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9장 일요일 신학
 암브로시우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히에로니무스(A.D. 342-420년경)도 마찬가지로 제7일과 제8일 속에서 율법의 시대로부터 복음의 시대로 이행하는 상징을 발견한다. “7이라는 숫자가 성취됨으로써 이제 우리는 제8을 통하여 복음에 이르게 된다.”70) 그러므로 히에로니무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퇴보의 표가 되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유대인들은 그 일곱 번째 세계가 주어졌지만, 주의 날의 부활을 부인했기 때문에 여덟 번째 세계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설명(전도서 11:2를 암시함)하고 있기 때문이다.71) (382.2)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A.D. 354-430)는 아마도 서방의 교부들 중에서 제7일과 제8일 모두를 종말적이고 신비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가장 사색적인 추론을 한 사람일 것이다. 비록 그가 이 주제를 다루면서 그 심오한 영적 통찰력들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독자들과 논쟁을 벌이거나 그들을 현혹시키려하지는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은 여전히 제8일 속에서 성취될 일시적이고 종속적인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제8일의 신비는 “거룩한 선조들에게 감춰지지는 않았다. ∙∙∙ 그러나 그것은 단속되었고 숨겨졌으며 안식일의 준수로서만 오직 가르쳐졌다.”72)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할례나 홍수의 침례적인 상징들 속에서 제8일의 예시를 발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홍수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여덟 사람들을 제8일과 명백하게 연관시키면서, 그것들은 “마치 언어의 다양성에 의해 나타나는 것과 같이 다른 표징들에 의해 다른 방법들 속에서 나타 나게 되는 동일한 것들”이라고 말했다.73) (383.1)
 폴리엣(CFolliet)이 잘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제8일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은 안식일의 가르침과 분리할 수 없다.74) 이레네우스, 힙폴리투스, 테루툴리아누스, 빅토리아누스 등이 가르친 서방의 천년왕국 사상에 따라,75) 그는 창조 주간이 이 세상 역사의 일곱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그 일곱 시대 다음에는 제8일인 새로운 영원한 시대가 온다고 해석한다. 처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제7일과 제8일이 가지는 종말적 의미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8일은 이 세상에 사는 성도들이 누리게 될 미래의 안식인 일곱 번째 시대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76) 그는 나중에는 진지하고도 성숙된 연구의 결과를 통해 일곱번째 천년을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육체적인 시간으로 이해하는 보편적인 물질적 이해를 거절했으며, 제칠일의 안식을 영원한 여덟 번째 안식과 통합시켰다.77) (383.2)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제8일은 이러한 종말적 안식일에 대한 역사적인 연속이요 정점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면 세계의 평화를 향해 가는 영혼들의 신비스러운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노예적인 수고, 즉 모든 죄악을 그치므로 영적으로 준수하는” 안식일은 “선한 양심이 가지는 영적인 평안과 고요”를 상징하는 것이며, 반면에 제8일은 성도들이 고대하는 더 위대한 영원한 평화를 나타내는 것이다.78) 이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제8일은 역사적인 시각과 내면적인 실체 그 두 가지 면에서 안식일의 성취를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384.1)
 고대 라틴교회 최후의 대학자인 대교황 그레고리우스(Pope Gregory the Great, A.D. 540~604년경)는 제8일의 상징성을 사용하여 안식일에 대한 일요일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논리적이고도 실제적으로 노력한 마지막 실례가 아닐까 싶다. 그 교황은 분명한 말투로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384.2)
우리들 중에 타락한 영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거룩한 신앙과 반대되는 타락한 교리의 씨를 뿌렸음이 내게 보고되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설교자들 이다’라는 말 외에 내가 그런 사람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 안식일에 대해서 기록된 말씀들을 우리가 영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영적으로 준수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안식일은 안식을 의미하고 우리는 참된 안식일 되신 바로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79)
(384.3)
