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9장 일요일 신학
 안식일의 연속
 어떤 학자들의 제안에 따르면 일요일이 “제8일”로 불린 것은 그것이 일요일 시간으로 확장된 안식일 의식들의 연속으로 고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0) 유대인의 계산법에 따르면 매주의 첫 날은 토요일 저녁 일몰부터 시작된다. 그 시간에 거행된 예배라면 어떤 것이든지 안식일 의식들의 연속으로 여겨지기가 쉬웠다. 그래서 토요일 밤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안식일 예배가 연장된 것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제8일” 이라는 명칭을 새로운 표현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바르나바스는 이런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가 제8일을 옹호하는데 있어서 부활을 기념하는 것으로서 보다는 종말론적 안식일의 연속으로 제안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 해 보았다.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은 현저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바 르나바스는 제8일의 준수를 정당화하고 안식일을 폐지하기 위해서 이전에 제안된 바로 그 동일한 종말론적 논거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그 당시에 “제8일”(숫자에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은 안식일을 대체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안식일에 추가된 부분으로서 이해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것이 또한(διό και) 우리가 제8일을 기쁨으로 준수하는 이유인 것이다”라고 말한 바르나바스의 말을 주목하자. “또한”이라는 수식어구가 제안하는 것은 안식일을 무력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즐겨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이다.41) 그러므로 처음에 일요일이 “제8일”로 명명되었던 것은 다니엘루가 현실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373.3)
유대인들의 안식일처럼 제칠일 안식일을 지켰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이 지난 후 특별한 기독교 성만찬 예식과 더불어 그 유대의 예식을 연장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것을 안식일, 즉 제칠일의 연속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비록 달력에서는 그것이 여전히 주일의 첫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것을 제8일로로 여겨야 했음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안식일이 유대교의 한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를 계승하였다는 의식들은 이러한 이런 생각을 확증하도록 하는 것에 틀림없이 기여했다.42)
(374.1)
 제8일의 우월성
 안식일 준수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교회와 회당 간의 논쟁이 점증되면서, 제8일은 안식일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제8일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상징적 의미들은 기독교와 그들의 일요일의 우월성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유대교 및 그들의 안식일에 대한 성취, 대체 및 교체를 증명하기 위한 논쟁적인 주장으로 폭넓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훼손시키고 제8일을 증명할 수 있게 해주는 몇몇 신학적 변명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유관 자료들(이른바 증언들)이 신구약성서로부터 탐구되었다. 바르나바스가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8일에 대한 신학적인 정당성들을 찾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이사야 1:13과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을 인용하여 안식일 준수를 무효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게다가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월삭과 안식일을 내가 견딜 수 없노라.’ 그분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는 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안식일이 아니다(15:8).” (375.1)
 안식일을 희생하여 제8일의 우월성을 호소하려는 바르나바스의 최초의 노력은 새로운 자료들과 주장들을 가지고 이 가르침을 풍부하게 만든 몇몇 교부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지게 된다. 예를 들면, 유스티노스 마르튀르는 “제8일은 제7일이 소유하지 못한 한 가지 분명한 신비스런 의미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새롭고도 흥미로운 ”증거들을 성경으로부터 추론하고 있다.43)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 것과 홍수로부터 여덟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 그리고 아마도 모든 산들을 덮은 홍수의 수위가 15큐빗(7+8)이었던 것 등을 유스티노스는 제8일 준수를 예표하는 것이며 그것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임의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 편에서 그는 제 칠일을 유대인들의 불순종의 표로 격하시킨다. 이 같은 논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유스티노스가 주장하는 것은 안식일이 모세 이전에는 준수되지 않았고, 하나님 자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으며, 구약성서에서 제사장들과 같은 몇몇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375.2)
 이러한 “증거들”은 이 문제와 관련된 논쟁이 일어나는 곳마다 교부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영지주의 분파들에 의해서도 활용되었던 표준목록이 되었다. 이레네우스는 마르코시안(Marcosians)으로 알려진 영지주의 분파들 중의 한 그룹을 언급하는데, 그 그룹은 “제8일”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이미 유스티노스에 의해서 사용된 호수와 할례의 이야기로부터 논쟁을 이끌어 내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이 여덟 번째 아들이었고, 인간의 육체적 부분이 제8일에 창조되었다는 사실로부터도 논쟁을 이끌어 내었다.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논평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저들은 성경에서 숫자 8을 언급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8일의 신비를 이행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44) (376.1)
