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11 장  창세기 2장 2절의 “하나님의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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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일 안식은 어떤 안식인가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하셨다. (101.1)
 여기서 안식한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그치다, 멎다, 중지하다” 뜻의 사바트(sbt)이다. 영어로 cease, stop의 뜻이다. 그런데 “쉬다”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2절“안식하다”“그치다”“쉬다”의 두 뜻을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번역이 이 뜻을 잘 번역하였다.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완성되었으므로, 그 하나님이 하시던 일에서 손을 “떼시고 쉬셨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 11절“제칠일에 쉬었다”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2장 2절과 마찬가지로 “일에서 손을 놓고 쉬었다”의 뜻이다. 사바트란 한마디 동사에 일손을 놓고 쉬었다는 두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취지가 출애굽기 31장 17절에는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이 뜻을 확실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였다”는 것이다. 즉 창세기 2장 2절출애굽기 20장 11절“쉬었다”의 더 구체적인 뜻은 쉬어 평안하였다는 것이다. 즉 “일손을 놓고,” “평안하였다”는 것이다. 작업을 그치고 숨을 돌렸다는 것이다. (101.2)
 히브리서 4장 10절에 의하면 세상을 지으시던 일의 마침에 따른 하나님의 경험의 순서가 출애굽기 31장 17절의 순서와는 반대이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평안이 먼저이고, 일손 놓음이 다음이다. 안식이 먼저이고, 작업에서 손을 떼는 것이 다음이다. 안식에 들어갔기 때문에 자기 일을 놓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것이 사실인가. 양쪽이 모두 사실이다. (101.3)
 창세기 2장 1-2절이나 출애굽기 20장 9-11절이나 출애굽기 23장 12절, 31장 17절에 의하면 안식일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중요한 목적이요 결과이다.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일의 안식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가 다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가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일 안식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는 “거룩하게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수고는 “거룩하여지지 않으며”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피조물도 거룩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수고는 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피조물들도 복을 누리지 못한다. 축복과 성화가 완성이다.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일 안식과 더불어 제칠일의 축복과 성화가 오고 비로소 창조의 완성이 있다. (102.1)
 그리고 히브리서 4장 3절의 주장대로 안식일 안식의 일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이루어졌다. 창조 사역의 완성과 함께 안식일 안식이 발생하였다. 창조 사역의 완성과 함께 안식일이 오고, 안식일 안식과 함께 하나님의 작업의 그침이 왔다. 하나님의 수고가 멎었다. 하나님의 노력이 멎었다. 히브리서 4장 10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안식일 안식에 이르자 그의 작업의 손이 멎었고, 그의 애씀이 멎은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도 안식일 안식에 이르게 되면 작업하는 일손을 놓게 된다고 하였다. 안식일 안식, 곧 사바티스모스에 이르름으로 우리에게는 더할 일도, 더 일할 필요성도, 더 일할 의도도 없어지는 것이다. (102.2)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달리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모두 완성되었다. 창조의 완성은 하나님께 평안의 체험과 함께 왔다. 만족의 느낌, 보람의 느낌, 기쁨의 느낌과 함께 왔다. 숨돌림의 경험, 한 숨 놓이는 경험으로 왔다. 그리고 더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일손을 놓음이 먼저인가, 평안의 경험이 먼저인가. 함께이다. 두 경험은 구분할 필요가 없는 통합적 경험으로써의 안식일 안식이다. 그래서 창세기 2장 2절출애굽기 20장 11절에서는 이 경험을 한 단어로 표현하였다. 한 동사로 표현하였다. 한 경험으로 표현하였다. 그 동사가 사바트(sbt)이다. 우리 성경에서 ‘안식하다’로 번역된 동사이다.” (103.1)
 비유하건대 이 경험은 산모가 아이를 해산하는 경험과 유사할 것이다. 해산의 기쁨은 산고의 목적이요 결과이다. 출산의 다 마침과 더불어 출산의 기쁨이 온다. 아기의 나옴의 다 마침과 출산의 기쁨은 함께 오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배에서 아기가 다 나왔을 때 산모는 더 이상 용쓸 일이 없게 된다. 용쓰는 일을 그치고 울부짖음이 멎을 것이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인 나중인가. 이 사람은 이것이 먼저이고 저것이 나중이라 할 것이다. 저 사람은 저것이 먼저이고 이것이 나중이다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 말을 듣는 나에게는 이 사람의 말도 사실로 들리고 저 사람의 말도 사실로 들린다. 왜냐하면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103.2)
