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8. 히브리서에 나타난 믿음에 대한 온전한 확증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각 세대가 하나님의 음성을 믿고 순종할 엄숙한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7, 8)고 기록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반응하고 순종과 인내에 나타나는 능동적인 믿음의 조건들을 직면한다. 레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124.2)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광야에서 방황하는 오랜 기간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순례가 거의 끝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얻기 직전의 순간에 놓여 있는 백성의 상황에 비유했다. 저자의 종말론적 확신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에 있어서 그와 흡사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가데스의 상황과 여기서 지칭된 기독교 공동체를 비교하는 것은 양자가 시련과 위험이 도사린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은 해소되지 않은 긴장에 근거한다.7)
(124.3)
 이스라엘의 영적상태와 교회의 영적 상태의 유사성은 약속된 안식의 상실이 불확실한 약속의 결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과 반역 때문에 온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가르치고 있다. 히브리서는 약속된 안식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의 실패가 그 안식에 대한 약속과 접근성을 폐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한다. 필자는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4:1). 우리는 “장성”하게 자라남으로써 우리의 구원의 확증을 얻을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현재적 봉사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향해 전진하고, “구원의 온전한 경험”(6:9, J. B. Phillis)을 누림으로써 구원의 확증을 얻을 수 있다. (124.4)
 배교에 대한 엄중한 경고
 히브리서는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에 대한 세개의 혹독한 경고(6:4-6, 10:26-31, 그리고 12:15-17)를 하고있다. 존슨은 여기서 요한계시록 14:9-12의 셋째 천사의 기별과 유사한 것을 “분명하고 강경한 태도로”8) 인식한다. 히브리서 6:6“만일”(if, [개역한글판]에는 나타나지 않음—역자 주)을 눈여겨보는 것은 중요한데, 그것은 배교의 참된 위협을 가리킨다. 필자는 여기서 이따금씩 있는 믿음의 쇠퇴나 우리의 연약한 본성에서 야기되는 과오를 다루고 있지 않다.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히 6:6)에 대해 말한다. 극단적인 대조로써 그는 기독교적 확증의 말씀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르는 불의 엄중한 경고와 결합시킨다. 그는 영원한 두 운명을 예리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125.1)
 동일한 대조가 침례 요한의 기별을 특징지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대조는 재림을 위해 마지막 세대를 준비시키는 요한계시록 14장의 삼중기별에도 나타난다(참조 6-12절). 그 구절은 모든 백성을 향한 영원한 복음의 제안과 하나님의 불사르는 분노의 엄중한 경고를 결합시킨다. (126.1)
 네로의 통치 기간 동안 유대 기독교 공동체에게 있어서 예수를 공공연히 단념하는 것의 위험은 단순히 가설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한 가장 중대한 경고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히브리서 6:4-6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혹독한 경고에 적합하다. 어떤면에서 이들은 개인적 구원의 실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히 6:4, 5)—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레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4, 5절에서 필자는 회중을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가 그들의 삶의 분명한 본질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과 동일시한다.”9) 히브리서 6:4, 5의 말씀은 온전하고 진실된 기독교적 경험을 묘사한다. (126.2)
 영감 받은 저자는 만일 그런 신자들이 “타락”하면 그들은 “회개케 할 수 없”게 될 것(히 6:4, 6)이라고 선언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이 “배교”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레인은 이렇게 분명히 한다: “가데스에서 출애굽 세대가 신성한 약속을 거절한 것과 유사하게 배교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단호한 그 거절을 수반했다”(3:7- 4:2).10)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6)고 말하는 것 외에 히브리인들의 배교가 어떤 형태를 취하였는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히브리서 4:14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 대한 그들의 침례 고백을 고려해 볼 때, 위협은 그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레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 유익을 위하여 유대교의 신념과 관습으로의 귀환은 물론 공권력이나 적대적인 군중으로부터의 압력으로 인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공공연히 부인하는 것을 수반했다(참조 막 8:34-38).11) 히브리서는 예수를 공공연히 부인하는 것이 성령을 거절하는 것이며, 회개로 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참조 행 5:31). (126.3)