 사실상, 다니엘루가 지적하고 있듯이, “유대인들의 적들로 판결된” 영지주의자들은 “이 주제”[즉, 제8일]에 도취되었는데,45) 그 이유는 그것으로 그들이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제거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8일에 대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관점을 이 일곱 번째 세상 너머에서 발견되는 종말적이고 영적인 세상의 안식과 영원이라는 관점과 더불어 도래할 영원한 왕국의 상징으로 대체시켰다. 그들은 확고한 천계(天界)인 여덟 번째 하늘에 의해 둘러싸인 일곱 하늘들과 관련된 피타고라스학파의 개념을 그리스도인들이 제8일에 돌린 명성에 결합시킴으로써 이런 해석을 발전시켰다. 46)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일요일은 “영적인” 백성들에 의해서 여기 이 땅에서 성취할 수 있는 충만하고 완전한 삶의 상징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 150-215)에 의해서 기록된 한 문서에서 데오도투스는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영적인 사람들의 안식은 주님의(κυριακή)날로 불리는 제8일인 주의(κυριακή)날에 이루어진다.”47) 여기에서 주의 날은 영적인 사람들의 영혼이 거하는 초월한 하늘왕국을 가리키도록 하기 위해서 제8일과 동일시된다. (376.2)
 이러한 이단적인 영적 안식의 개념은 고대 기독교 사회에서 가장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 중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게서 반영된다. 클레멘트는 “제사장들은 스스로 정결케 한 후에 칠일을 더 지”냈고 팔일 째 되는 날 속죄제를 드린다는 에스겔 44:26, 7의 내용을 주석하면서,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숫자 7과 8에 돌려진 보편적인 의미를 요약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7은 세상의 일곱 시대나 일곱 하늘, 혹은 현재의 불안하고 죄된 상태를 나타내며, 이와는 반대로 8은 미래 세계의 최상의 안식이나 초월한 하늘왕국, 혹은 변함없고 죄 없는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이다.48) (377.1)
 그의 혼합주의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트는 안식일의 상징인 숫자 7에 대한 적대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상 그는 그것을 “에미도 없고 자식도 없는 숫자”로 여기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숫자 8은 존경받는 특성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주님께서 만드신 모든 사람들이 경축해야할 주의 날이라고 여기고 있다.49) (377.2)
 이제 기독교의 대세를 본다면, 우리는 일곱째 날과 여덟째 날이 우주론적으로 보다는 종말론적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몇 가지의 다른 실제적인 의미들이 또한 성경과 천연계로부터 안출되고 있다. 이러한 모든 해석은 레간이 설명하는 것처럼 “안식일보다 주의 날이 우월하며, 이 제8일 안에서 제7일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고안된 다분히 논쟁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50) (378.1)
 이레네우스는 제7일을 심판과 오는 세계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제8일을 영원한 축복으로 해석하면서 바르나바스의 천년기적 도식을 다시 제안한다.51) 유스티노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안식일을 실존적인 의미, 즉 이 세상에서 살 동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인내하고 악을 삼가도록 주신 제도로 격하시켰다.52) (378.2)
 오리게네스(A.D. 185-254년경)는 안식일을 영적 차원으로 한정하므로 이레네우스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였지만, 그것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점에서는 그와 달랐다. 칠일을 이 세상 역사의 칠천년으로 해석하던 서방의 전통과는 반대로 동방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던 오리게네스는 7이라는 숫자를 현재의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제8일은 미래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부활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는 숫자 8은 도래할 세계의 표상이 된다. 숫자 7일이 현재의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53) 비록 오리게네스가 그 두 날에 대한 논쟁 을 철학적이고 영지주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제7일을 훼손하고 그 대신에 제8일을 높이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주석 책에서 시편 118편을 주석하면서 제7일을 물질과 더러운 행위 및 무할례의 표로 설명하고 있으며, 반면에 제8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제공된 새로운 할례로 말미암은 완전과 영성 및 정결의 상징으로 구별하고 있다.54) (378.3)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A.D. 258년경)는 과도한 우화주의나 천년왕국적인 고려 없이, 제8일을 안식일 준수와 할례 의식 모두를 성취한 “안식일 후의 첫날이요 최상의 날”(id est post sabbatum primus et dominus)로 이해하고 있다.55) (379.1)
 시리아의 디다스칼리아(Spriac Didscalia, A.D. 250년경)에서 제8일은 기묘하게도 안식일부터 안식일까지 계산하여 산정된다. “안식일 그 자체는 그 안식일까지 계산되며 그것은 8[일]이 된다. 이런 식으로 8일 이[이르게 되는]데, 그 날은 안식일이나 심지어는 주의 첫 날 그 이상이 된다.”56) 안식일로부터 안식일까지 계산하므로 말미암아 제8일은 여전히 안식일이 되기 때문에, 그 저자가 이 명칭(제8일)을 어떻게 일요일에 합법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그의 불합리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안식일보다 일요일이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는 예외적으로 첫째 날의 상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첫째 날은 제칠 일 이전에 창조되었으며, 창조의 개시를 의미하며, 초태생을 구별하는 율법에 의해 구별된 것으로 보여지며,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 나중된다”는 말씀에 비추어 제칠일의 지위를 대신 취하게 될 것으로 예언되었다. 게다다 그 “디다스칼리아”에서는 안식일을 평가절하 하기 위해서 모세 이전의 부조들과 의로운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며 하나님 자신도 안식일에 한가로이 쉬지 않으셨다는 전통적인 주장들을 역시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다. 그런 후 바르나바스보다도 더 명확하고도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일곱 번째 천년을 나타내는 [마지막] 안식의 한 전형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오셨을 때 그 전형은 성취되었고 ∙∙∙ 도움이 될 수 없는 그것은 파기되었다.”57) (379.2)