 지금까지의 설명을 정리해본다면 창세기 2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은 창조의 완성에 자연적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수고들의 그침과 기쁨이다. 창조적 작업의 끝에만 오는 경험, 창조적 작업의 완벽한 완성에만 따라오는 만족의 경험이다. 다 익은 밤이 나무에서 뚝 떨어지는 것과 같은 완성의 “놓음”이고 “끊어짐”이다. 젖 먹는 아이가 배부르고, 어머니 젖에서 떨어지는 완성의 “놓음”이고 “떨어짐”이고 “분리됨”이다. 어린아이 같아야 안식일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탐욕의 어른은 배가 불러도 밥숟가락을 놓지 못한다. 권력을 놓지 못하고, 색욕을 놓지 못한다. 그래서 안식하지 못한다. 3년 묵은 설익은 밤톨이 여전히 나뭇가지에 붙어 있듯이 재물에 붙어 있고, 여색에 붙어 있고, 권세에 붙어 있고, 여섯 날에 붙어 있다. 이 세상에 붙어 있다. 한 알의 밤이 익어 부활과 영생의 땅으로 뚝 떨어지듯이 제칠일 안식일로 뚝 떨어지지 못하고 안식일 안식으로 뚝 떨어지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다. (103.3)
 제칠일 안식일 안식은 일에서 손을 땜의 안식이고, 이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떨어짐의 안식이지만 또한 그의 피조물과 “더불어”의 안식이다. 우선적으로 안식일 안식은 하나님이 창조적 작업을 끝내고, 당신의 창조의 완성을 느끼고 경험하는 안식이다. 그러나 안식일 안식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안식일 안식에서 그가 창조한 세계를 경험하고, 피조물들은 안식일 안식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한다. 그리고 피조물들은 또 다른 피조물들을 느끼고 경험한다. 하나님은 일을 쉬고, 마치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아기 엄마처럼 자기를 피조물과 세계에 개방한다. 아내에게 몸을 맡기는 남편처럼, 남편에게 몸을 개방하는 아내처럼 하나님이 제칠일에 쉰다. 제칠일로 말미암아 쉴 뿐만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에게 쉰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처럼 개방한 안식일 안에서 사람이 쉰다. 만물이 쉰다. 안식일 안에서 하나님과 만물이 서로 쉰다. 하나님과 만물이 안식일 쉼 안에서 서로 안다. 만물과 만물이 서로 안다. 하나님과 만물이 서로 상응한다. 만물과 만물이 서로 상응한다.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이 상응과 앎을 통하여 변화한다. 이 변화가 하나님이 제칠일에 사람이 “쉬어 평안하셨다”는 변화이다. 제칠일에 “쉬어 숨을 돌렸다”는 변화이다. (104.1)
 하나님이 쉬어 평안하신 안식일 안식
 창세기 2장 2절출애굽기 20장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은 “하나님이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심”(출 31:17)이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모두 완성됨으로써 하나님이 일손을 거두고 “숨을 돌리심”(공동번역) 이다. 하나님이 창조적인 여섯 날의 수고를 그치고 숨 한번 크게 돌려보는 경험이다. (105.1)
 창세기 2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일 안식의 특징은 이 안식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작업의 끝에 오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제칠일 안식의 앞에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6일의 노력이 있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6일의 삶이 없이는 제칠일 안식의 삶이 없다. 제칠일 안식일의 안식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6일의 삶의 결과이다. 꽃과 같고 열매 같은 것으로써의 제칠일 안식일 안식이다. 그래서 제칠일 안식일 안식에 들어가려는 자는 그 앞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여섯 날의 수고로 들어가야 한다. 비창조적이고 비생산적인 수고여서는 안 된다. 생명의 주인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수고여야 한다. 사망의 주인을 섬기고 불의와 죄의 주인을 섬기는 수고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수고는 여섯 날을 넘어 여섯 날의 육천 날을 수고하고 애써도 제칠일 안식일 안식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바른 삶의 날들이 제칠일 안식의 날 앞에 있다. (105.2)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어려움이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일 안식은 창조적인 일의 완벽한 완성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끝내주지 못하고 완벽하게 완성하지 못한다면 제칠일이 아니라, 제칠백일에 이른다 할지라도 안식에 이를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 일이 가능할 것인가. 도대체 우리에게도 “다 이룸”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완성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더구나 완벽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내일로 완성을 기하고 모래로 완벽을 기한 삶과 노력의 결국이 언제나 미결과 미완으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들의 체험이 아닌가. 언제나 무엇하나가 부족한 삶이 우리의 운명적인 삶이 아닌가. 아니라 하면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일 것이고, 그렇다 하면 우리에게는 절망만이 남는다. (105.3)