 히브리서 6:7, 8의 농사와 관련된 예증은 7절“왜냐하면[헬라어: 가르 gar]”이라는 접속어가 가리키는 것처럼(애석하게도 NIV에서는 생략되었음. 「개역한글판」에서도 생략됨—역자주) 4-6절의 경고를 분명히 한다. 저자는 기독교 공동체를 자주 내리는 비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땅에 비유한다(6:7). 이것은 신명기 11:11, 12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상기시킨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게서 멀어진다면, 그들은 물은 충분하지만 “가시와 엉겅퀴”(6:8)만 생산한 땅과 같이 된다.이 마지막 문구는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나는 것을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저주의 결과로 보는 창세기 3:17, 18을 분명히 암시한다. 축복(6:7)과 저주(6:8)의 모티프는 히브리서 6:4-6 전체의 경고를 확고하게 하나의 언약적인 문맥에 위치시킨다(참조 신 11:26-28). (127.1)
 뒤이은 9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독교 신자들, 곧 당신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구원의 축복들에 대한 논박할 수 없는 증거를 주셨다는 저자의 확신을 확증한다. 그는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히 6:11)게 하기 위해 기독교적 사랑에 그들이 적극적으로 남게 되길 기대한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실제적인 관심사이다. (127.2)
 기독교적 확신과 인내를 위한 기초
 히브리서 6장에서 저자는 권고로부터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확대된 하나님의 약속의 신빙성에 대한 논의로 전환한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절대적 확실성과 신빙성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인간에게 이중적인 확증을 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약속을 허락하시고, 그런 다음 엄숙한 맹세를 하셨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인내의 시험을 극심하게 당한 후 약속과 하나님의 보증하는 맹세를 받게 되었다(6:13-15; 참조 창 22장). 다음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의 율법적 의의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7). 신성한 맹세는 약속의 영속적인 유효성에 대한 어떠한 의심을 배제하는 보증을 제공한다. (128.1)
 저자는 아브라함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쟁 상대로 삼아야 할 믿음과 인내의 본보기로 언급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언약적 맹세를 시편 110:4에 나타난 메시야적 약속에 대한 호소와 함께 기독교 신자들에게 확대한다(참조 히 5:6; 6:20). 아브라함을 향한 약속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변경할 수 없는 뜻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 6:18, 19, 강조 첨가). 그리스도인들이 “붙드는” 소망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객관적인 선물이다. 히브리서에서 소망이란 단어는 “현재와 미래의 구원을 구성하는 소망의 객관적인 내용”으로 묘사한다.12) (128.2)
 아브라함을 향한 약속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구원을 예시한다. 임명된 대제사장으로서 그는 지금 “우리를 위하여” 하늘 성소의 휘장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셨다(6:20). 휘장 안이란 표현은 이런 말과 유사하다: “그리스도께서는 ∙∙∙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재림교회 성경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휘장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엔 아무 것도 없지만 카타페타스마[katapetasma, 휘장]는 단순히 예수께서 봉사하시는 곳—언약 백성의 소망이 집중된 곳이며 또 그곳으로부터 언약의 축복이 베풀어지는 장소—을 파악하도록 소개된다. 그들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휘장’을 하늘 성소에 대한 비유적인 사용이라고 결론을 맺었다.”13) (129.1)
 새 언약은 이런 축복을 허락한다: 그것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적 봉사에 있어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10:22; 참조 롬 5:2).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붙들고 계신다. “그분의 위격과 그분의 사업이 우리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만든다.”14) (129.2)
 미 주
 1) In W. G. Johnsson, Hebrews, The Abundant Life Bible Amplifier, G. R. Knight, ed.(Nampa, ID: Pacific Press, 1994), 25.

 2) M. L. Andreasen, The Book of Hebrews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48), 38.

 3) Johnsson, 21.

 4) William L. Lane, Hebrews 1-8, Word Biblical Commentary 47a (Dallas, TX: Word Books, 1991), c.

 5) Johnsson, 192.

 6) Lane, cxxiii.

 7) 상게서, 90.

 8) Johnsson, 114.

 9) Lane, 142.

 10) 상게서.

 11) 상게서.

 12) 상게서, 153.

 13) G. E. Rice, in Issues in the Book of Hebrews, Daniel & Revelation Commentary Series (Silver Spring, MD: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89), 4:234; 참조 H. Kiesler, ibid., 76.

 14) Johnsson, 119. (1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