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7 장 그리스도와 1844년1)
 그러므로 내 견해로는, 밸린저가 펴보인 증거는 대충 보면 기본적으로 건전해 보이며,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이런 증거와 그가 거기서 끌어낸 결론을 적용할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134.1)
 적어도 세 가지 사항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134.2)
 첫째, 그토록 맹렬하게 교회를 비판해 온 배교자, 특별히 엘렌 G. 화잇이 그의 신학을 그토록 강력하게 정죄한 사람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적절하고 현명한지를 결정해야 한다. (134.3)
 둘째, 그의 해석에 결함이 있으며, 따라서 구약과 복음서와 히브리서에 나오는 “휘장 안에”라는 표현의 의미에 상관없이 그것이 하늘 성소의 지성소를 가리키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134.4)
 셋째, 엘렌 G. 화잇이 밸린저의 신학 전반을 정죄했는데도(내가 알기로는 화잇 여사가 마음에 거슬린다고 여긴 그의 신학의 특정한 측면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 부분에서 옳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가 옳았다면, “휘장 안에”라는 표현이 하늘 성소의 성소를 가리킨다는 우리의 선구자들의 견해가 옳지 않았다고 여겨야 한다. (134.5)
 내가 마지막 사항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는 아마도 확실 할 것이다. 내 견해로는, 만약 히브리서의 저자가 소위 “하늘 지리”(celestial geography)에 비추어 생각하고 있었다면, 1844년에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의 지성소로 처음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한 우리의 선구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히브리서 밖에서도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을 때 하나님의 우편 곧 모두가 최고의 영예의 자리로 인정하며 고대 성막에서 지성소의 속죄소로 대표된 곳으로 직접 들어가셨다는 풍부한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14) (134.6)
 그렇다면 내가 ‘예’ 곧 선구자들이 옳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135.1)
 그들이 선택한 표현의 이면에 들어 있는 본질적인 점은 건전했다는 말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35.2)
 재림교인들이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의 성소에서 그의 봉사를 시작했다고 가르쳤을 때 그들은 소위 “하늘 지리”에 주의를 집중한다고 비난받아 왔다. 이런 비난에 대해 내가 항상 희한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비난하는 바로 그 사람들도 그리스도께서 지성소로 직접 들어갔다고 역설하는 데 빠르다는 점이다. (135.3)
 그러면 소위 “하늘 지리”에 관심을 두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이 취임식을 앞두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공석이 된) 백악관으로 이사하기 전에 블레어 하우스(Blair House)에서 얼마 동안 지낸다고 말해도, 신임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직접 간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내가 “워싱턴 지리”에 지나친 관심을 둔다는 이유로 비난 받아서는 안 된다. 사실은 두 편 모두 어느 정도 “워싱턴 지리”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35.4)
 하지만, 히브리서의 구절로 돌아가면 히브리서의 저자“하늘 지리”에 관심을 두었는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그 책의 증거에 의하면, 그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히브리서의 어느 곳에서도 저자는 성소와 대비되는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항상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를 대비한다. 저자는 하늘 성소와 하늘 제사장직분이 지상 성소와 지상 제사장직분보다 더 우월함을 입증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135.5)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제한 없는 접근”이라는 개념에 강조점을 둔다. 이것이 사실상 히브리서 6:19, 20이 말하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구약에서는 태생의 행운으로 레위 족속이 된 자들만 성소와 그것의 부속물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게다가 이 무리 중에서 오직 아론의 자손만이 신성한 구역의 첫째 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 오직 한 사람 곧 현직 대제사장에게만 1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성소의 내소 곧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되었다! (136.1)
 지금 히브리서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놀라운 진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아담의 모든 자손은 이제 온전히, 자유롭게, 제한 받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좌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종과 국적,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 신분에 상관없이 지상의 모든 사람은 단독으로 무한하신 분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자비를 얻기 위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히 4:9; 9:11, 12, 24; 10:19, 20).15) (136.2)
 이것이 바로 사도가 히브리서의 청중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위대한 보증이다. 그는 “하늘 지리”에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며, 따라서 히브리서 6:19, 20과 우리의 선구자들의 주장 사이에는 본질적인 갈등이 없다. (136.3)
 더 깊은 차원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선구자들의 표현 때문에 당혹해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공식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특별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용어로 사고하지 않는 19세기 중반의 뉴잉글랜드 청중에게 기별을 전 한 필부필부(匹夫匹婦)였다. 사실 19세기 중반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철학과 추상적 사고를 경멸하던 시기였다.16) 그들은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지닌 실제적인 사람들이었다. (136.4)
 따라서 성경의 말씀은 고대 표상적 예식의 문자적인 상징 곧 그들의 마음이 이미 길들여져 있던 상징의 옷을 입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압도적인 실망의 와중에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136.5)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고대의 표상적 예식에 나타난 본래 그대로의 생생한 문자주의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도 그러하듯이,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선택하셨다. 진리를 그들의 방식대로 그렇게 표현한 것은 레위기 예식들의 관점으로 볼 때는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수천의 청중에게 납득할 만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비롭게도 좌절과 배도 그리고 심지어는 불가지론에서 그들을 구해내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지켜 주었다. 그들이 그렇게 선포한 진리의 본질이 그것을 표현하는 데 사용한 문자적인 언어보다 더 심오한 것이었다. (136.6)
 일반 기독교계에도 속죄 교리와 관련하여 다소 유사한 사례가 나온다. 기독교 초기에 어떤 교부들은 속죄를 묘사할 때 매우 생생하고 회화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변장한 채 사단에게 속전을 지불하고 그의 영역으로 잠입하여 그분의 백성에게 구원을 베풀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쥐덫 비유를 사용하였다. 쥐가 미끼를 보고 덫에 걸려드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마귀를 잡기 위한 미끼가 된다.17) 16세기의 대(大)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런 생생한 문자적인 표현을 되살려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 이용했다.18) (136.7)
 속죄를 묘사하는 이런 방식은 몇몇 교리사 학자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것을 유아적이고 단순하고 기괴하다고 규정했다.19) 그러나 스웨덴의 존경받는 교회사 학자이자 신학자인 구스타프 아울렌(Gustaf Aulen)이 그러한 비평은 “겉옷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지도 않고 “외적인 형태를 뚫고 근저에 깔린 개념으로 들어가려는 진지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옳았다. 계속하여 그는 내가 동의하는 견해 곧 “교리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는 겉옷 속에 놓여 있는 것을 꿰뚫고 들어가 그 밑에 숨겨진 종교적인 가치들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순전히 피상적인 것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20)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1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