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창조와 구속과 소망의 축제) 11. 예수님의 안식일관 (John Brunt)
 예수님의 안식일 준수 방식은 위와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106.4)
 1. 그의 윤리는 결의론적 규칙들의 윤리가 아니라 콘텍스트적(전후문맥에서 판단하는:역자 주)윤리이다. 이 점은 예수님의 사용한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규칙에 의하면 다윗과 그 수행인은 성전의 떡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의 규칙 위반을 정당화하려 한다. 예수님의 윤리는 행위의 정당한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마땅히 숙고되어야 할 좀 더 깊은 원칙들에 기초하고 있다. 생명은 규칙의 준수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다. 거기에서 그는 법의 진정한 준수는 문자적인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 뒤에 있는 동기와 이유의 문제라는 것을 밝히셨다. 또 법은 행동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심령의 더 깊은 영역에 관련되 있음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단지 표면상의 일치로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법의 원칙에 대한 이해나 그 원칙에 일치하는 행위에 의하여 법을 지키는 것이다. 이 점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분명해 지고 있지만 그것이 가장 생생하게 잘 제시된 경우는 안식일과 관련해서 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안식일은 예수님의 윤리적 입장을 밝혀주는 모범이 되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윤리와 율법에 대한 태도를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안식일 태도의 두번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06.5)
 2. 예수님의 방식은 사람의 가치에 우위를 부여한다. 인간의 필요가 규칙의 문자적인 엄수보다 우위를 차지했다. 예수님의 방식에 따르면 율법의 전체 목적이 인간의 필요에 응하기 위한 것이요 인간의 생활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모든 율법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안식일에 특별히 잘 나타나있다.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여러 해 동안 학자들은 밀밭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뜻인지 아니면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토론을 해왔다. “인자(사람의 아들)”는 아람어로 단순히 “인간”을 뜻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인간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런 해석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의 첫 부분과는 잘 부합한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들을 모두 고려해 볼 때 “인자”란 말은 그보다 더 무거운 함축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107.1)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안식일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인간에게 베푸시고 안식일을 준수함에 있어서 자유를 제공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안식일 준수 방식의 마지막 특징을 살펴보겠다. (107.2)
 3. 예수님의 방식은 자유를 뜻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위가 율례에 맞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옹호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새로운 규칙들을 제시하셨는가? 그렇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밀밭 사건 같은 일들, 특히 그의 치료 기적행위들을 통해서 안식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일임하여 그들이 자유롭게 이 원칙들을 각기 자기가 원하는 생활에 구현하도록 하셨다. (108.1)
 이렇게 두 방식의 차이를 대조하여 살펴 보았으니 이제는 우리들의 안식일 준수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토의해 보아야 겠다. 현재 교회는 예수님의 방식을 어떻게 구현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교회가 안식일에 대하여 진지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만약 규칙들을 없이하면 혼란이 올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예수님의 방식은 너무나 비실제적이라고 한다. 규칙은 훨씬 더 많은 안전을 마련할 것이라는 것이다. 규칙이 없으면 사회를 바닷가에 풀어 놓은 아이들처럼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 되지 않을 것인가? 신앙 공동체가 안식일의 거룩성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은 이해할 수 있는 정당한 공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공포는 바리새인적 안식일 준수 방식을 이끈 항구적인 자극이었다. 교회는 예수님의 방식은 다른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분의 방식에 있어서는 안식일이 원칙 있는 자유, 제멋대로의 자유가 아니라 안식일의 의미를 심각히 고려하는 자유의 길을 가리키는 한 전형이 되고 있다. (108.2)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심각한 아이로니에 직면하다. 한쪽으로 우리는 규칙이 없이는 우리가 안식일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혹에 항상 빠져있다. 그런데 또 다른 한쪽으로 안식일은 규칙들에 의존한 방식이 효과가 없을 것이란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순종은 문자적인 규칙준수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과 심령의 문제임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은 안식일을 지키는 예수님의 방식 곧 원칙 있는 자유의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관심의 해이나 부족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는 사회는 뭔가 다른 종류의 사회가 될 것이란 뜻이다. 그것은 안식일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안식일의 의미에 기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안식일을 선물로 받은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있을 지를 함께 생각하는 사회일 것이다. 이 공동체의 사람들은 안식일의 의미를 자신들의 삶 속에 실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들과 함께 모색할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안식일에 관한 성서적 자료를 중심으로 함께 생각하고 숙의하고 계획할 때 그 공동체가 안식일의 거룩성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계속 견지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방식을 믿는다면 이 방법이 안식일의 진정한 거룩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결의적인 규칙들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108.3)
 다음으로, 예수님의 안식일 준수 방식을 따르는 사회는 자유를 평가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은 함께 생각하고 서로 배우는 과정에서 안식일의 주인께서 이 자유를 부여해 주셨음을 인식하고 서로에게 관대해 질 것이다.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형제 자매들의 주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로 이같은 관점은 대단히 중요한 핵심적 요소로써 이를테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안식일 준수 방식을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해 볼 때 사용할 수 있는 기준점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우리가 우리 형제 자매들의 안식일을 지키는 진지한 노력에 대하여 정죄하는 경향을 시작하였다면 이는 우리가 이미 바리새 방식에 빠져들었다는 좋은 표징이 될 것이다. (109.1)
 예수님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는 이와 같이 한쪽으로는 안식일의 의미와 거룩성을 잊으려는 유혹을 피할 것이며 다른 한쪽으로는 바리새인들처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가 되려는 유혹을 피할 것이다.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두 유혹에 대한 승리를 주실 때 그는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며 우리는 안식일의 기쁨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109.2)
 미 주
 1. 마태는 제자들이 밀밭을 지날 때 배고픈 상태였다고 부연했다. 예수께서는 배고픔이란 공통성을 가지고 제자들의 이야기와 다윗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으셨다. 마태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반대가 질문 형태가 아니라 진술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태는 다시 대제사장 아비아달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그는 제자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두번째의 실례를 추가하고 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일하는데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는 주장이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들의 기자들보다도 예수님의 인격과 유대 제도의 대비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마태는 예수께서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신 사실도 부연하였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마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좋아한 것 같다. 마태는 여기에서만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9장13절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끝으로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처음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2. 안식일과 바리새인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A Day for Healing (Washington, D.C.: Revuew amd Herakl, 1981), 11-18.을 참고 하라.

 3. Shabbath 7:2, in Herbert Danby (trans.), The Mishnah (Oxford: Clarendon Press, 1933), 446

 4. Shabbath 16:l-6; Danby, 114.

 5. A Day fcr Healing, 44-54. (1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