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9장 일요일 신학
 결론
 일요일 준수와 관련된 초기 기독교인들의 다양한 동기들에 대한 간단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그 새로운 예배일이 논쟁적이고 불확 실한 환경 가운데서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알게 된 것처럼, 머지않아 일요일 준수의 주요 이유로 제시되었던 부활의 기념일이라는 의미는 원래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만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첫째 날과 여덟째 날의 상징적 의미에 중점을 둔 해석들은 일요일 준수의 도입으로 교회 내에서 논쟁이 수반되었음을 나타내 보여준다. 유대인들 및 저들의 안식일과 분리되어 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 발생하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존경할만한 태양의 날을 도입하였는데, 그 날을 선택한 이유는 그 날이 빛의 창조와 의의 태양이신 분의 부활과 같이 그 날에 일어난 중요한 신적인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시간과 상징성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새로운 제도로 인해 안식일의 신성성과 초월성을 계속 옹호하였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논쟁이 발생하였다. 그러한 반대를 침묵시키기 위해서, 첫째 날과 제8일의 상징성이 소개되었고 광범위하게 활용되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그 상징성들이 가치 있는 변증적 논증들을 제공하여 일요일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변호할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바에 따르면, 첫째 날로서 일요일은 인식일보다 우월한 날로 제시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 날이 첫 번째 창조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시작된 두 번째 창조의 기념일로 경축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제7일은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는 것으로 단순히 주장되었다. 반면에 제8일로서 일요일은 일시적이며 종말적으로 안식일의 연속이요, 성취며, 보충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392.1)
 초기 기독교 사회 내에서 정착된 일요일 신학에 대한 이 연구를 정리하면서 우리는 이 장의 시작에 제기하였던 질문을 다시 제기할 필요가 있다. 즉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하는 초기의 신학적인 변명들은 성서적이고 사도적인 교훈들을 반영하는가? 아니면 널리 만연된 환경에 의해서 이끌려진 후천적인 논증들을 반영하는가? 우리는 첫째 날과 제8일의 숫자적 상징들로부터 계발된 다양한 논증들의 정통성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서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다. 아울러 제8일이 제칠일보다 더 존경받는 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성서로부터 발췌한 엉뚱한 증거들의 해석학적 가치를 검토할 필요도 없다. 일요일을 준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초기에는 널리 보급되어졌던 “제8일”이라는 명칭을 이미 오래 전에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빛의 창조, 새로운 세계, 팔일 만에 받는 할례, 정결케 되는 제8일,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여덟 명의 영혼들, 전도서 11:2, 시편 6편 및 다른 시편들의 타이틀 등과 같은 내용들에 기초한 모든 논증들을 이미 오래 전에 무시해 버렸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러한 논증들이 건전한 성서 주해와 신학에 의해 보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393.1)
 조만간 일요일 준수에 대한 가장 주도적인 논거가 되었던 부활에 대한 동기와 관련해서는 어떤가? 이것은 안식일보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을 효과적으로 정당화 해주고 있는가? 이 물음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결론 부분에서 역점을 두어 다룰 것이다. 우리는 일요일의 기원을 돌이켜 봄으로써 현재의 일요일 준수가 가지고 있는 절박한 문제에 영향을 준 초기 기독교의 일요일 신학의 결과를 살펴볼 것이다. (394.1)
 참고문헌
 1) Augustine, Epistula 55, 23, 1, CSEL, 34, 194.

 2) Augustine, Epistula 36, 12, 14, CSEL 34, 4.

 3) Barnabas는 안식일이 그 중심에 있는 유대교와 분리해야하는 긴급한 상황이 일요일 기원의 물리적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Barnabas, 218. 반면 형식적인 차원의 이유는 여덟 번째 날이 내세론적 측면에 있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하며, 그것은 현재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다. 부활은 두 요인 가운데 후자의 경우로 여겨진다.

 4) Justin, I Apology 67, 5-7, Falls, Justin’s Writings, 106-107. 이 외에도 다른 근거도 존재하는데, 이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Justin은 할례와 관련한 제8일과 홍수로부터 살아났다는 8명의 사람들에 기초해서 일요일 준수를 변호하고 있다.

 5) W. Rordorf, Sunday, 220.

