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9장 일요일 신학
 여기에서 안식일과 일요일은 옛 창조와 새 창조의 상징들로 묘하게 대조된다.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마쳐진” 안식일에 의해서 기념된 첫 번째 창조와는 반대로, 일요일은 “끝이 없는 두 번째 창조”의 본성으로 그 우월성이 확립된다. 더욱이 새 창조는 “옛 창조를 새롭게 회복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안식일과 그 의미를 합병한 것이었다. 이 세련되지만 인공적인 신학적 구조에 의해서, 안식일은 “이전 사람들(즉, 유대인들로 하여금 창조의 끝과 시작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제공된” 일시적인 제도가 되어 버린다.18) (366.3)
 안식일을 첫 번째 창조의 마침과 두 번째 창조의 시작을 고지하는 제도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완전히 비성서적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그분의 모든 일들”로부터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들은 그분 스스로 완성시켜야할 필요가 있음을 이것으로 말하고자 하”셨기 때문이었다고19)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의 실제적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은 특별히 창조의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하고 있다.20)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두 연속 창조와 같은 그러한 인공적이고 비성서적인 교리들을 고안하도록 만든 원인 은 무엇이었을까? “디다스칼리아”와 같은 문서에 기록된 실존하는 논쟁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영리한 변증적 논증은 창조를 기념하는 것으로서의 안식일의 우월성에 대한 안식일 준수자들의 주장을 논박할 필요성 때문에 야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1) (367.1)
 이러한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첫째 날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이교도들과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공격으로부터 새로운 예배일을 옹호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태양의 날에 그들이 태양신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첫 째 날에 발생한 사건들인 빛의 창조와 의의 태양이신 분의 부활하심을 경축하는 것이었다고 이교도들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첫째 날이 일곱째 날보다 우월한데 그 이유는 그 날이 새로운 창조의 기념일이요, 그리스도의 세대인 새 창조의 시작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안된 유일한 주장들은 결코 아니었다. 제8일의 상징적 의미는 안식일보다 일요일이 우월하다는 것을 옹호하는 변증적 기교들 중에 또 다른 한 유효한 병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 우리는 일요일의 도입을 위한 동기로 추가할 수 있는 이 요소를 살펴볼 것이다. (367.2)
 제8일(The Eighth Day)
 첫째 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수적 상징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되었다. 근대 사상에서는 낯선 이러한 유형의 상징들은 초기 기독교 설교가들과 신학자들에게 여러 고대 기독교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실제적이면서도 여전히 심오한 논쟁들을 제공해 주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 A.D. 329-389)가 주장했던 것처럼, 안식일은 유대 주일의 제7일이었기 때문에 일요일은 “다음에 오는 날들과 관련해서는 제1일로, 그리고 이전의 날들과 관련해서는 제8일로” 간주될 수 있었다.22) 우리가 곧 깨닫게 될 것이지만, 초기 5세기 동안의 기독교 문헌에서는 일요일을 전자인 제1일로 명명하는 것보다 후자인 제8일로 명명하는 것이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 (368.1)
 7일 주기의 일주일에서 제8일이 가지는 불합리성이 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고민거리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널리 퍼져있는 하나의 관례에 의해서 제안되고 있다. 이탈리아 같은 곳에서 몇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지켜지던 그 관례에서, 한 주일은 시작점이 되는 특정한 요일로부터 다음 주의 그 동일한 요일까지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계산되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사람들은 특정한 일요일에 만나서 다음 주 일요일에 만나자는 약속을 할 때 흔히 “나는 오늘부터 한 주일 후에 너를 만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오늘부터 여덟 번째 날(oggi otto) 만날 것이”라고 종종 말한 것이다. 그 이유는 여덟번째 날에 두 일요일이 모두 계산되어지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그 동일한 원칙에 의해서 한 주기를 구분하는 자신들의 제8일을 “눈디눔, 즉 제9일”(Niundinum-ninth day)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총괄적인 계산법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는 증거들이 몇몇 교부들의 자료들에서 암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테르툴리아누스(A.D. 160년경 부터 225년경까지)는 이교도들이 동일한 명절을 일 년에 오직 한 번 거행하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일요일을 의미하는 “매주 제8일마다” 거행하였다고 기록하였다.23) (368.2)
 일요일이 “이전의 날들과 관련해서” 제8일로 여겨질 수 있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는 그러한 명칭이 약 5세기까지 일요일을 명명하는 것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 명칭의 기원을 추적해내는 과제는 쉬운 것이 아닌데, 콰큐아렐리(Quacquarelli)가 관찰한 것처럼, “제8은 교부들에게 계속적으로 새로운 사상의 내용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24) (369.1)
 침례
 로르도프의 제안에 따르면 “침례가 일요일에 베풀어졌고 우리가 알기로 침례는 숫자 8을 연상하는 상징과 일찍부터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은 숫자 8과 관련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25) 침례가 팔 일 만에 받는 할례와 물의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여덟 명의 사람들에 대한 예표를 성취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이러한 관련성이 4세기 이전의 교부들의 작품들 속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한 첫 번째 사람은 유세비우스(A.D, 340년경)이다. (369.2)
제8일은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정결케 하시는 것으로 우리가 믿는 구세주께서 부활하신 주의 날이다. 이 날은 자녀들이 상징적으로는 할례를 받는 날이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모든 영혼들이 침례에 의해 깨끗케 되는 날이었다.26)
(370.1)
