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부 예수와 옛 세대 (1:19-4:54) 제 2 장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 (1:19-51)
 외관상으로 볼 때, 예수의 침례는 압도적이고 극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침례자가 말한 것처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지 40일이 지난 후에 군중 가운데 서셨으나 아직 그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26절; 참고 화잇, 시대의 소망, 137). 그러나 곧 변화가 이르러왔다. 침례자 요한 뒤에 오시는 분은 너무 위대하여 요한이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선언했다(27절). (74.3)
 침례자가 살던 시대는 선생들에게는 “좋은 옛 시절”이었다. 높이 우러러봄을 받는 선생들은 요즘 말로 학생들이 차도 닦아주고, 잔디도 깎아주고, 원하는 요리도 해 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 만큼 높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학생들은 선생을 위해 종노릇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그러나 이 같은 “종” 노릇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학생의 존엄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한 가지 과제는 금지되어 있었다. 학생은 교사의 신들메를 매거나 푸는 일은 요구받지 않았다. (75.1)
 그래서 1:27의 침례자의 진술 속에서 우리는 그의 놀라운 겸비를 보게 된다. 그가 자신을 예수의 위대함과 비교할 때, 그는 당시의 제자들에게 금지된 그 한 가지 일을 수행하는 것조차 과분하다고 느꼈다. 예수께서 너무 위대하셔서 그분의 신들메를 푸는 것도 요한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영예라고 느꼈다. 물론 서언을 읽은 사람은 예수 앞에서 그와 같은 겸비가 당연한 것임을 충분히 깨닫게 될 것이다(1-5절). (75.2)
 예수의 위대함은 그가 침례자보다 선재했다는 사실 가운데 나타난다. 침례자의 역할은 그 자신의 위대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단순히 예수가 누구인지 가리켜 보이는 것이었다. 이 일에 있어서도 침례자에게 돌아갈 영광은 전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예수의 위대함을 인식할 수 없었다. 예수가 누구인지 그로 알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였다. 이 이야기의 각 부분은 사람들이 침례자에 대하여 한 증거와 대조를 이루는 예수의 위대함에 최고의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75.3)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침례자의 역할이 매우 미미해 보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제자들을 예수에게로 돌아가도록 하기 시작한 장본인이 바로 침례자였다(35-37절; 3:26, 30). 이 두 제자 중의 하나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수의 다른 모든 제자들이 본문 속에 이름이 나타나므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제자는 이 복음서를 저술한, 신비에 싸인,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13:23, 등)와 쉽게 동일시될 수 있다. 만약 원래의 독자들이 35-42절에 나타난 무명의 제자가 이 책의 저자임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의 복음서는 침례자의 제자들에게 “침례자는 내가 한 것처럼 그대도 행하기를 원하노라. 즉 예수를 따르라!”는 엄청난 도전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75.4)
 43-51절에는 빌립과 나다나엘이라는 새로운 두 제자가 주의를 끌고 있다. 빌립은 오직 제4 복음에서만 제자들 가운데서 탁월한 역할을 수행한다(43-46절; 6:5-7; 12:21, 22; 14:8-10). 이 문단에서 그가 하는 역할은 “와 보라”(46절)는 단순한 말로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이 복음서에 흔히 나타나는 주제이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9장의 눈먼 자, 그리고 도마, 이 모두가 믿기 위해 예수를 보아야 했다. 그 결과, 독자들은 궁극적인 축복이 보지 않는 자들을 위해 예비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20:29). (76.1)
 나다나엘은 비록 정직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빌립의 초청에 대해 큰 회의를 표출한다—“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이 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의 가나 출신이다(21:2). 비록 가나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지만(가장 가능성이 큰 곳들에 대해서는 Freedman, 1:827을 보라), 가나와 나사렛은 서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쌍둥이 도시였던 것 같다. (76.2)
 갈릴리에는 세 가지 형태의 거주지가 있었는데, 즉 셉포리스(Sepphoris), 요타파타(Jotapata), 그리고 디베랴(Tiberias)와 같이 전적인 이방인 도성들(이들 모두 예수께서 방문하신 기록이 없다),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상당히 잘 지키는 유대인 성읍들, 그리고 유대적 특성을 매우 느슨하게 간직한 유대인 성읍들이 있었다. 나다나엘이 한 말에 비추어 볼 때, 가나는 그것을 잘 지키는 성읍들 중의 하나였고, 나사렛은 느슨하게 지키는 성읍들 중의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76.3)
 이 복음서에서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는 예수의 특성들 중의 하나는 그분이 다른 사람의 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다 아신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성급한 시몬에게 “반석”(헬라어 별명인 “베드로”란 이름의 의미—42절)이라고 별명을 붙이심으로써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의 성격을 알고 계심을 보여 주셨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도 두 번이나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친숙히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그는, 원래의 이스라엘로 불리었던 야곱이 그러했던 것과 똑같이, 그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하늘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참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빌립이 그를 만나기 전에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씀하심으로써 나다나엘의 삶에 대해 잘 알고 계심을 확증하셨다. 나다나엘은 자신과 함께 이야기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했다. (76.4)