 6) Cyprian, Epistola 63, 15, CSEL 3, 2, 714. Jerome은 부활의 상징을 매일의 성만찬 기념의 개념으로 확장시킨다(Commentarius in epsitola ad Galatos 4, 10, PL 26, 404-405).

 7) Tertullian, De corona 3, 4, ANF III, 94.

 8) Tertullian은 그의 논문에서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주의 부활의 날에”, 그리고 “오순절 기간 동안”은 서서 기도하라고 충고한다(On Prayer 23, ANF III, 689). 이는 두 축일 모두 “환희”의 경험과 관련한 동일한 절차로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9) Augustine, Epistola 55, 28, CSEL 34, 202. 참고. Epistola 36, 2, CSEL 34, 32. Hilary of Poitiers 또한 Praefatio in Psalmum 12, PL 9, 239에서 동일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Basil은 일요일 예배에서 서 있는 자세가 부활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습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고 진술한다(De Spiritu 27, 66, SC, 236). 참고. Apostolic Constitutions 2, 59, ANF VII, 423. “우리는 삼일 만에 살아나신 분을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에 세 번 서서 기도를 한다.”

 10) 많은 교부들의 생각 속에 부활절-일요일과 주간 일요일이 다른 대에 동일한 구원 사건을 기념하는 하나의 기본적 축제로써 여겨졌다는 사실은 다음의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즉, 이 둘 모두 2세기 초반 로마에서 동시에 고안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11) F. A. Regan, Dies Dominica, 86.

 12) M. Britt, The Hymns of the roman Breviary and Missal, 1948, 91. Britt은 그 찬가를 교황 Gregory the Great의 것으로 여기는 반면 J. Daniélou는 Ambrose의 것이라고 본다(Bible and Liturgy, 249).

 13) Eusebius of Alexandria, De die Dominico, PA 86, 416.

 14) 일례로 Gregory of Nazianzus, Oratio 44 In novam Dominicam, PG 36, 612를 보라. “첫 창조가 주의 날에 시작된 것처럼(이는 일로부터의 쉬며 안식일이 7일 후에 오게 된다는 사실에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두 번째 창조도 같은 날에 시작됐다.” Dionysius of Alexandria, Analecta sacra spicilegio solemensi 4, ed. J. B. Pitra, 1883, 421.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일요일은 창조의 날이자 부활의 날로 정하셨다. 창조에 날에 그분은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부활의 날에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나누셨다.” Ambrosiaster로 알려진 저자는 동일한 주제와 관련해 하나의 변형을 제시한다. “실제로 세상은 일요일에 창조되었으며, 이는 그 날이 창조 이후의 날이며 다시 그 날에 세상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 같은 날 그분은 부활하시고 창조도 하셨다”(Liber quaestionum veteris et novi testamenti 95, 2, CSEL 50, 167).

 15) Apostolic Constitutions 8, 33, 1, ANF VII, 495. 참고, Ibid., 7, 36, 1, ANF VII, 474.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기 념하여 안식일을 정하셨나이다. 이는 그 날에 당신께서 우리를 일로부터 쉬게 하시고 당신의 법을 명상케 하려 하심이었나이다.” Ignatius는 “그러나 육신의 휴식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솜씨를 찬양하고 법을 묵상하며 영적 방식을 좇아 모두로 하여금 안식일을 지키게 하라”고 했다(Epistle to the Magnesians 9, ANF I, 62).

 16) Spriac Didascalia 26, ed. Connolly, 233. 안식일에 대한 일요일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다른 흥미로운 논의들이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첫날인 일요일이 만들어 졌을 때, “제7일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미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과 아직 알려 지지 않은 것, 그것이 존재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기대조차 없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위대한가?” 또 다른 논의는 첫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축복의 경우를 근거로 든다. “그대는 축복을 받은 막내들인가 아니면 첫째인가? 성경에 기록된 바, 야곱은 첫째들 가운데 축복을 받을 것이라.” 또한 저자는 바르나바스서 6장 13절을 인용해 일요일의 우월성을 변호한다. “보라, 내가 처음 것을 마지막으로, 마지막 것을 처음으로 만들 것이라.” 마태복음 20:16도 활용된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그는 다음의 견해를 언급하며 결론을 맺는다. 일요일은 “8(ogdoad, 제8일)로써 안식일 보다 낫다”(Connolly, 234-236). 이와 같은 논쟁들의 다양성과 특이한 속성은 각각의 날의 우월성을 변호하기 위한 안식일과 일요일 준수자들 사이에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7) Athanasius, De sabbatis et circumcisione 4, PG 28, 133.