 참으로 제칠일 안식일 안식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그 위대한 세대들, 곧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여호수아 세대와 위대한 왕조를 세운 다윗 왕의 세대도 들어가지 못한 난공불락의 “저 안식”이다. 구름높이 달려있는 “하늘의 안식”이고 “그의 안식”이다. 하나님의 안식이지 사람의 안식이 아니다. 안식일 안식은 여리고 성보다 더 견고한 성이다. 메뚜기 같은 우리들의 몫이 아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계집 종의 자식” 같고, “나그네” 같고, “소와 나귀” 같은 우리 인생이 제칠일에 쉬어 숨을 돌릴 수가 있는가(출 23:12). 우리도 어떻게 하나님처럼 “쉬어 평안할 수가”있는가(출 31:17). 참으로 우리의 “수고가 그치고 쉴 것인가”(계 14:13). (106.1)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옛 세대들이 들어가지 못하였고 현세대가 들어가지 못할까 두려운 안식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저 “안식일 안식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모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히 4:3).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우리 대신 창조를 다 이루었고, 우리 대신 우리의 구속을 다 이루었고, 우리 대신 우리의 죄사함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늘의 음성이 외치기를 “이제부터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였다. “성령이 화답하기를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라” 하였다(계 14:13). 이 소식이 안식일 안식의 복음이다. 이 소식이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했다는 소식이다(눅 2:10). 우리 대신 하나님이 구원의 아들을 낳았다는 기쁜 소식, 그리하여 “저희 수고가 그치고 쉬리라”는 소식이 안식일 안식의 복음이다. (106.2)
 히브리서 기자가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항상 미완과 미결로 남는 우리의 부족한 삶으로 이 안식일 안식에 이르는 작업이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을 열고, 우리가 십자가에서 공의를 이루고, 우리가 구세주 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신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믿으라는 것이다(히 4:2). 6일에 걸친 하나님의 창조의 완벽한 완성을 듣고 믿으라는 것이다. 그렇다. 듣고 믿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 6:29). 듣고 믿는 것이 창조적인 일이요 생산적인 일이다. 듣고 믿는 것이 창조적인 일의 완벽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안식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쉬어 평안하셨다 하신 그 삶을 공유하는 길이다. “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히 4:11)은 이것뿐이다. 이 기쁜 소식을 확실히 믿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 권고를 복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라는 권고를 순종하는 것뿐이다(마 11:29). (107.1)
 따라서 제칠일 안식일 안식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요 14:27). 불완전한 우리의 노력과 삶이 이루어내는 안식이나 평안이 아니다. 제칠일 안식일이 우리에게 끼치는 평안은 하나님이 그 지으시던 일을 마치고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신 출애굽기 31장 17절의 평안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숨 돌리신” 평안이다. 하나님이 다 이루고 우리와 더불어 나누는 평안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고 개방하신 안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도록 하나님이 내 놓으신 안식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우리와 우리 이웃과 만물이 하나님이 다 끝내신 창조 위에서 서로 알고 서로 상응함으로써 변화되는 차원으로의 “숨돌림”이며 “평안”이다. (107.2)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평안이 아니고 하나님의 평안이다. 이 세상의 안식이 아니고 하늘의 안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끼치는 평안이다”(요 14:27).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 하신 평안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인도하신 “푸른 초장” 같고 “잔잔한 물가” 같은 안식이다(시 23:2). 땅의 차원, 인간의 차원, 나의 차원, 나의 수고와 노력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안식과 평안이 아니라 하늘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 예수 그리스도의 차원, 신앙의 차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들어가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안식이고 평안이다. (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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