 그레고리우스는 제8일을 지지해주는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라는 전도서 11:2에 나타난 전통적인 명령을 언급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예수께서 참으로 주의 날에 부활하였는데, 그 날은 제칠일 안식일 다음에 오는 날이기 때문에 창조로부터 여덟 번째가 되는 날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성경 구절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에 대한 예시로 해석하고 있다.80) 그 교황은 욥이 자신의 아들과 딸들에 대한 잔치가 끝난 후 여덟 번째 날에 일곱 번제를 드린 것을 제8일을 예시해주는 구약성서의 또 다른 증거로 제시한다. 그의 설 명에 따르면 “그 이야기가 진정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축복받은 욥이 제8일에 번제를 드린 것은 부활의 신비를 경축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었다”는 것이다.81) (385.1)
 그레고리우스는 또한 제7일과 제8일이 가지는 종말적 해석을 소개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 그 자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새롭고 흥미롭게 그 해석을 소개하고 있다. “구세주께서 자신 안에서 경험하셨던 놀라운 일들은 진실로 우리 안에서 일어날 경험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처럼 우리도 여섯째 날에는 슬픔을 경험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을 경험하며, 여덟째 날에는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섯째 날은 “슬픔과 고통으로 특징지어진” 현재의 삶을 나타낸다. 안식일은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된 영혼이 쉼을 얻게 되는” 때인 무덤에서 휴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8일은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육체적인 부활과 영혼이 육체와 다시 영광스럽게 연합하므로 얻게 되는 기쁨”을 상징한다. 결과적으로 그레고리우스는 “제8일이 안식일 후에 이르러오는 빛을 통하여 광대한 영원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놓는다”고 진술하면서, 태양의 날에 숨겨져 있는 암시를 가지고 결론을 내린다.82) (385.2)
 이상의 증거자료들은 제8일이 가지는 풍부한 상징들이 계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했던 주목적은 본질적으로 일요일을 통해 안식일이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요일에 의하여 안식일이 연장되었음을 증명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우리가 살펴 보았던 것처럼 후행적인 논증들이 성경과 역법(曆法)의 추론들, 자연 세계 등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추론되었는데, 그 추론들은 제7일(안식일) 보다 제8일(일요일)이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386.1)
 제8일이 일요일로부터 분리됨
 4세기가 시작되면서, 제8일의 숫자적 상징 의미가 점차적으로 일요일로부터 분리되었고, 그 상징적 의미도 논쟁을 위한 증명자료로써 보다는 교훈적인 수단으로써 사용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종말적 기대감을 유지하고 물질적인 사물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활용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 그 자체에 대한 한 상징으로 사용되 었다. 그 이유는 다니엘루가 잘 관찰한 대로, 그것이 “8이라는 숫자가 나타나는 구약성서의 본문들과 부활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해 주고, 이러한 구절들 속에서 부활의 예언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었다.83)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특별히 동방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캅파도기아 교부들은 제8일의 상징들을 장황하게 언급하면서도, 그 명칭과 의미를 일요일에 적용시키는 것은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84) 그들은 오히려 그 상징들이 현재적 삶을 위한 제8일의 종말적 의미를 암시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386.2)
 가이사랴의 감독 바실리우스(Basil, A.D. 330-379년경)는 “제8일은 7일의 시간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여, 그것이 “미래의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긴다.85) 하지만 그는 다가오는 미래 세계에 대한 의미를 확립하기 위해서 “8” 보다는 “1”이라는 숫자를 더 선호한다. 그는 매주 계속 돌아오는 그 첫 날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을 상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헬라의 “모나드”(monad) 사상을 본질적인 창조의 날로부터 끌어낸 성서의 “1”(μία)과 연결시킴으로서 숫자 “1”을 강조한다.86) 바실 리우스에 따르면, 숫자 “1”“8” 모두에 의해서 표현되는 이러한 의미 때문에 “교회는 성도들에게 일요일에 서서 그들의 기도문을 암송하도록 가르치는데, 그것은 영원한 삶을 계속적으로 상기하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그 영생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을 소홀히 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87) 제8일의 의미를 일요일에 서서 기도하는 것과 연관시키는 그의 설명은 이것과 관련된 설명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사실 그의 설명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387.1)