 18) Ibid.

 19) Ibid.

 20) J. Daniélou, “Le Dimanche comme huitiéme jour,” Le Dimanche, Lex Orandi 39, 1965, 62. “구약에서 ∙∙∙ 제7일은 온전함을 뜻하는 표현이다.” Niels-Erik A. Andreasen, The Old Testament Sabbath, SBL Dissertation Series 7, 1972, 196. “우리는 스스로 그것이 창조로 끝나는 안식(일로부터의 중지)이 아니라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대신 그것은 안식과 안식일 모두의 원인이 되는 끝이 난 창조(the concluded creation)이다.” 전체, 완성, 완벽의 상징으로서의 안식일은 다음을 참고하라, Nicola Negretti, II Settimo Girono, Analecta Biblica 55, 1973, 44-45, 57-58.

 21) 창조 논쟁과 관련한 또 다른 변형은 첫째 날을 세상의 창조에 대한 기념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발생(the generation of Christ)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Clement of Alexandria(약 A.D. 150-251년 경)의 “제7일은 악을 쫓아냄으로써 태고의 날, 우리의 참된 안식을 준비한다”라는 진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조의 첫 날은 우화적으로 “감추어진 것들을 비추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이는 그날에 “빛이 되시는 그분께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먼저 계셨던 분이시”기 때문이다(Stromateis 6, 16, GCS 2, 501-502). Eusebius는 “그 말씀에 걸 맞는 다른 창조물들이 없었기 때문에” 첫째 날에는 오직 빛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해 이 개념을 만들어낸다(Commentaria in Psalmos, PG 23, 1173-1176).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의 제1우위설처럼 거부하 겠지만 첫 날 말씀이 가진 발생적 개념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실행 가능 차원의 신학적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한 기발한 하나의 시도로 보아야 한다.

 22) Gregory of Nazianzus, Oratio 44 In novam Dominicam, PG 36, 612C-613A.

 23) Tertullian, On Odoltry 14, ANF III, 70. Syriac Didascalia 26, Connolly, 236. “그러나 안식일 자체는 안식일까지 포함해 세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곧 8[일]이 된다. 그 러므로 제8일은 안식일 뿐 아니라 한 주의 첫 날보다도 낫다.” 그 숫자가 안식일에서 그 다음 안식일까지 날을 세는 것에서 비롯되는 경우, 제8일이 어떻게 일요일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Justin, Dialogue 31, ANF I, 215. “그러나 모든 날들의 순환의 숫자에 따르면, 다른 모든 날들 가운데 여전히 첫 날인 안식일 후의 첫 날은 제8일로 불린다.” 참고, Justin, Dialogue 138.

 24) A. Quacquarelli, L’Ogdoade Cristiana e i suoi riflessi nella liturgia e nei monumenti, 1973, 45.

 25) W. Rordorf, Sunday, 277. 신약 속 예표론적 관계는 할례와 침례 사이에서 성립되지만, 제8일 그 자체로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골 2:11-13. 참고, O. Cullmann, Baptism in the New Testament, 1950, 56.

 26) Eusebius, Commentaries in Psalmos 6, PG 23, 120A.

 27) Ambrose는 할례에 관련된 8일이 첫 부활절에 시작된 영적 할례, 즉 침례의 상징이라고 가르친다(Expositio Psalmi 118, 2:1-3, CSEL 62, 4). 참고. De Abraham 2, 11, 79, CSEL 32, 631. Gregory of Nyssa, De octava, PA 44, 608-609. Athansius, De sabbatis et circumsisione, PG 28, 140C-141B. Chrysostom, De circumsisione, PA 50, 867D.

 28) J. Daniélou, 88.

