에서 심도 있게 연구할 것이다. (84.2)
 ■ 말씀에 들어감
 출애굽기 6:1-7:7을 두 번 정독하라. 읽으면서 다음의 질문들을 생각해 보라. (85.1)
 1. 하나님께서 6:1에서 사용하신 이제(now)와 같은 시간과 관련한 단어에 주목하라. 모세와 아론이 일찍이 바로와 대면했을 때와 출애굽기 5장의 모든 사건들에 비추어 봤을 때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심장함은 무엇인가? 본 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어떻게 이 단어가 맞추어 놓은 시간의 공간 안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순간까지 이 단어를 사용치 않으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85.2)
 2. 출애굽기 6:2-5에 나타난 하나님 당신에 관한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며, 또 변한 것은 무엇인지 주목해라. 하나님의 성호에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이곳에서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셨는가? 6:3의 전능의 하나님(God Almighty)은 히브리어로 el Shaddai이다. 성경사전이나 성서 색인 등을 사용하여 상기의 명칭을 사용한 곳을 찾아보고 그 의미를 알아 보라. (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