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와 안식일 제 10 장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1)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강퍅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는 마음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라고 기도하는 마음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는”(마 6:13) 심정이다. 참 아들 예수님이 사람아들들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다. “자지 말고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셨다. 안식일 계명은 아들이 지킬 첫째 가는 크고 귀중한 도리이지만, 사람아들들은 모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마 26:41) 때문이다. (102.1)
 또 성령이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까하여 두렵”(히 4:1)다. 진실로 안식일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는” 마음은 “안식에 들어갈 약속에 혹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깨어 기도하지 않았던 자녀들이 빠져들었던 그 큰 시험들을 기억하고 경계하는 마음이다. “모세를 쫓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들”(히 3:16)에게 하나님이 “노하여 내[하나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하신”(시 95:11; 히 3:11, 18; 4:5) 사실을 기억하는 마음이다. 40년 동안 제칠일마다 만나의 기적을 경험하며 광야를 지나고 있던 그 안식일의 백성들이 “저 안식에”(히 4:3) 들어가지 못한 자 들이었으며, 그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과 “믿지 아니한” 자들(히 3:18, 19) 이었으며, “하나님을 격노케 한” 사람들이었으며,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들”이었음을 기억하는 마음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들은바 [복음의]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여”(히 4:2) “저 안식에”(히 4:3) 들어가지 못하였음을 명심하는 마음이다. (102.2)
 그러므로 성령이 오늘날 우리 안식일의 자녀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신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시 95:7, 8). 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0-14). (103.1)
 따라서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우리의 안식일 기도는 “혹시 내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는” 기도이다. “혹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고자” 하는 기도이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매일 피차 권면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마음이 강퍅하여 노하심을 격동하게 마옵소서” 라는 기도이다.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마옵소서” 라는 기도이다. 진실로 안식일 계명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참 아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는 계명입니다”(마 11:29) 라고 고백하는 기도이다. 안식일을 지키며 온유하신 “예수의 마음을”(빌 2:5) 본받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이다. 안식일의 멍에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로 알고 “메게 하소서” 라는 기도이다. 온유한 자의 기업이요(마 5:5), 겸손한 자의 기업인 안식일의 쉼, 곧 “마음의 쉼”(마 11:28)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도록”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이 안식일의 신앙을 온유한 마음으로 끝까지 “견고히 잡게 합소서” 라는 기도이다. (104.1)
 가나안에 이르는 길-안식일 안식에 이르는 길
 히브리서 3장과 4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참 안식일 안식에 들어가는 길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로 비유되고 있다. 복음을 받은 우리가 어찌하여 아직도 그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가를 “먼저 복음을 받은 자들이 순종치 않음을 인하여 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 깨달으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 참 안식일 안식에 도달하는 길은 참 가나안에 도달하는 길이다. 6일의 삶에서 제칠일 안식일의 삶으로 넘어오는 경험은 출애굽의 경험에 비유될 수 있다. (104.2)
 안식일로 들어가는 삶은 유월절의 경험처럼 넘어가고 건너가는 것이다. 넘어가자, 피의 문설주 너머로, 피로 물들어 붉은 저 홍해 너머로. 이것이 유월절의 정신이고, 제칠일 안식일의 정신이다. 부처님은 이것을 해탈의 정신이라 하였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가 구도자의 구호라는 것이다. “건너가자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는 것이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 안식을 이루자는 것이다. 피바다 홍해 같은 삶을 넘어 애굽의 건너편, 죽음의 저쪽 언덕으로 오르는 것이 안식일 안식의 삶이다. 사도 바울은 출애굽의 영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고전 10:1-4). 출애굽의 정신이 침례의 정신이요, 안식일 안식의 정신이다. (105.1)
 그런데 출애굽의 40년 세월에서 확인된 것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종살이하던 애굽 땅을 등졌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가나안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출애굽 세대의 비극은 그들에게 홍해의 건너가 곧바로 요단강 건너편이 아니요 가나안 안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오심이 초림과 재림으로 나누이고, 그 초림과 재림 사이에 수천 년에 걸친 세월이 긴장과 시험의 세월로 흐를 것을 암시하듯, 홍해와 요단강 사이에 40년의 세월이 시련으로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제칠일 안식일이 제칠일과 안식일로 갈라지고, 제칠일과 안식일 사이에 40년의 광야 같은 간격이 시험하는 세월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105.2)
 어찌하여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유월절 전야는 곧바로 안식일 안식의 삶으로 이어지지 아니하는가. 어찌하여 제6일이 저무는 저녁은 곧바로 제칠일 안식일이 이르는 저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제칠일에는 이르렀으면서 안식일에는 이르지 못하는 현실이 우리에게 있는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으면”(히 6:4, 5) 그것이 곧 “어둠이 지나고 참 빛이 벌써 비춤인데”(요일 2:8), 그것이 곧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함인데”(롬 8:1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인데”(롬 8:2), 어찌하여 또 다시 우리에게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히 3:14) 하는 시련의 시간을 다시 거쳐야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는가. (106.1)
