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8. 히브리서에 나타난 믿음에 대한 온전한 확증
 히브리서는 아마도 로마시의 유대 기독교회에 보내진 최초의 설교일 것인데, 그것은 로마에서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새제임스왕역」(NKJV, 1983)의 서문은 독자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준다:“비록 「제임스왕역(KJV)」이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사도바울의 서신’(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Hebrews) 이라는 표제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그 표제]을 지지할 만한 초기 사본의 증거가 없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신뢰할 만한 표제는 단순히 프로스 에브라이우스(Pros Ebraious, ‘히브리인들에게’)다.” 「새제임스왕역」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라고 제목 붙여진 단락은 왜 성경학자들의 대다수가 이 서신의 바울 저자성을 거부하는지에 대한 여섯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이 선언하기도 한다: “히브리서의 영적 깊이와 질은 저자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감성을 입증했다.” 기원후 3세기에 살았던 교부 오리게네스(Origen)는 히브리서의 많은 부분이 바울적 특성을 지니고 바울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음을 인식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진술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교회가 이 서신은 바울의 것이라고 주장하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1) (117.1)
 히브리서의 목적
 히브리서는 아마도 기원후 64년에서 68년 사이, 즉 로마의 대화재와 네로 황제의 자살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 동안 로마에서는 유대 기독교인들을 향한 핍박이 고조되었다. 그들 중 어떤이들은 신앙을 버리고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신뢰를 공공연히 부인하는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참조 6:4-6; 10:26-31). 다른 이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입었다(참조 10:32-34). (118.1)
 머지 않아(AD 70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그것의 옛 언약적 봉사들은 파괴될 것이었다. 수천 명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성전에서 예배했고, 그들 모두는 모세의 율법을 열렬히 떠받들었다(참조 행 21:20). 히브리서는 위기 가운데 놓여 있는 공동체에게 보내져서 하늘 성소에 관한 복된 진리와 옛 언약이 가져다 준 것 보다 더 나은 소망을 보증한 새 언약의 완전한 대제사장에 대해 설명했다. M. L. 앤드리어슨(M. L. Andreasen)은 예수의 봉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긴급한 필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18.2)
초대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우리가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로마 군대가 그들의 아름다운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때, 당황과 실망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늘에 있는 참된 성소와 그 봉사에 대한 분명한 이해뿐이었다. ∙∙∙ 성소에 대한 이해가 그들의 구원이었다. 만약 그들이 승리하려면 이 생생한 주제에 관한 빛이 그들에게 와야 할 것이었다.2)
(118.3)
 히브리서의 저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향한 그들의 헌신에 있어서 충성스럽게 남도록 격려하려는 “권면의 말”(13:22)로 이 서신을 보냈다. 윌리엄 G. 존슨(WHliam G. Johnsson)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므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공동체로부터 점차적으로 이탈하도록 이끈 피로나 혹은 마음에 침입한 죄 때문에 생긴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에 대한 의도적이고 공공연한 거절이다.”3) 이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이들은 유대교로 돌아갈 위험에 놓여 있었다. 결과적으로 목양 중심적 설교는 지극히 실제적인 목적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유일한 구원의 중보자이신 예수께 대한 충성을 독려하고 그들이 사도로부터 들은 복음 기별에 무관심한데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118.4)
 윌리엄 L. 레인(William L. Lane)은 이렇게 진술한다: “감동적인 언어로 그의 아들 안에 하나님의 계시의 결말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의 초월적인 위엄은 부리는 영인 천사들(1:1-14)과 믿음의 집에서 종(사환)의 신분인 모세(3:1-6)보다 탁월하다.”4) 레인은 히브리서에서 제사장과 희생제물로서 예수의 탁월한 신성을 나타내는 세 가지 대조를 지적하고 있다:

   (1) 아론의 제사장직의 한시적 성격이 예수의 제사장직의 영원한 봉사와 대조된다(5:1-10; 7:1-28);

   (2) 옛 언약의 레위 제사장직은 새 언약을 설립하는 하늘 성소에서의 예수의 제사장적 봉사에 의해 대체된다(8:1- 9:28);