 29) Justin, Dialogue 128, ANF 1, 268. 참고. Dialogue 41, ANF 1, 215. “그들에게 언제나 8일째 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명령하는 그 할례의 명령은 참된 할례에 대한 하나의 예형으로, 이로써 우리는 안식일 후 첫 날에 부활하신 분을 통해 기만과 부당함으로부터 할례를 받게 된다.” 참고, Dialogue 23.

 30) Cyprian, Carthaginense Concilium sub Spriano tertium 3, 3, 1, PL 3, 1054. 참고. Epistola 64 CSEL 3, 719.

 31) Origen, Selecta in Psalmos 118, PG 12, 1588.

 32) Tertullain, On Baptism 19, ANF 111, 678.

 33) W. Rordorf는 후기 유대인들의 종말론 관련 문헌에서 발견된 우주의 주간에 대한 당시의 지배적이었던 종말론적 해석들에 대한 실례가 되는 표와 간결한 요약을 제시하고 있다.(Sunday, 48-51). 대개(6천년으로 계산되는) 현 시대 이후에 올 일곱 번째 천년으로 간주되는 종말론적 안식일은 다음의 세 가지 기본적인 변형에 따라 해석된다.

   (1) 낙원의 회복,

   (2) 새로운 시대 이전과 메시야 시대 이후의 적막의 텅빈 시간,

   (3) 새로운 세상을 기념할 메시아의 과도의 시기.

 이러한 서로 다른 해석들을 통해 우리는 후기 유대교와 신약 시기에 종말론적-천년왕국설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한 열성적인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F. A. Regan은 이렇게 말한다. “신약 시대와 바로 그 이전 수세기 동안 많은 이들은 천년에 대한 유대인들의 집착과 견해에 동조했다. 흔히 ‘메시아의 시대(days of Messiah)’라고 불린 메시아의 도래는 ‘이 세상’에서 ‘장차 올 세상’으로의 이행 뿐 아니라 ‘종말의 날’에 대한 개념을 아우르는 것이었으며, 그 관련 어휘에는 점을 찍어 표시를 해 두었다”(Dies Dominica, 212). 참고, J. L. McKenzie, “The Jewish World in New Testament Times,” A Catholic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s, 1953, ed. 738. J. Bonsirven, Judaisme Palestinien au temps des Jésus Christ, 1935, 341.

 34)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동방의 전통에서 성경적 주간은 대개 영원에 대한 여덟째 날과는 달리 세상의 전체 기간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역사적으로 우주의 주간이 특정 시기의 연속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참고. Irenaeus, Adversus haereses 5, 28, 3; 5, 33, 2. Hippolytus, In Danielem commentarius 4, 23-24. Tertullian, Adversus Marcionem 4, 39. De anima 37. J. Daniélou, “La typologie millénariste de la semaine dans le christiansme primitif,” Vigiliae christianae, (1948):1-16.

 35) J. Quasten, Patrology, 1950, 1, 109를 보라. 천년을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와 그의 성인들의 천년 통치로써 보는 당시의 지배적 해석은 계시록 20장 1절(그 이하)에 대한 잘못 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의 믿음은 “세상의 종말 전에 끼어있는 이 시기 동안에는 영적인 평화와 조화가 넘쳐날 것이다. ∙∙∙ 이는 어떻게 그와 같은 이론이 기독교의 세상-날-주(world-day-week)의 표현과 일치하는지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F. A. Regan, Dies Dominica, 214.

 36) 에녹서 33:7, The Apocrypha and Pseudepigrapha of the Old Testament, ed. R. H. Charles, 1913, 11, 451. 그 주의 천년왕국설 측면의 해석은 또 다른 외경서인 희년서(the Book of Jubilees)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Mario Erbetta는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담이 천 년까지 살지 못한 사실에 대해 희년서 4장 30절에서는 창세기 2장 17절(‘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의 예언이 사실상 성취된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그러한 추론이 기독교 시대 이전에 이미 지상의 하루를 천년과 동일하게 가정하기 위해 제기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땅에서의 한 주인 7천년이 창조로부터 6 천년 이후의 심판과 남은 천년 동안의 안식으로 해석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추론이 아니다”(Gli Apocrifi del Nuovo Testamento, 1969, III, 31). 참고, F. A. Regan, Dies Dominica, 215. P. Prigent는 제8일의 개념이 이미 유대인들의 종말론에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Les Testimonia dans le christianisme primitif. L’Épître de Barnabe 1-XVI et ses sources, 1961, 65-71).