 하지만 나다나엘과 야곱 사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원래의 이스라엘은 기만(欺瞞)하는 사람(창 27:35)이었으나 나다나엘에게는 기만이 없었다(요 1:47). 원래의 이스라엘은 하늘 사닥다리의 꼭대기에 계신 야훼(Yahweh)의 이상을 보았으나(창 28:12, 13), 나다나엘은 그 사닥다리의 바닥에 계신 예수의 “이상”을 볼 것이었다(요 1:51).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참 이스라엘은 육신적 혈통으로 야곱에게 연결되는 자가 아니다. 참 이스라엘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를 믿는 자이다. 하늘 사닥다리의 꼭대기에 계시던 야훼께서 땅에 내려오셔서 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에 의해 인지(認知)되고 계셨다. (77.1)
 문단의 주요 주제
 증거
 19-51절의 관건이 되는 주제는 증거이다. 이 문단의 첫 부분에서 침례자는 예수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이 문단의 끝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안드레, 빌립, 그리고 마침내 나다나엘—도 그분에 대해 증거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문단에서 우리는 침례자의 증거로부터 예수의 제자들의 증거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복음의 능력이 생애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후자의 증거를 통해서이다. 사실 참으로 문제가 되는 유일한 증거는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안식일, 예언, 성소, 혹은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해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눈다 하더라도, 교리가 예수에게 보다 더 분명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증거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77.2)
 증거라는 주제는 5:31-47에서 다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곳에서 침례자, 아버지, 성경, 그리고 모세의 증거 모두가 한 목소리로 예수는 자신이 주장한 바로 그분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예수의 증거”는, 교회들도 증거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는(계 2:13; 6:9-11; 12:11) 요한계시록에서도 주요 주제이다(계 1:2, 9; 12:17; 19:10, 등). 제4 복음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신원과 성품이 독자들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음을 발견한다. 계속되는 증거는 서언의 증언을 확증하고 있는 데 반해, 요한복음의 여러 등장 인물들은 예수께서 마침내 최후의 심문을 받으실 때까지 이 증언을 의심하고 거절한다. 이야기 속의 등장 인물과 궁극적으로 복음서의 독자들이 이 증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수께서 영접을 받으실 것인가, 아니면 거절을 당하실 것인가? (78.1)
 이러한 쟁점이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요한복음 12:47-50은 심문과 증거라는 주제의 역설적인 반전(反轉)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날의 심판 때에 이 복음서의 독자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그 동일한 증거의 말씀들이 그분을 거절한 자들을 대항하는 증언으로 나타날 것이다(48절). 표면상으로는 제4 복음에서 예수의 신원과 성품이 심문을 받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심문을 받는 자들은 이 복음서의 독자들이다. 독자들이 예수에 대한 심판을 선고할 때, 그들은 또한 자신들에 대해 심판을 선고하는 것이다. (78.2)
 침례자의 운동에서 배울 교훈
 제1세기를 넘어서까지 “침례자의 운동”(“Baptist movement”)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에는 우리가 배울 중요한 교훈이 있다. 침례자 요한이 하나님에 의해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와 그의 운동을 일으키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운동의 기초를 놓는 일에 관여하셨지만, 그 동일한 운동이 후일 그분을 대항하고 그의 참 백성을 대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든 단체적으로든 하나님과 아무리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해도, 우리는 지속적인 겸손과 자아 의식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연약성과 죄됨으로 인하여 개인적 및 단체적 배교는 영적 활력에 지속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한 운동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 속에서 계속 나아가지 않으면, 그것이 신실함에서 떨어져 나가는 경향이 있다. 계속적인 자아 비평과 회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유일하게 안전한 행동 노선이다. (78.3)
 침례의 의미
 신약에는 침례를 언급하고 해석한 많은 본문들이 있다. 요한복음 1:29-34은 침례의 중요성에 대한 단 하나의 측면을 집중해서 다루고 있다. 이 문단에 따르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침례를 통하여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신원은 확립되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신원이 확립되는 것은 바로 침례를 통해서이다. 침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에 있어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롬 6:3, 4).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생애를 가지게 된다. 옛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고후 5:17). (79.1)
 그러므로 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침례는 생애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옛 습관, 중독, 그리고 가족의 불화가 한때 우리의 신원을 형성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역사를 확립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의 세포들과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 새로운 신원에 대항해 싸울 것이다. 대개 그 전투는 매우 냉혹하다. 장시간의 상담과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신원을 붙들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밟아 가는 능력이 침례에 있다. (79.2)