   (3) 율법 아래에서의 희생의 부적합성은 예수의 희생의 적합성과 완성과 대조된다(10:1-8). (118.5)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신학적 논거로 독자들에게 자신의 목회적 권고를 위한 확고한 기반을 세우려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말씀으로 그들의 표류하는 신앙과 흔들리는 소망을 새롭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는데 도움을 주려고 했다. 그는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3, 강조 첨가). 그런 목적으로 그는 자신의 설교를 예수의 계속적인 중보 사업에 집중시키고 예수의 인격의 탁월성(1:1- 4:13)과 예수의 사업의 충족성(4:14-10:18)을 광범위하게 설명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확고한 메시야적 약속들에 기초하였고, 약속된 미래에 대해 절대적 확실성을 가지고 기대한다고 강조했다(참조 11:1-40). 결국 그는 신앙의 최고 모본, 곧 확고한 인내에 대한 자극이신 예수 그분께 호소했다(12:1-3). 따라서 저자는 예수의 위격(1:1- 4:13)으로부터 그의 사업(4:14-10:18)으로 이동하고 기독교 신앙과 사랑 안에서 인내할 것을 간절히 호소함으로 결론을 맺었다(10:19- 13:25). 예수의 구속적 의의는 이 서신의 모든 사상 체계를 지배한다. 다른 어떤 성경도 그를 그렇게 완벽하게 대제사장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참조 2:17, 18; 4:14- 5:10; 6:20- 8:2). (120.1)
 예수 안에 있는 온전한 확증
 믿음과 구원의 확증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에 대한 산 믿음의 유익들을 가져야만 한다. 히브리서는 세 가지 본질적 유익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2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 갈 담력[헬라어: 파레시아 parrēsia]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헬라어: 엔 플레로포리아이 en plērophoriai]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히 10:19-23, 강조 첨가).
(121.2)
 기독교 신앙과 구원의 확증은 다음 세 가지에 달려 있다:

   (1) 예수의 보혈, 곧 우리가 하늘 성소에 들어가는 담력을 얻게 하는 것의 능력을 믿는 것;

   (2) 하늘에 계신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3) 하나님 앞에서 죄로부터 정결함을 입은 마음 혹은 양심.

 히브리서 4:14-16에 있는 것들을 자세히 설명한 이 주장들은 하늘 성소에서의 예수의 현재적 봉사에 기독교적 확증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구절 역시 예수의 위격과 사업이 우리의 영원한 안전을 이루고 이전에 온 모든 것을 능가함을 진술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확증이 우리의 느낌이 아닌 예수께 달려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죄와 결점에 대한 모든 감정들과 의심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한다.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은 우리에게 달려 있거나 혹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에 달려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대속주이신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존슨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강조한다: (121.3)
우리가 아니라 그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누구냐에 있지 않고 그가 누구이냐에 달려있다.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 이루였느냐에 달려있다. 거기에 우리의 확신, 우리의 확증이 놓여 있다. 그가 우리의 확증이시다.5)
(122.1)
 이 복된 소식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자극하고 격려한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히 10:23, 강조 첨가). 신자들 역시 책임이있다. 그들은 매일 믿음을 행사하므로 인내하는 믿음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미쁘신 약속에 대한 믿음은 의심의 구름을 뚫고 부활하신 주님을 붙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19, 20, 강조 첨가). (122.2)
 약속은 다만 그것을 체결한 이만큼 믿을만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을 신뢰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그것들을 보증하시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믿을 만한 소망인데, 이는 그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122.3)
 심지어 지금도 우리는 마음속 깊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거나 경험할 수 있다(참조 6:5). 예수께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이는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고(2:9)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2:14, 15)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기 때문이다. (123.1)
 확증에 대한 우리의 항구적인 필요
 히브리서 2:14; 3:7-4:16; 5:11-6:12; 10:19-39; 그리고 12장13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가 히브리서에서는 지배적이다. 이 서신은 지극히 실제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다. 영감 받은 기자는 유대 기독교인들—그리고 넓게는 모든 신자들—이 자신들이 고백하는 예수 안에서의 용기와 소망을 간직하도록 권고한다(참조 3:6). 그는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의 이스라엘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그들을 경고하는데,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었다(3:7-19; 참조 민 14장). (123.2)
 기독교 공동체와 모세의 인도 아래 있던 고대 이스라엘과의 이런 비교는 이스라엘과 교회가 연속적인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과 교회를 설립하셨다. 구속사의 이런 통일성에서 교회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는 실체에 대한 표상의 관계이다. 시편 95:7-11 에 대한 저자의 표상학적 해석은 히브리서의 권고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인은 이렇게 진술한다: 히브리서 4:1-11 에서 발전된 안식의 신학은 원형 (archetype, 하나님의 최초의 안식, 4:4), 표상(type,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에 정착함, 4:8), 그리고 실체(antitype, 구원의 완성을 경축하는 안식, 4:9)의 형식을 고려하고 있다.”6) (123.3)
 이런 역사적 유사성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계획의 통일성 및 옛언약과 새언약의 통일성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동일한 소망과 조건들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시편 95:7-11은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에 대한 영감받은 명상을 제공한다(비교 민 14장). 수 세기 전 이스라엘의 광야 세대에 관해 기록된 것도 교회와 관련이 있다(히 3:7). (1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