 37) F. A. Regan, Dies Dominica, 215. “Epistle of Barnabas의 저자의 의존성은 상당히 분명해 보인다. 15장 4절에 있어서는 에녹 2서 32:2-33에 상세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38) The Epistle of Barnabas 15:8-9, trans. Edgar J. Goodspeed, The Apostolic Fathers, 1950, 41.

 39)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러한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공동체에 속해 있었는데(J. Daniélou, 71), 그 무리는 달력과 관련한 추측에 굉장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로써 왜 안식일 준수자들과 일요일 준수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후자가 영원한 새로운 세상의 상징의 개념으로 제8일의 종말론적 가치를 이용했으며, 그것을 통해 어떻게 일요일이 안식일의 역할과 의미를 평가절하 시킬 수 있었는지 쉽게 이해하게 된다.

 40) J. Daniélou, 70. 이 구절은 아래 인용되고 있다. “본래 일요일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성한 날을 대체하려는 어떠한 의도 없이 안식일에 대한 기독교의 보완적 개념이었다.” Jean Gaillard, “Le Dimanche jour sacré,” Cahiers de la vie spirituelle 76, 1947, 524. H. Riesenfeld는 처음에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 저녁에 예배를 드렸고 후에 그 모임이 일요일 아침으로 바뀌었다(“Sabbat et jour du Seigneur,” New Testament Essays. Studies in Memory of T. W. Manson, 1958, 210-217). 7. H. Leclerg, “Dimanche,” DACL, col. 1523. C. F. D. Moule, Worship in the New Testament, 1961, 16. 유대인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토요일 밤을 일요일에 해당하는 시간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Augustine은 부활절-일요일의 철야기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진술한다. “그때 안식일로써의 저녁은 끝이 나고, 주의 날의 시작에 해당하는 밤이 시작되었다. 이는 주께서 부활의 영광으로 그 날을 성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주의 날의 시작(the beginning of the Lord’s day)에 속하는 밤을 엄숙하게 기념한다”(S. Guelf. 5, 4, Miscellanea Augustiniana I, 460. 참고, Epistola 36, 28, CSEL 34, 57. C. S. Mosna는 안식일 저녁이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에는 더 선호되던 시간이었는데, 이는 그 시간이 안식일 이후였고 그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만나기가 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Storia della domenica, 46, 59).

 41) C. S. Mosna는 이 부분에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예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Storia della domenica, 26).

 42) J. Daniélou, 70.

 43) Justin, Dialogue 24, 1. Falls, Justin’s Writings, 183.

 44) Irenaeus, Adversus haereses 1, 18, 3, ANF 1, 343.

 45) J. Daniélou, Bible and Liturgy, 258. 참고, Irenaeus, Adversus haereses 1, 25, 1.

 46) J. Daniélou, Bible and Liturgy, 258. J. Daniélou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들[영지주의자들]의 환상은 점성술에서 빌려온 것이었는데, 그로 인해 당시의 헬라주의적 지역과 특히 신피타고라스학파에 그 개념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생각의 가장 기본은 우주의 창조자(cosmocratores)의 영역인 일곱 개의 행성 구와 운명의 신(heimarmene)의 압제 아래서 인간을 쥐고 있는 집정관들, 변함없는 별들과 하늘 너머의 불변과 안식의 장소를 대조하는 것이다(Cumont, Les Religions orientales dans le paganisme romain, 162).” 이어 Daniélou는 영지주의자들이 “기독교의 제8일의 최고의 존엄함과 행성 구들에 대한 피타고라스적 관점을 어떻게 결합시켰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그 둘의 결합은 옥타브의 개념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에서 장래의 나라가 아니라, 그 앞에서 인간이 오직 하찮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높은 곳의 어느 세상을 의미한다”(ibid., 259). Irenaeus는 Valentinian으로 알려진 영지주의 종파에 대한 중요한 한 가지 예를 제시하는데, 이들은 “그[데미우르고스]가 또한 세 개의 하늘을 만들었으니, 그들이 말하길 그가, 데미우르고스가 그 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그를 Hebdomas(7일, 일주일, 7의 왕국 등)로, 그의 어머니를 Achamoth Ogdoads라고 칭하며 처음 불려진 것과 최초의 Ogdoad의 수를 Pleroma(온전한 상태, 특히, 하나님의 존 재에 관한)로 보존시킨다”(Adversus haereses 1, 5, 2, ANF 1, 322). 여기서 Ogdoad(제8)은 분명 지고한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47) Clement of Alexandria, Excerpia ex Theodoto 63, 1, SC 23, 185. Origen, Contra Celsum 6, 22. 특히 Irenaeus, Adversus haereses 1, 5, 3, ANF I, 323.