 애굽의 임금에게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놓으라” 명하시고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애굽에서 “나오라,”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 계획은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본래 계획에는 홍해가 애굽과 가나안의 접경이 되는 것이고, 제2의 애굽의 고역 같은 광야 40년 세월과 제2의 홍해 같은 요단강을 “다시” 넘어야 하는 과정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107.1)
 그러나 하나님을 시험한 광야의 세대들에게는 뜻밖에도 홍해와 가나안 땅 사이에 시험과 엎드러짐의 40년 광야가 펼쳐지고 그 광야 끝에 또 하나의 홍해인 요단강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험하는 세대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종은 “다시 예언하여야 했던”(계 10:11) 것이다. 순례를 “다시” 해야 한다고 예언해야 했다. 제2의 애굽 생활과 제2의 홍해 횡단을 예언해야 했다. 대제사장이 “다시” 봉사해야 한다고 예언해야 했다. 대제사장의 둘째 성소 봉사를 예언해야 했다. “다시” 봉사하는 두 번째 성소가 가장 거룩한 성소가 되고, “다 이루는” 성소가 되는 경험을 예언해야 했다.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이 진정한 오심이 되고, 완전한 오심이 되는 경험을 예언해야 했다. “한번 더”의 경험으로 구원의 “다 이룸”에 이른다는 예언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번 더”“끝이 오는”(마 24:14) 경지이며, “끝까지 견디는”(마 24:15) 경지이며, 진실로 우리의 구원을 “끝내고 다 이루는”(요 19:30) 차원임을 예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한번”이 제칠일의 차원에서 안식일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삶이 된다는 것을 예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번 더”의 차원이 죄인이 회개하여 의인이 되는 거듭남의 차원이며, 죽음에서 삶으로 옮아가는 부활의 차원인 것을 예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7.2)
 오늘날 우리의 안식일 신앙은 제칠일로 끝난 안식일 안식의 삶을 “다시 예언하는” 신앙이다. 제칠일을 진정한 안식일로 “한번 더” 살아내는 삶이다. 5리로 예정되었던 삶이 10리로 늘어난 삶이다. 한쪽 뺨으로 예정되었던 삶이 양쪽 뺨으로 늘어난 삶이다.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땅 끝까지 가고,” “날들의 끝까지” 가서 구원을 “끝내고” 안식을 “다 이루는” 삶이다. (108.1)
 이같은 안식일 신앙의 삶을 위하여 우리의 맏형 예수님께서 사람아들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라 하셨다. (108.2)
 출애굽기 17장의 사연과 제칠일의 시험
 출애굽기 17장에는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참으로 기막힌 광야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 이른바 “맛사의 시험”이라는 사건이다(신 6:16).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출 17:1, 2)한 사건이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면서 “돌질하였던”(출 17:4) 사건이다. (108.3)
 “르비딤”이란 쉬는 장소, 곧 안식처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 곧 안식처에 도착하여 그 “안식”에 장막을 쳤으나, 거기에서 발견한 것은 “마실 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이 모두 목말라 죽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안식에서 안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다투었고,” “모세와 다투었고 여호와를 시험하였다.”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가 아니 계시는가”(출 17:7) 하였다. (109.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들은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호소를 듣고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나와서 “르비딤,” 곧 제칠일 안식일 신앙에 장막을 친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신도들은 그들의 “르비딤”에서 “마실 물”을 얻지 못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제칠일 안식일 신앙으로 말미암아 직업을 잃고 가족을 잃고 친구와 명예와 재산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안식일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이 모두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절망하였다. 그리하여 가족끼리 “다투고,” 신자들끼리 “다투고,” 신앙 지도자와 “다투고,” 급기야는 제칠일 안식일의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그들의 아버지를 시험하였다.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까,” “과연 하나님 아버지가 안식일을 지키는 우리들 중에 계십니까” 하고 시험하였다. “과연 안식일의 하나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까” 하였다. 모세는 르비딤의 “그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17:7) 고쳐 불렀다. 쉼의 땅, 안식의 땅이 시험과 다툼의 땅이 되었다. 많은 재림 신도들의 경험에서 제칠일은 안식일인가, 르비딤인가, 맛사인가. (109.2)
 이스라엘 자손들은 또 신 광야의 “가데스,”“거룩”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서도 여호와와 다투고 여호와를 시험하였다(민 20:1-19).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안식일 안식으로 초대된 “가데스”의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은 르비딤에서 “안식”하지 못하였듯이 가데스에서 “거룩”하지 못했다. 그들은 “거룩한 안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안식으로 초대된 우리 재림신도들은 어떠한가. 거룩한 제칠일 안식일 신앙에 있으면서도 안식을 얻지도 못하고, 거룩하게 되지도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가데스에서는 모세와 아론도 거룩하지 못했다. 마실 물이 없어서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가. 제칠일 안식일 신앙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고 있는가. (110.1)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땅을 돌아가는 여행 중에서도 “식물도 없고 물도 없다”(민 21:4-6)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자녀들의 시험은 “무엇을 먹고 마실까” 하는 것이다. “너희가 디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케 한”(신 9:22) 까닭이 모두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하는 원망과 염려 때문이었다. 안식일 신앙으로 아들 되는 길을 걸어가는 안식일의 자녀들은 이방 사람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원망과 염려로 하나님 아버지를 시험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안식일 신앙이요, 안식일 신앙의 기도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는 기도는 “우리를 먹을 것과 마실것으로 염려하지 말게 하소서” 라는 기도의 다른 말이다. (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