 바실리우스와 동시대 사람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 A.D. 329-389)도 제8일의 개념을 채택하여 그것을 “도래하는 삶에 적용시키”는데, 그는 일요일 준수를 장려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선행을 하도록” 권고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88) 이러한 경향은 다른 캅파도기아인이었던 바실리우스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 A.D. 330-395)에 의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진술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비록 “제8일에”(On the Ogdoad)라는 논문을 기록했지만, 레간(F. Regan)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주님의 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89) 그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플라톤적 철학 용어를 사용하여 제8일의 개념을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없으며, “변경되거나 변화되어” 질 수 없는 미래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짓는다.90) 그는 또한 신비주의자였기 때문에 제8일을 “내면적인 삶이 지향하는 미래 시대”로 여기고 있다.91) 팔복 중 여덟 번째에 대한 주석 안에서, 그는 제8일이 “죄로 얼룩진 인간 본성을 정화시키기 위해 돌이키고 ∙∙∙ 유한한 세속적인 삶을 상징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의 껍질을 벗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신비적으로 설명하는데, 특별히 구약성서의 정결예식과 할례 예식 속에서 그러한 제8일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92)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는 숫자 “8”의 의미를 통해서 안식일을 대신해 일요일을 준수하도록 권고하기 위한 논쟁적인 논증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영적인 삶의 상징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동방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안식일과 일요일을 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우호적인 것으로 보는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아마도 그가 숫자 8을 일요일 준수와 연결시키지 않고 있음을 설명해준다. “어떤 시각으로 주의 날을 바라보는 그대는 안식일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두 날이 우호적인 관계를 가진 날이며 만일에 하나를 해하면 다른 날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는 혹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93) (387.2)
 제8일을 일요일 예배의 준수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그 종말적 의미를 분리시킨 캅파도기아 교부들의 입장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A.D. 347-407년경)이 진술한 한 놀라운 진술에 의해서도 지지되고 있다. 그의 두 번째 “회환집”(Treatise on Compunction)에서 크리소스톰은 깜짝 놀랄만한 진술을 남기고 있다. (388.1)
그렇다면 제8일은 권세 있는 자들을 지푸라기처럼 태우고 몹시 떨게 만드는 위대하고도 명백한 주의 날 이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성경은 그것을 신분이 변화되고 미래의 삶이 시작되는 것을 가리키는 여덟 번째 날로 부른다. 사실 현실의 삶 속에는 첫째 날 시작해서 일곱 째 날 끝나고 그 동일한 단위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주일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 때문에 아무도 주의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첫째 날이라고 부른다. 사실 칠일주기는 8이라는 숫자로 확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마지막에 이르고 완전히 해체되어져 버릴 때, 제8일의 과정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94)
(389.1)
 크리소스톰의 이 진술은 제8일에 대한 가장 발전된 종말적 해석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그의 진술은 일요일 준수의 시작과 발전에 수반되어 일어났던 변화들을 어느 정도 요약해 주고 있다. “제8일”이라는 바로 그 명칭과 그것이 가지는 본질적인 종말적 의미는 안식일보다도 일요일이 정당하고 우월한 것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바르나바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고 그 후에 몇몇 교부들에 의해서 계속 사용되어져 왔는데, 그러한 존재 이유가 사라지자 이제 그런 개념은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거부되었다.95) 제8일은 오직 도래하는 세대와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만 계속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숫자 8이나 15(7+8)를 포함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본문들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그 시도가 이제는 “제7일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 더 신비스러운 의미를 제8일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96) 그보다는 오히려(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든지 아니면 침례의 부활이나 종말적 부활을 말하든지) 부활 사건이 선지자들에 의해 이미 예시되었고, 예언되어졌음 을 증명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되었다.97) (389.2)
 초기 기독교사회에서 사용된 “제8일”에 대한 이 짧은 조사를 통해서 일요일의 기원과 관련한 몇 가지 중요한 결론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390.1)