 48)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eis 4, 25, 158, 4-159, 3.

 49) ibid., 6, 16, 138.

 50) F. A. Regan, Dies Dominica, 224. J. Daniélou, 72, 73. “하늘의 세상, 장래의 나라의 개념으로 제8일에 대한 교리는 일요일 준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기초로 구약에서 제8일과 관련된 본문들을 찾아냈다. ∙∙∙ 그것은 반유대적 비판의 한 측면으로 안식일을 거절하고 일요일을 드높이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 처음 그 대립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예배의 날에 관한 것이었다.”

 51) J. Daniélou, 65. “Irenaeus는 일곱 번째 천년과 제8일의 개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제7일에 그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장차 도래할 시대인 제8일에 그분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형벌과 생명의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편에서 옥타브가 언급된 이유이다’(5, 28, 3).”

 52) Irenaeus의 안식일에 대한 개념은 동일하지 않다. 일부 경우에 그는 Justin의 견해를 공유하고 있다. Justin은 “하나님에 대한 의와 사랑이 망각 속에 사라지고 이집트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안식일과 할례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형벌 ∙∙∙ 속박의 차원에서 주신 것이라고 설명한다(Adversus haereses 4, 16, 3이하, ANF I, 481-482). Justin과 같이 Irenaeus의 글에서도 유대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이 이러한 견해를 부추겼다. 그러나 그는 구약의 하나님의 악한 개념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안식일을 평가 절하했던 영지주의자들의 역 오류에 봉착하게 되었다.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반박하기 위해 그는 안식일이 인간성의 진보적 발달을 돕는 긍정적 기능이 있다고 변호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의 표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표상들은 어느 한 현명한 예술가(a wise Artist)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도 아니었고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즉 특별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Adversus haereses 4, 16, 1, ANF I, 481). 이러한 기독교적 의미와 더불어 Irenaeus는 안식일에 중말론적 의미를 덧붙인다. “왕국의 때는 ∙∙∙ 의로운 자들에 대한 진정한 안식일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어떠한 세상일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탁자를 가까운 곳에 두고 모든 종류의 음식들이 그들에게 제공될 것이다”(Adversus haereses 5, 33, 2, ANF I, 562. 참고. Ibid., 5, 30, 4; 4, 8, 2). 후에 살펴 보겠지만, Augustine은 일곱 번째 천 년에 대한 물질주의적 해석을 처음에는 받아드렸으나 후에는 거절했다. Irenaeus의 안식일에 대한 영화(spiritualization, 교부들이 뒤를 이었던)는 안식일의 가치를 높이려는 긍정적 노력이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보호하는 동시에 안식일 계명을 없애기 위한 교묘한 속임수에 해당한다.

 53) Origen, Selecta in Psalnos 18, 164, PG 12, 1624.

 54) Ibid., 118, 1, PG 12, 1588. Origen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성경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의 날에 만나를 내리시고 안식일에는 중단하신 것이 확실하다면, 유대인들은 우리의 주의 날이 그들의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In Exodum honmiliae 7, 5, GCS 29, 1920).

 55) Cyprian, Epistola 64, CSEL 3, 719. 참고. Carthaginense Concilium sub Cypriano tertium, PL 3, 1053.

 56) Syriac Didascalia 26, ed. Connolly, 236.

 57) Ibid., 238.

 58) Hilary, Tractatus super Psalmos 12, CSEL 22, 11.

 59) Ibid., CSEL 22, 14.

