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9장 일요일 신학
 초기교회의 교부들이 일요일의 도입과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기하였던 기본적인 신학적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성서적—사도적 가르침들로부터 발전하였는가? 아니면 안식일 준수자들로부터 제기된 반대의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이끌어 낸 것들인가? 그 초기의 신학적 설명들은 일요일 준수에 대하여 유기적이고 긍정적인 견해를 반영하는가? 아니면 신학적 불확실성과 논쟁을 초래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일요일 예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교부들이 제시하고 있는 신학적인 논거들을 살펴보는 동안에 우리가 유의해야할 질문들 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분석이 이 연구가 제시할 결론들에 대한 정당성을 판단할 가능성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359.1)
 초기 교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일요일 준수의 주요 동기들은 아마도 세 가지 주요 표제로 가장 잘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표제들은 부활, 창조, 그리고 제8일의 상징이다. 그 표제들과 관련된 신학적인 견해들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며, 시간의 추이에 따라 점진으로 발전한 것임을 유의하면서 이제 순서에 따라서 그 표제들을 하나씩 검토해 볼 것이다. (359.2)
 부활
 우리는 3장에서 이미 사도들의 시대에는 일요일에 부활을 기념하려는 주간 혹은 연례 제도를 만들려고 노력했었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 없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요일 준수의 지배적인 논거가 되었음은 사실이다. 아마도 부활을 일요일의 기원의 논거로서 가장 명확하게 기술한 내용을 제공해준 것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 A.D. 354-430)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의 날은 유대인들에게 선언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언된 것이었으며 그 부활 사건으로부터 그 축일이 기원되 었다.”1) 또 다른 서신에서 그 힙포의 감독은 다음과 같이 유사하게 주장한다. “주의 날은 부활에 대한 믿음에 의해 안식일에 우선하게 되었다.”2) 부활을 일요일 준수가 기원하게 된 원인으로 인정하는 이 간결하고도 명확한 인식은 오랜 기간 동안 신학적으로 숙고한 궁극적 결과를 나타내 보여준다. (360.1)
 2 세기 초에는 이 부활이 일요일 준수의 첫 번째 동기 혹은 유일한 동기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그나티우스는 “마그네시안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던 하나님의 선지자들”(8:2)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의 삶을 따라 사는 새로운 희망에 도달했다. 그 위에서(혹은 그것에 의해서) 우리의 삶도 역시 그의 죽음을 통하여 다시 살아났다(9:1).” 이 본문에서는 일요일 준수를 입증하는데 있어서 부활이 가지는 가치를 오히려 소홀히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그나티우스가 여기서 서로 대립되는 날들보다는 오히려 삶의 방식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360.2)
 바르나바스의 서신(Epistle of Barnabas, A.D. 135년경)에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그 저자가 부활을 일요일 준수에 대한 두 가지의 주요 동기들 중에 두 번째 동기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동기는 우리가 뒤에 계속해서 살펴볼 것인데 사실상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가 “제8일”로 명명한 일요일은 마지막 때의 안식일의 연장이며,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상징한다(15:8). 두 번째 동기는 일요일이 “예수께서 또한(έν α και)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신 날이며, 하늘로 승천하시는 자신을 보게 하신” 날이라는 것이다(15:9). 여기에서 예수의 부활은 일요일 준수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부가적인 내용으로 제시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부활이 그것의 주요 동기로 아직은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 (361.1)
 유스티노스 마르튀르(A.D. 150년경)에게 있어서도 그 상황은 현저하게 유사하다. 바르나바스처럼 그도 유대교와 안식일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변증서”(I Apology)에서 유스티노스는 바르 나바스와 같이 부활을 두 가지 동기 중 두 번째로 제시하고 있다. (361.2)
일요일은 사실상 우리 모두가 공중 집회를 개최하는 날인데, 그 이유는 그 날이 하나님께서 암흑과 [최초의] 물질을 바꾸시므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동일한 날에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셨기 때문이다.4)
(361.3)
 로르도르프(W. Rordorf)가 인정하고 있듯이, 유스티노스에게 있어서 “일요일 준수의 첫째 동기는 세상을 창조한 첫째 날을 기념하는 것이며, 그 외에 예수의 부활은 오직 두 번째 동기가 될 뿐이다.”5) 일요일 예배가 발생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대에 살았던 바르나바스와 유스티노스가 부활을 일요일 준수의 두 번째 동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 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처음에는 부활이 아직 근본적 동기로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요일 준수에 대한 주요 동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의 몇몇 예식적인 관습들은 본질적으로 그 관습을 기념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키프러스 사람들의 기록(A.D. 258년경으로 추정)에서 주의 만찬은 “비록 주님께서 저녁에 함께 나누셨지만 ∙∙∙ 우리는 주님의 부활로 인해 그것을 아침에 거행한다.”6) 마찬가지로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주의 날에 예배를 드리면서 금식하고 무릎을 꿇는 것은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7) 비록 그가 이러한 관습들에 대한 명확한 동기를 제공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의심할 것 없이 그의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잘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다른 교부들은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고안된 것들이었다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요일에 “금식하는 것은 중지되었고, 기도는 서서 드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부활에 대한 몸가짐이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다.9) (362.1)
 따라서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요일 예배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독점적이고 압도적인 명분으로 여겨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초기에는 오히려 몇몇 예식적 관습들을 초래하게 한 주된 이유로 나타났다.10) 이제 우리는 그 외의 다른 신학적 동기들이 맡았던 역할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362.2)