 이러한 침례의 부활에 대한 주제는 할례와 홍수이야기에 대한 표상학적인 것으로부터 확립된 것으로써 4세기의 몇몇 문헌들 속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데,27) 그것은 8각형 모양을 한 기독교 성수반(聖水盤)과 침례탕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다니엘루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점에서 우리는 그것과 일요일의 관계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렸다.”28) 초기의 문헌들 속에서, 8일 만에 행하는 할례와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8명은 원래 일요일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예표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유스티노스 마르튀르는 방주 안의 여덟 사람들을 “영원히 능력을 가진 첫 사람으로서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신 그리스도께서 현현하신 제8일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29) 키프리아누스(A.D. 258년경)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대의 관습인 할례와 일치하게 제8일에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는데, 그 이유는 “여덟 번째 날, 즉 안식 후 첫날이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적 할례를 제공해 주시는 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하였다.30) 이와 유사하게 오리게네스도 제8일이 즉각적이고 전체적인 할례, 즉 침례를 통한 세상의 정화를 제공해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370.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8일이 출현하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불결했고 할례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부활의 제8일이 오자 우리는 즉시 그리스도의 할례에 의해 정결케 되었고, 매장되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31)
(371.1)
 이 본문에서 할례는 일요일 침례 예식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정결케 하는 능력으로 추정된 부활 사건 그 자체와 연관된 것이다. 더욱이 초기 교회에서 침례가 오직 일요일에만 거행되지는 않았다. 그의 논문 “침례에 관하여”에서 테르툴리아누스(A.D. 160년경~225년경)는 침례를 받는 가장 적당한 날로 유월절과 오순절을 추천하면서도, “매일이 주의 날이며, 어느 시간이든지 어느 때든지 침례를 받기에 적합하다”라고 또한 인정하고 있다.32) (371.2)
 우주적-주간
 제8일이 일요일에 대한 명칭이 된 것은 널리 보급된 천년왕국적인 종말론적 사유에서 기인한 종종 “우주적 주간”으로 불리는 제칠일 창조 주간에 대한 깊은 숙고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는 보다 그럴듯한 설명이 제기되기도 한다. 유대 묵시 문학에서 세상이 지속되는 기간은 일반적으로 일곱 기간(혹은 천년)으로 세분화되었다. 그 중 일곱 번째 기간은 일반적으로 회복된 낙원의 시기에 해당된다.33) 일곱 번째 기간의 끝에 새로운 영원한 시대가 시작될 것인데, 그 시대는 그렇게 명명된 것은 아니었지만 “제8일”로 기꺼이 여겨질 수 있었다. 그것은 일곱 번째 기간 다음의 기간이었기 때문이었다. (371.3)
 이러한 견해들은 기독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보편화되어 있었다.34) 예를 들어 슬라브어로 된 “에녹의 비밀”(Secrets of Enoch, 1세기 말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임의로 삽입된 구약의 외경)에서, 우리는 7일 천년기 계획을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35) 영원한 새 시대를 제일 처음 “제8일”로 분명하게 명명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371.4)
그리고 내가 또한 제8일을 정하였는데, 제8일은 나의 일 후에 창조된 첫 번째 날이 되어야 하고 처음 7일은 일곱 천년의 형태로 주기적으로 나타나야 하며, 제8 천년의 시작에 년, 월, 주, 일, 시가 없는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이 있게 될 것이다.36)
(372.1)
 제8일을 새로운 영원한 세계의 전형으로 나타내는 이러한 종말적 상징은 분명히 안식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호소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 상징이 그들에게 일요일의 도입과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논증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바르나바스의 서한(A.D. 135년경)에서 이 어법을 사용한 첫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 편지서에서 제8일에 의해 추구된 우주적 주간에 관한 에녹서의 가르침은 안식일을 거절하고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논쟁적으로 활용되고 있다.37) 바르나바스는 6일 창조를 해석하면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을 의미하기 때문에, 6천년에 그분께서 모든 것들을 끝내실 것”(15:4)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제7일은 “불법한 자들에 대한 통치를 끝내고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며 해와 달과 별들을 변화시키고, 그런 후 제7일에 편하게 안식하”게 될(15:5)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는 안식일의 성화가 불가능하며, 다만 그것은 “불순종이 더 이상 없고, 모든 것들이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게 되는 때”인 그 미래 시대(일곱 번째 천년)에 성취될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바르나바스는 현재 시대에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으며 그 대신에 정당한 제도로서 “제8일”을 제안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를 꾀하면서 다음과 결론을 내린다. (372.2)
게다가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월삭과 안식일을 내가 견딜 수 없노라.” 그분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는 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안식일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안식에 이끌었던 그 날에 내가 만들었던 것, 제8일의 시작, 즉 또 다른 세상의 시작에 내가 만들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제8 일을 기쁨으로 준수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 날에 예수께서 죽음으로 부터 일어나셨으며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심을 보여주셨다.38)
(373.1)
 바르나바스가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차용한 이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제8일의 상징은 대다수의 교부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었고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이것은 우주적 주간으로 세상의 존속 기간을 고찰하였던 전통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고찰은 “제8일”에 대한 선택을 쉽게 고무시킬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영원에 대한 상징으로서 일요일 준수에 대한 유효한 변증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 준수자들과의 논쟁에 있어서도 효과적인 변명의 논증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39) 사실상 새로운 영원한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 제8일은 이 일시적인 세상에서 일천년 기간 동안의 왕국을 상장한 제7일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3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