 60) Victorinus,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ANF VII, 342. Asterius of Amasa는 숫자8은 어떠한 시간 순환의 체계와도 관련이 없다는 근거를 들며 제8일의 우월성을 변호한다.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8명의 사람들에게 홍수가 일어난 후, 그것이 그 민족의 첫 번째 부활이므로,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제8일에 시작하셨다”(Homilia 20, 8, PG 40, 444-449).

 61) Victorinus, 342.

 62) Ambrose, Explanatio Psalmi 47, CSEL 64, 347. “그러므로 제7일은 날은 수수께끼에 해당하며, 제8일은 날은 부활에 해당된다”(Epistola 26, 8, PL 16, 1088).

 63) Ambrose, 1140.

 64) Ibid., 1139.

 65) Ibid., 1137.

 66) Ibid., 1137. “성령의 덕으로 인한 일곱째 날의 가치는 대단하다. 그러나 동일한 영이 일곱째 날의 이름을 짓고 여덟째 날은 성별해 놓았다. 그 안에 그 이름이 있고, 그 안에 그

 열매가 있다.”

 67) Ibid., 1137-1138.

 68) Ibid., 1139.

 69) Ibid., 1140~1141.

 70) Jerome, Commentarius in Ecclesiastem 11, 2, PL 23, 1157.

 71) Ibid.

 72) Augustine, Epistola 55, 23, CSEL 34, 194.

 73) Augustine, Sermo 94, Biblioteca Nova, ed. May, 183.

 74) C. Folliet, “La Typologies du sabbat chez saint Augustine,” Revue des Études Augustiniennes 2(1956):371-390.

 75) Irenaeus와 관련해서는 각주 52를 참고하라; Victorinus는 각주 60을 보라; Tertullian은 천년을 하나님께서 다시 지으시는 새로운 예루살렘 성내 지상에서의 천년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기간으로 해석한다(Adversus Marcionem, 3, 24; 4, 39). Hippolytus는 그리스도 의 재림의 정확한 날을 추측하며 7년 제도를 만들어낸다(In Danielem commentarius 4, 23~24).

 76) 한 설교문에서 Augustin은 이미 지나간 아담부터 그리스도까지의 다섯 시기를 열거한다. 이어 그는 설명한다. “주님의 오심과 함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시대가 된다. ∙∙∙ 이 시기가 지나면 안식일과 온전한 성인들이 찾아올 것이다∙∙∙우리는 최초의 인간이 잃었던 영생과 축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옥타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수께끼들을 풀어낼 것이다.” Augustine, Sermo 80, PL 38, 1197. Augustine에 따르면, 종말론적 제7일과 제8일의 기본적인 차이는 질적인 것이다. “하나는 제7일이 의미하는 것으로 시간 가운데 여전히 있는 동안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간의 장인과 더불어 모든 시간을 초월해 영원히 안식하는 것이며, 이것이 제8일이 뜻하는 안식의 개념이다”(Sermo 94, Biblioteca Nova, ed. Mai, 184). 그는 또한 제8일을 부활의 계시로 표현한다. “주의 부활 이전, 거룩한 선조들 또한 부활을 의미하는 옥타브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예언의 영이 그들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준수로 인해 그 신비는 보류되어 다른 곳에 감춰져 있었다”(Epistola 55, 23, CSEL 34, 194).

 77) “나는 또한 이 개념을 일찍이 품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주장하기를, 부활한 자들은 그들의 여생을 아무런 제약이 없는 물질적 축제 속에서 보내게 될 것인데, 그곳에는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하고, 그와 같은 공급에는 절제의 경계란 없으며, 신뢰성의 한계 또한 초월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을 믿는 자들은 물질주의자들뿐이다.” Augustine, City of God 20, 7(trans. Henry Bettenson, ed. David Knowles, 1972, 907). Augustine은 일곱 번째 천년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지만, 제7일과 제8일의 안식을 결합시킨다. “중요한 것은 제7일이 우리의 안식일이 될 것이며, 그 끝은 저녁이 아니라 주의 날, 즉 영원히 지속될 제8일이 될 것이다”(City of God, 22, 30, trans. Henry Bettenson, 1091).

 78) Augustine, In Johannis evengelium tractatus 20, 2, PL 35, 1556. 참고, Enarratio in Psalmos 91, 2, PL 37, 1172. “양심이 선한 자는 평온하다. 그리고 바로 이 평온함이 마음의 안식일이다.”