 우선, 제8일에 대한 표상학이 특별히 바르나바스의 서신, 트리포와의 대화 등과 같은 반 유대적 논쟁들을 다룬 작품들 속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안식일 보다 일요일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고안물로 폭넓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일요일 예배가 논쟁을 야기시키는 새로운 제도로 발생한 것이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도시대의 제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 논쟁은 새로운 예배일을 받아 들이기를 거절했던 소수의 안식일 준수자들(대부분이 유대인 그리스도 인들임)에 의해서 분명히 야기되었다. 제7일 보다 제8일이 종말적인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추론들에 의해서 이것이 지적 되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살펴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논쟁들이 오직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및 유대인들과 다툼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식일과 우주적 주일 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에서 새로운 예배일에 대한 반대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이러한 안식일 준수자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서 제8일에 대한 변증적 논제들이 개발되었다. (390.2)
 제7일보다 제8일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언문학서, 성경, 철학, 천연계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논증들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일요일 준수의 정당성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몇몇 중요한 기독교 집단들로부터 계속적으로 도전받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98) 하지만 그 두 날들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제8일에 대한 상징적 의미는 효과적인 변증적 고안물로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몇 가지 이유에서 일요일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요일은 종말적 제8일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종말적 유대인 그리스도인 단체들에게서 그 날은 단지 일곱 번째 세속적 천년기를 의미했던 안식일보다 우월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 옹호되어질 수 있었다. 영지적인 제8일로서, 일요일은 영적인 존재자들이 천상계를 초월한 영원한 세계에서 누리는 안식일을 의미할 수 있었는데, 그 세계는 이 유한한 세상의 일곱 날의 의미를 초월한 것이었다. 구약성서의 몇몇 내용들(8일 만에 받는 할례,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여덟 영혼들, 모든 산을 뒤덮은 15큐빗(7+8)의 물, 시편 6장12장의 타이틀에 나타나는 “제8일을 위하여,”‘스미닛’ 이라는 표현들, 열다섯 개의 점진적인 성가들, 전도서 11:2나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라”는 표현, 등등) 속에서 교부들이 찾아 낸 8이라는 성서적인 숫자처럼, 일요일의 명성은 구약성서를 기록한 그 “선지자들”에게까지 추적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한 “선지자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제8일은 안식일에 의해서 예표된 율법에 의한 통치가 성취되고, 아마 일요일에 의해서 구현된 것으로 여겨지는 은혜의 왕국이 시작되었음을 “합법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히에로니무스의 다음의 말에서 매우 잘 묘사되었다. “숫자 7이 성취되어졌으므로, 이제 우리는 제8일을 통하여 복음에 이르게 된다.”99) (390.3)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8일”이라는 그 명칭은 일요일이 기원하게 된 관습과 원인들에 대해 어느 정도 힌트를 예시해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일요일 예배는 원래는 토요일 저녁에 거행된 “안식일 예배의 연장으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00)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유대인들과 차별화할 필요가 발생되자, 그 예배는 토요일저녁에서 일요일 오전으로 변경되었음이 틀림없다.101) 이러한 변경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일요일 예배의 도입이 논쟁을 야기시켰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것이 증명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특별히 안식일보다 일요일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묵시적 자료, 영지주의적 자료, 성서적 자료들로부터 발전된 제 8일의 상징적 의미를 논쟁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에 의해서 그것은 증명되어진다. 우리가 또한 알게 된 것은 그 두 날들과 더불어 존재하 였던 논쟁과 관련된 간접적인 증거들인데, 안식일—일요일 논쟁이 진정되자 제8일의 명칭과 의미는 일요일과 분리된 채 오로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서만 계속 활용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102) (3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