 창조
 세상 창조의 기념일을 기념한다는 것은 일요일 준수를 변호하기 위해서 교부들에 의해서 종종 제기된 하나의 구실이 된다. 위에서 주목해 보았듯이 유스티노스 마르튀르는 “제1변증” 67(I Apology 6)에서 이것을 기독교의 일요일 집회의 주요 동기로 제시하고 있다. “일요일은 사실상 우리 모두가 공중 집회를 개최하는 날인데, 그 이유는 그 날이 하나님께서 암흑과 [최초의 물질을 바꾸시므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이기 때문이다.” (363.1)
 앞서 이 구절을 논하면서 내린 결론은 유스티노스가 언급한 첫째 날의 빛의 창조 개념이 태양의 날에서 유추되고 있음을 제안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진술은 본질적으로 첫째 날에 창조가 시작된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매주일 모임을 정당화시켜주는 유효한 이유로서 이해되었다는 것을 지적해 준다. 레간의 지적에 따르면, “제1변증” 67장에 나타나는 유스티노스의 창조 모티프는 “빛과 세상에 대한 최초의 단순한 창조 이야기를 설명하기 시작한 59장의 모두(冒頭)에서부터 전개 되고 있다.”11) 유스티노스에 따르면, 주간의 첫째 날에 창조가 시작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이 있는데, 그 이유는 두 사건이 분명하게 같은 날에 발생했으며, 상징적인 의미에서 옛 창조의 시작과 새 창조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서로 연결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363.2)
 창조와 부활사이의 연관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유스티노스의 노력은 그 혼자만의 시도는 아니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의 증거 자료에서도 두 사건들은 명확하게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A.D. 339—397년경)도 일요일을 찬양하는 시에서 역시 이러한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날에 신성한 삼위일체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아니 그보다도 죽음을 정복하신 부활하신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해방을 주셨다.”12) 이러한 창조와 부활 사이의 연결은 알렉산드리아의 유세비우스의 한 설교(A.D. 500년경)에서 보다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364.1)
거룩한 일요일은 주님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 날은 주님께 속한(κυ ριακή)것으로 불리는 데 모든 날들의 주(κυριος)가 되기 때문이다. ∙∙∙ . 주님께서 세상의 창조의 기초를 세우신 날이 그 날이었고, 그 세상에 부활의 첫 열매들을 주신 것도 그 동일한 날이었다. ∙∙∙ 그러므로 이 날은 세상 창조의 시작(αρκή)이요, 주간의 시작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은혜의 원천이 된다. 이 날에 세 가지의 시작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날은 삼위일체의 본질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13)
(364.2)
 첫째 날에 창조가 시작된 것을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하는 유효한 동기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옹호하는 부가적인 교부들의 자료들이 더 인용되어질 수 있다.14) 이런 관점은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구약성서와 유대적 사고에서 안식일이 창조를 기념하는 독점적인 날로서 특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왜 일요일이 그것(창조)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는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를 준수했던 사람들이 창조와 부활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잘 예시된다. 예를 들자면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s, A.D. 380년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과 주의 날 축일을 지킬 것을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다. “창조를 위해서는 안식일을, 부활을 위해서는 주의 날을 지켜라.”15) (364.3)
 창조를 기념하는 것이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옮겨진 것은 아마도 안식일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존재 이유를 없애버리기 위한 계산된 시도가 아니었겠는가?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는 것으로 안식일의 우월성을 옹호하고 있었던 안식일 준수자들의 견해를 억누르기 위해 창조를 일요일 준수의 동기로 돌린 것이 아니었는가? 이 같은 논쟁의 흔적들이 몇몇 자료들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시리악 다다스칼리아”(Spriac Didascalia, A.D. 250년경)에서 그 논쟁적 어투는 매우 명확하게 나타난다. (365.1)
그러므로 사람들 중에서 믿음을 가진 너희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속박하는 것들로 구속되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성경이 ‘엿새 동안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 그 모든 일을 마치시며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이 주일의 첫날 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치라.
우리는 이제 그대에게 묻는다. 어떤 것이 먼저인가 알랩(Alaf)인가 타우(Tau)인가? 우리의 구주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더 위대한 날은 세상이 시작된 날이다.16)
(365.2)
 이 논쟁의 이슈는 명확하다. 적어도 몇몇 유대인 개종자들은 안식일이 창조의 완성을 상징하는 날이었음을 기초로 해서 제칠일 안식일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반면에 일요일 준수자들은 일요일이 창조의 기념일을 기념하는 첫 번째 날이기 때문에 안식일보다 더 우월하다고 논쟁하므로 그러한 주장을 반박했다. 이런 논의는 아타나시우스의 작품 중에서 발견되지만 아마도 위조된 작품인 것으로 추정되는 “안식일과 할례에 대하여”(On the Sabbath and Circumcision, A.D. 296—373년경)란 논문에서 보다 더 세련된 신학적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저자는 창조의 기념일과 창조의 완성이라는 이원성에 의하여 일요일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두 날들을 연속적인 두 창조의 상징들로서 묘사하고 있다. (366.1)
안식일은 첫 창조의 마지막이었고, 주의 날은 그분께서 옛 것을 새롭게 회복시키신 두 번째 창조의 시작이었다. 이전에는 그들이 첫 번째 창조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것으로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고 그분께서 규정하셨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기념하는 것으로 주의 날을 지킨다. 사실상 그분께서는 또 다른 것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옛 창조를 새롭게 하신 것이고 그가 시작하셨던 일을 완성하신 것이었다.17)
(3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