 79) Gregory the Great, Epistola 13, 6, 1, PL 71, 1253.

 80) Gregory the Great, Moralium 35, 8, 17, PL 76, 759.

 81) Gregory the Great, Moralium 1, 8, 12, PL 75, 759.

 82) Gregory the Great, Hommiliarum in Ezechielemm 2, 4, 2, A, 76, 973이하.

 83) J. Daniélou, 87. 참고, Iden, Bible and Liturgy, 264.

 84) 일요일이 안식일의 연속이 아닌 그 날을 대체하는 날, 즉 새로운 안식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요일에 종말론적 상징성을 적용하는 경우의 가능성은 한계가 있다. 이는 그것이 여전히 대체적 개념이 아닌 안식일의 연속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Eusebius는 명확하게 “이동”(transference)의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안식일과 관련되어 규정되어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주의 날로 이동시켰다. 그 이유는 주의 날 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우월한 날이며, 유대인들의 안식일보다 더욱 가치 있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Commentaria in Psalmos 91, PG 23, 1172).

 85) Basil, In Hexaemeron 2, 8, SC, 177. 11. PG 29, 52B. De Spiritu Sancto 27, SC, 236-237.

 86) Basil, In Hexaemeron 2, 8, SC, 180. “왜 그[모세]는 이 날을 첫째(the first)라고 하지 않고 1(one)이라고 했는가? ∙∙∙ 그 주 자체는 하루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기반으로 7번 회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자체에서 시작해서 끝마치는 참 순환 주기이다. 이로써 시간의 원리가 왜 첫째 날이 아니고 하루(one day)로 불렸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된다.” De Spiritu Sancto 27, SC, 236.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어, 이는 마치 그것이 규칙적으로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하루(one day)가 된다.”

 87) Basil, De Spiritu Sancto 27, SC, 237.

 88) Gregory of Nazianzus, Oratio 44, In novam Dominicam, PA 36, 612.

 89) F. A. Regan, Dies Dominica, 240. J. Daniélou, 80-81. “Basil이 일요일에 대한 제8일이라는 낡은 명칭을 유지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할 것이다. 일요일에 붙여진 종말론적 상징만이 남게 될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이러한 태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Gregory of Nyssa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Hexaemeron에서 그는 일요일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제시하지 않는다.”

 90) Gregory of Nyssa, De octava, PG 44, 609 B-C.

 91) Gregory of Nyssa, In Psalmos 2, 8, PG 44, 504D-505A.

 92) Gregory of Nyssa, De beatitudinibus, Oratio 8, PG 44, 1292 A-D.

 93) Gregory of Nyssa, Adversus eos qui castigationes aegre ferunt, PG 46, 309.

 94) John Chrysostom, De compunctione 2, 4, PG 47, 415.

 95) J. Daniélou는 이 발전을 인정하고 있다. “Chrysostom의 본문은 제8일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에 대한 최극단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주의 날에 대한 그 명칭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장래에 올 날과 관련해 그 의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이이다.”(Bible and Liturgy, 275).

 96) Justin, Dialogue 24, 1.

 97) 본문은 J. Daniélou, 87-88을 보라.

 98)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초기 기독교에 존재했다는 것은 근래 연구에서 대체로 무시되어왔다. 이로 인해 일요일 준수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견없이 바로 채택되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관점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초기 기독교 내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관례가 지속되었음을 직간접적으로 증명해줄 모든 교부들의 문헌들 포괄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향후에 이 연구를 하는 것이 저자의 소망이기도 하다.

 99) Jerome, Commentarius in Ecclesiastem 11, 2, PL 23, 1157.

 100) H. Risenfeld, 213.

 101) Louis Duchesne, Origines du Culte chrétien, 1920, 48. “일요일은 애초에 안식일과 병치되어 있었다. 교회와 회당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면서 안식일은 그 날이 결국에는 완벽히 무시될 때까지 중요성을 잃어갔다.”

 102) J. Daniélou는 이러한 발전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8일에 대한 주제는 일요일이 더 이상 유대인들의 제7일과 반대되는 개념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면서 점차 일요일로부터 분리되었고 그 예배의 뿌리를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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