 포이티어스의 감독 힐라리우스(Hilary, Bishop of Poitiers, A.D. 315-367년경)는 고전적인 사례를 들면서 제8일은 안식일의 연속이며 성취라는 입장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록 그 안식일이라는 명칭과 그것에 대한 준수가 제칠일을 위해서 확립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의 제8일에 완전한 안식일 절기를 지킨다. 그것은 또한 첫 날이기도 하다.”58) 나중에 그는 제 15성 가송(미사 중에 부르는 성가대의 응창)을 “구약의 제칠일의 연속이며 그 복음의 제8일”로 이해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가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 에 이르게 된다”고 이해한다.59) (380.1)
 오스트리아 펫타우의 감독 빅토리누스(Victorinus, Bishop of Pettau in Austria, A.D. 304년경)는 그의 짧은 논문인 “세상 창조에 관하여”(On the Creation of the World)에서 제7일과 제8일의 의미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숫자 7을 찾아서 종합하였는데, 그 숫자는 현재 세상의 존속 기간과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성,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선민들과 더불어 통치하실 때인 일곱 번째 천년”을 나타내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가 이해하고 있는 제8일은 “여섯 번째 시편”이라는 제목에서 제 8일에 대하여 공표한 내용에서 나타나는데 ∙∙∙ 그것은 “사실 미래 심판의 제8일이며, 일곱 부분으로 된 배열의 순서를 지나 일어날 것이다.” 빅토리아누스에 따르면, 모세가 “할례를 제8일이 지난 후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을 때와 여호수아가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돌라고 명령했을 때,” 그리고 맛티아스가 “안티오쿠스의 장군을 살해했을 때,” 마침내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은 안식일이 열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0) (380.2)
 이처럼 기괴하고 불합리한 주장들을 가지고 안식일을 조직적으로 평가절하시키고 결과적으로 제8일을 고양시키게 만든 동기는 무엇이었는 가? 빅토리누스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안식일을 거룩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계산된 시도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남겨 준다. 이러한 사실은 일요일을 옹호하고 안식일을 반대하기 위해서 고안된 터무니없는 주장들에 의해서 지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정신을 싫어했던’ 그의 선지자들로 인해 말씀하신” 명령인 안식일에 금식해야 한다는 특별한 명령에 의해서도 지적되고 있다.61) (381.1)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는 제7일과 제8일이 가지고 있는 상징에 대한 몇 가지 전통적인 해석들을 다시 제안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그 논쟁에 대한 자신만의 실제적인 주장들을 추가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안식일은 율법의 성화에 기초한 고대 경륜의 상징이었”지만 제8 일은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에 의해서 성결케 된” 새로운 경륜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62) 암브로시우스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제8일은 여기 이 땅 아래에서 시작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일곱 번째 세대가 끝났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을 만드는 제8일의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3) 하지만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부활을 통하여 획득하신” 제8일의 완전한 안식은 “이 땅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64) (381.2)
 “호론티우스에게 보내는 서한”(Letter to Horontius)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제8일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연적 탄생과 초자연적 탄생이라는 유비를 사용한다. 일곱 달 만에 탄생한 아이는 곤경에 처해질 것이다. 그러나 제8일에 거듭난 자녀들은 하늘의 왕국을 얻을 것이다.65) 이렇게 말한 다음 암브로시우스는 제7일에는 그 “명칭”이 발견되지만 제8일에는 성령의 “열매”가 발견된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다.66) 할례 예식뿐만 아니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라는 전도서 11:2“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시편 118:24의 말씀 등과 같은 구약성서의 구절들을 제8일에 대한 예언과 예시로 또 다시 해석하고 있다.67) 이전의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암브로시우스도 역시 “하나님이 사전에 다른 한 날을 정해놓으셨는데 ∙∙∙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명령들을 경멸이 여기고 거절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믿고 있었다.68)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마쳐진 일곱 번째 시대의 세계를 상장하는 제칠일을 뒤로 하고 구약성서에서 예시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개시되었으며, 안식일을 성취하고 대신하는 것을 나타내는 제8일의 은혜가운데로 들어간다고 강조하고 있다.69) (3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